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2화
46. 최후의 인장(14)
니콜레타의 뒤쪽에서 몇 명의 마법사와 흑마법사들, 용병 전사들과 노인의 수하들이 서로 싸우면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다들 치열한 전투를 거쳤는지 몸이 성해 보이는 자는 한 명도 없었고 제단 가까이로 오려는 사람들의 몸싸움으로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르첼로가 팔을 휘두르자 방금 니콜레타의 앞으로 나서서 제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로브 자락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니콜레타가 은창을 지팡이처럼 짧게 잡고 내밀자 빛줄기가 마르첼로를 겨냥하고 발사되었다.
어깨와 다리 쪽으로 번갈아 가며 연사되는 빛줄기를 몸을 흔들며 아슬아슬하게 피한 마르첼로가 니콜레타를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머리나 가슴을 노리지 않는 걸 보니 이 몸을 죽이고 싶지 않은가 보군?”
그 말을 들은 테오도르가 외쳤다.
“니콜레타 님, 저놈은 이미 세르지오가 아닙니다. 사정을 두시면 안 됩니다!”
“세르지오의 혼은 어떻게 되었지?”
니콜레타가 묻자 노인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의 혼은 이미 저승으로 돌아갔다. 이 몸을 마르첼로 님께 바친 것은 영광된 일이지. 그는 기꺼이 마르첼로 님의 그릇이 되었다.”
“세르지오가 자신이 소멸한다는 걸 알고도 몸을 바쳤다고?”
“음, 그는 마르첼로 님의 혼을 제 몸에 받아들인 후 더 위대한 마법사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었지. 하지만 큰일에 작은 희생은 항상 필요한 법이야.”
“역시 그 아이를 속인 거였군.”
니콜레타가 분노했고 노인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마르첼로 님, 싸움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문을.”
노인이 재촉했고 마르첼로는 손이 근질근질한지 몇 번 몸을 움찔거리다 마지못해 문 쪽을 향해 돌아섰다.
니콜레타와 마법사들이 노인과 흑마법사들의 전열을 뚫기 위해 필사적인 싸움이 벌어졌지만 세르지오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는 뒤쪽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마계의 문을 향해 선 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문이 덜걱대며 벽 전체가 흔들렸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끔찍한 소리가 문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등 뒤에서 비명과 신음 소리가 들렸고 가끔 빗맞은 빛줄기나 불꽃, 얼음 화살 등이 그의 몸을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손도끼 하나가 핑글핑글 돌며 그의 등으로 날아왔으나 그는 등에 눈이 달린 것처럼 한 발짝 옆으로 옮기는 것으로 도끼를 피했다.
도끼가 그의 팔을 스치며 지나가서 마계의 문 앞에 꽂혔고 그의 팔에서 피가 터졌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주문을 계속했다.
마침내 주문 외우기를 마친 그가 제단 위에서 희생물들의 피를 담아 놓은 그릇을 집어 들었다.
아까 노인이 그의 가슴에 붓고 남은 피였다.
뒤에서 니콜레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힘내라. 약속의 아이가 올 것이다. 천 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르지오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가 휙 돌아보더니 잔인해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아직 오지 못했는데 그가 올 거라고? 이젠 늦었다. 네놈들은 모두 산 채로 마수의 이빨에 찢길 것이다.”
마르첼로가 손에 들었던 피를 마계의 문에 확 뿌렸다.
문이 피를 삼키듯 쫙 빨아들이면서 더 필요하다는 듯 으르렁거렸고 마르첼로가 제단 위의 단검을 집어 들어 제 팔을 길게 찢었다.
쭉 찢어진 팔을 문에 휘두르자 피가 뿌려진 문이 크르릉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막아라!”
니콜레타가 비명을 질렀고 그녀와 테오도르를 비롯한 몇 명의 마법사가 몸에 가해지는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무시한 채 지팡이나 무기를 문 쪽으로 휘둘렀다.
몇 줄기의 빛이 문에 부딪히며 반투명한 막을 생성했다.
문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을 멈추고 불쾌하다는 듯 네 귀퉁이를 비틀었다.
문이 일그러지고 비틀리면서 보호막을 뚫고 열리려고 기를 썼다.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시커먼 구렁이 같은 촉수가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음산한 기운이 그 촉수로부터 흘러나왔다.
삐죽삐죽 붉은 가시가 돋은 촉수는 거대한 짐승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였다.
촉수가 점점 굵어지더니 사람의 몸통보다 더 굵어졌다. 기둥처럼 굵어진 촉수가 문 사이에서 삐대자 문이 끼드득 끼드득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세르지오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가 입꼬리를 올렸다.
“봐라! 마계의 문이 열린다. 이제 마기를 품지 않은 자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니콜레타가 무릎을 꿇었다. 문을 향해 뻗고 있던 은창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기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노인이 산발이 된 머리카락 밑의 얼굴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마법사들의 공격으로 엉망이 된 몰골이었지만 마계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본 그의 얼굴은 희열에 차 있었다.
그가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니콜레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움직이면 그나마 마계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버티고 있는 보호막이 깨져 버릴 것이므로.
노인이 일부러 느린 동작으로 지팡이를 휘두르자 거무스름한 빛줄기가 니콜레타에게 날아왔다.
퍽 하고 가죽 북을 두들기는 듯한 소리가 나며 니콜레타의 앞을 가로막은 여자가 쓰러졌다.
“레노아!”
니콜레타가 비통하게 신음했다.
문의 보호막에 집중하느라 옆에 누가 남아 있는지도 볼 수 없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점점 땅으로 떨어졌다.
마계의 문이 더 벌어지면서 또 한 가닥 촉수가 밖으로 밀고 나왔다. 덩굴 식물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오는 것처럼 밀고 나오는 촉수들을 보며 니콜레타가 눈을 감았다.
여기까진가. 제이든, 결국 성공하지 못한 거니!
콰칭!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이 깨졌고 촉수들이 일제히 뱀 떼처럼 머리를 치켜들자 마르첼로와 노인이 환성을 질렀다.
“열려라! 문이여! 나와라! 마수들이여! 나와서 이 세상을 짓밟아 버려라!”
노인이 미친 듯 고함을 질렀고 반쯤 열린 마계의 문이 쩍 벌어지려는 순간!
콰르릉 소리와 함께 천장이 무너졌다.
모래 동굴의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나더니 회오리바람이 빨아들이듯이 천장이 가루가 되어 하늘로 빨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바탕 모래 폭풍이 지나간 후, 누가 뜯어낸 것처럼 천장이 통째로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런, 하마터면 늦을 뻔했군!”
천둥이 낮게 울리듯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왔다.
뻥 뚫린 하늘 위로부터 서서히 내려오는 두 마리의 용이 보였다.
한 마리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좀 더 큰 용은 얼음으로 빚은 듯했다.
“어째서!”
땅에 쓰러져 있던 노인이 이를 갈았다.
“어둠의 악룡이 그 주인과 함께 갔는데 그 보잘것없는 감정사를 막지 못했다고? 그럴 리가.”
마계의 문이 위험을 느낀 듯 으르렁거리더니 반쯤 열린 문 사이에서 붉고 검은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롸롸라라!”
하늘을 울리는 포효와 함께 빙룡이 입을 벌렸고 섬뜩한 냉기를 띤 흰 기체가 눈보라가 몰아치듯 문을 향해 밀려갔다.
거센 눈 폭풍에 밀린 마계의 문이 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안 돼!”
노인이 문을 향해 몸을 뻗으며 비명을 질렀고 마르첼로가 용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눈보라가 마계의 문 주변에서 회오리를 일으키고 문이 삐걱거리며 닫히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동안 은룡 엘리미네온이 제이든에게 말했다.
“약속의 아이야, 네 차례다. 피리를 불어라.”
제이든이 최후의 인장을 배낭에서 꺼냈다. 빙룡의 어깨에 앉은 채로 그가 최후의 인장을 불기 시작했다.
맑고 청명한 피리 소리가 하늘로부터 가라앉듯이 모래 동굴 속으로 흘러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쳐 있던 사람들의 귀에 피리 소리가 들리면서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반면에 흑마법사들은 괴로워하며 귀를 싸쥐었다.
마계의 문을 뚫고 기어 나왔던 마수들이 고통스럽게 바닥을 기었고 문틈에 끼어 있던 촉수가 괴롭게 몸부림치더니 조금씩 안쪽으로 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안 돼! 돌아가지 마! 문을, 문을 열어야 한다고!”
노인이 매의 발톱처럼 구부러진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목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마르첼로 님, 제발, 마르첼로 님, 문을…….”
마르첼로가 무감정한 눈으로 노인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문을 더 빨리 열었어야 했는데, 빙룡의 잠을 깨울 자가 나타날 줄이야.”
그가 노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 충실한 종이여. 내게 미래를 안배할 힘을 다오.”
다음 순간 노인이 가뭄 속의 논바닥처럼 말라붙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노인이 미이라처럼 쪼그라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공포와 혐오로 얼어붙었다.
테오도르가 그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으나 마르첼로는 보지도 않고 한 번 손을 젓는 것만으로 그의 마법을 무력화시켰다.
“인간이라면 내게 대항할 자를 찾을 수 없는데, 마법의 종주가 둘이나 나타났으니 아깝구나.”
마르첼로가 두 마리의 용에게 눈길을 던지더니 바로 옆 바닥에서 비틀거리고 있던 늑대를 닮은 마수 한 마리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그가 등을 두드리자 마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 쪽으로 덤벼들었다.
빙룡은 마계의 문을 닫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고, 은룡은 부상당한 사람들이 상할까 봐 손을 쓸 수 없었는데 마수는 쏜살같이 사람들을 헤치고 뻥 뚫린 동굴 바깥쪽으로 튀어 나가 사라졌다.
“놓치면 안 돼!”
테오도르의 부르짖음 소리가 끝나기도 전인데 마수가 도망친 쪽에서 크르릉! 맹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잠시 후 흰 표범과 회색곰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늑대를 닮은 마수는 곰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놈은?”
표범은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의 형체를 물고 있었는데, 모래 위에 그것을 툭 떨어뜨리더니 은룡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껍질뿐입니다. 마수를 타고 탈출한 것은 눈속임일 뿐 그때 이미 육신을 버린 것 같습니다.”
은룡이 몸을 털더니 은빛 머리의 청년으로 변신했다.
표범이 말을 하고 용이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으로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중 한 인간은 제 옷자락을 찢어서 펼쳐 놓고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찍어 미친 듯 글을 갈겨쓰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엘리미네온이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의 육신을 살펴보고 있는데 마계의 문 쪽에서 쿠콰콰쾅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문의 개방에 힘을 쏟고 있던 마르첼로가 도망쳤기 때문에 힘을 잃었는지, 빙룡이 쏟아내는 거센 눈 회오리바람을 견디지 못한 마계의 문이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틈에 끼어 있던 촉수와 마수들의 신체 일부가 끊어진 채 문 앞에서 꿈틀거렸다.
“계속 불어라. 봉인해야 한다.”
문이 닫히는 걸 본 제이든이 잠시 피리에서 입을 떼자 빙룡이 말했고 제이든이 다시 최후의 인장을 불었다.
피리 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그에 따라 거칠게 꿈틀거리던 마계의 문이 점점 힘을 잃었다.
얼마나 더 불어야 하지? 현기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전심전력으로 최후의 인장을 불고 있던 제이든이었지만, 일단 문이 닫힌 것을 보고 나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인장을 계속해서 분다는 것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마계의 문 앞에서 꿈틀거리는 촉수나 빠져나온 채 돌아가지 못한 마수들을 은룡과 에우카, 카티야가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이든은 계속 피리를 불었다. 현기증이 심해지면서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이제 됐다.”
빙룡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이든이 그의 어깨 위에서 푹 쓰러졌다.
-제이든!
“포잇!”
아실리와 포이가 양쪽에서 제이든을 부축했다.
빙룡이 거대한 앞발을 내밀더니 닫혀 있는 마계의 문에 도장을 찍듯 앞발을 쾅 찍었다.
문이 부르르 떨었고 용이 발을 떼자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문이 그 빛을 잃고 거무스름하게 죽어가기 시작하더니 차차 모래 벽으로 변했다.
그리고 문이 사라졌다.
상처투성이의 마법사들이 환성을 올린 후 빙룡을 향해 절을 하며 감사를 표하자 빙룡이 입에서 흰 안개를 그들 위로 내뿜었다.
촉촉한 안개에 휩싸인 마법사들의 몸과 정신이 한결 안정적으로 회복되자 빙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는 이 아이, 제이든 로스에게.”
기절한 제이든의 몸을 사람들의 앞에 부드럽게 내려놓은 빙룡이 거대한 머리를 정중하게 그의 몸 앞에 숙였다.
은룡과 카티야, 에우카가 그 뒤를 따라 제이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 * *
“로스 감정사님, 로스 감정사님, 정신이 드십니까?”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에 제이든은 눈을 떴다.
흰 천장과 벽, 포근한 침대, 오랜만에 푹 자고 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습관적으로 옆구리를 더듬자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털북숭이 몸 두 개가 잡혔다.
아실리도 포이도 무사하구나.
“로스 감정사님,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감동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붙이는 남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군데 이렇게 친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