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1화
46. 최후의 인장(13)
창날 같은 발톱이 달린 앞발 위에 조심조심 기어 올라가자 빙룡이 앞발을 왼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거기 앉아라, 비늘 뒤쪽으로.”
용의 어깨에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용은 발톱으로 그들이 앉은 주변의 비늘을 둥그렇게 들어 올려 주었다.
투명한 비늘이 그들 주변을 감싸고 일어서자 마치 얼음으로 만든 바람막이 울타리 안에 들어간 것처럼 안전하면서 시야도 확보되었다.
“자, 간다!”
빙룡이 몸을 일으키더니 호수 위쪽을 향해 승천하듯 몸을 틀었다.
* * *
한편 호수 위쪽에서는 에우카와 카티야, 검은 짐승과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이든이 호수로 뛰어들 때 에우카와 카티야가 온 힘을 다해 그 뒤를 쫓는 검은 짐승의 궤도를 틀었고 성난 마왕이 손에서 검은 구름 덩어리를 제이든에게 쏘아냈을 때.
검은 덩어리가 물에 뛰어드는 제이든의 등을 직격하는 순간 흰 표범이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퍼펑!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엄청난 물보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제이든의 등에 떨어지는 검은 덩어리를 대신 맞고 호수에 곤두박질쳤던 카티야가 한참 만에야 으르렁거리며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비껴 맞았는데도 등과 한쪽 옆구리가 시커멓게 타버린 카티야가 호수 밖으로 몸을 끌어냈다.
비틀거리면서 다시 검은 짐승을 향해 그을린 등털을 세운 채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더 이상 싸우기는 어려워 보였다.
“표범부터 해치운다!”
짐승의 머리 위에서 어둠의 형체가 소리쳤다.
에우카가 짐승의 옆구리를 물어뜯고 있었지만 짐승은 에우카를 몸에 매단 채 머리와 목을 들어 올리고 발톱을 쳐들며 입을 벌렸다.
카티야는 마지막 힘을 모아 짐승을 향해 도약할 자세를 취했으나 힘이 빠져서 앞다리가 툭 꺾였다.
‘제이든이 빙룡을 깨울 때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짐승의 붉은 아가리가 닥쳐드는 것을 보며 카티야가 눈을 감았다.
“키야아아악!”
짐승의 이빨이 몸을 물어뜯거나 갈고리 같은 발톱이 몸을 꿰뚫거나 아니면 불덩이가 쏟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짐승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카티야가 눈을 떴을 때 표범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은빛 몸체의 용이었다.
검은 짐승은 은룡에게 이미 일격을 당한 듯 기괴하게 꺾인 목으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다가 몸을 바로잡고 분노에 찬 괴성을 질렀다.
“엘리미네온 님, 늦으셨습니다.”
카티야가 한숨을 내뿜으며 말하자 은룡 엘리미네온이 그녀를 돌아보며 미안한 듯 웃었다.
“수면 중이었잖느냐. 제이든의 폭죽을 좀 늦게 보았다.”
“꼭 보지 않더라도 폭죽이 터졌을 때 이미 그와 인연이 있는 신수들이 그가 도움을 구하고 있음을 느꼈을 텐데요.”
“그래, 내 반응이 좀 늦었다. 용이 잠꾸러기라는 건 너도 알잖느냐. 수고했다. 카티야, 에우카도 이제 좀 쉬거라. 내가 맡으마.”
피투성이가 된 곰이 뒤로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검은 짐승의 머리 위에 있던 형체가 이를 부드득 갈며 신호했고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고 불덩이를 토해냈다.
엘리미네온이 코웃음을 치더니 마주 입을 벌렸다. 새하얀 기체가 쏟아져 나왔다.
불덩이와 흰 기체가 공중에서 격돌하자 증기가 솟구치면서 불덩이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은룡이 오만하게 말했다.
“어둠의 악룡이라고 말들 하지만 악룡은 무슨! 용을 흉내 내는 짐승일 뿐이다. 빙룡께서 현신하시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 네가 온 곳으로.”
엘리미네온의 말에 호응하듯 그의 뒤에서 호수의 물이 끓어오르듯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물보라가 비산하면서 얼음으로 만든 듯한 거대한 용이 호수를 뚫고 솟아올랐다.
빙룡이 하늘을 선회한 뒤 호수 위로 내려앉았다.
그 어깨 위에서 제이든이 황급히 카티야와 에우카가 무사한지 살폈다. 둘 다 부상이 심해 보였지만 다행히 생명의 위험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은룡 엘리미네온과 대치하고 있는 검은 짐승을 보았다. 상처 입은 검은 짐승은 기괴하게 목이 비틀린 채 으르렁거리며 버티고 있었다.
“아까는 왜 용을 닮았다고 생각했지? 같이 보니까 전혀 비슷하지 않네.”
제이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은 짐승만 보았을 때는 용을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용과 함께 보니 그 짐승은 결코 용이 아니었다.
크기는 거의 작은 용과 비슷할 정도로 컸지만 용이 가지고 있는 우아함도 신성함도 그 짐승에게는 없었다.
용을 보게 되면 누구나 경외감을 느끼는데 그 짐승에게는 공포와 혐오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은룡 엘리미네온보다 훨씬 더 큰 빙룡까지 호수를 뚫고 등장하자 검은 짐승과 그 위의 마인은 세가 불리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둠의 형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남긴 채 재빨리 갈라진 땅속으로 꿈틀거리며 사라졌다.
벌겋게 속을 드러낸 채 갈라져 있는 땅거죽을 본 빙룡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나의 아름다운 땅을 이렇게 만들다니.”
빙룡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우 내뿜자 안개처럼 부드러운 기체가 대지를 뒤덮었다.
촉촉한 안개로 뽀얗게 가려졌던 눈앞이 다시 밝아졌을 때 갈라졌던 땅의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흔적은 조금 남았으나, 검은 짐승과 신수들의 싸움 속에 패이고 뒤집혔던 땅이 거의 복구되었다.
시커멓게 타 버린 옆구리 상처를 핥고 있던 카티야가 머리를 들었다.
중상을 입었던 몸이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에우카 역시 여기저기 피투성이였는데 거의 다 회복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글라키에나 님.”
에우카와 카티야가 빙룡에게 감사를 표했고 빙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다. 엘리미네온도 오랜만이구나.”
“천 년 만이죠.”
은룡이 씩 웃으며 제이든에게 눈짓을 했다.
“정말로 글라키에나 님을 깨웠구나. 대단한 녀석이야.”
“이 아이가 최후의 인장을 불었다. 천 년 전 에트루리안과는 또 다르게 맑고 즐거운 소리를 내더구나.”
빙룡이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살피더니 멀리까지 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 가자, 레타논으로.”
크롸라라랑!
은룡이 목을 뽑으며 마주 화답했고 에우카와 카티야 역시 포효하며 일어섰다.
“꽉 잡아라!”
빙룡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하르의 빙벽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제이든은 용의 비늘을 붙잡은 채 숨을 죽였다.
부딪친다!
제이든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순간 용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까마득히 솟은 빙벽을 바로 앞에 둔 채 위로, 위로, 위로 오르던 끝에 마침내 눈앞이 활짝 트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다하르의 빙벽 위쪽 하늘까지 빙룡이 솟아오른 것이다.
카라라라라!
빙룡이 시원스럽게 포효했다.
하늘 가득 그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뒤에 따라오던 은룡이 복창하듯 울었다.
두 마리의 용이 날개를 쫙 편 채 레타논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투명한 비늘 보호막에 둘러싸인 제이든의 눈 아래로 하늘과 구름, 멀리까지 펼쳐진 다하르의 얼음 벌판이 지나갔다.
“장관이다, 정말!”
제이든이 감탄했고 아실리와 포이가 냥냥퐁퐁거리며 동조했다.
“포이 무섭지 않아?”
“포잇, 포잇!”
제이든의 무릎에 앉은 포이는 이처럼 까마득한 높이와 속도가 무섭지도 않은지 눈을 크게 뜬 채 비행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래쪽의 얼음 벌판에 에우카와 카티야가 질주하는 모습이 보이다가 점점 뒤쪽으로 사라졌다.
카라라라라!
빙룡이 하늘 끝까지 닿을 것처럼 날개에 점점 속도를 붙였다.
* * *
노인의 단검 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마법사들이 가까이 밀고 들어왔는지 싸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고, 등 뒤에서는 마계의 문이 살아 있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꿈틀거리는데 노인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양과 송아지, 신성한 금빛 사슴까지 가슴이 갈라진 채 그의 주변에 쓰러져 있었고 노인은 제단에 누운 세르지오의 가슴에 긴 상처를 내고 그 상처 안에 제물의 피를 부었다.
전투의 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마계의 문도 더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의 몸이 제단 위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서서히 눈을 뜬 세르지오가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기대와 불안에 가득한 눈으로 세르지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세르지오의 입이 열렸다.
“나를 불러온 것이 너인가?”
노인이 희열에 차서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성공했다. 성공한 거야!
“마르첼로 님, 아르카니오의 충실한 종이 마르첼로 님의 재림을 감축드립니다.”
세르지오의 몸을 입은 누군가의 영혼이 천천히 제 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길쭉하고 튼튼한 손가락을 살피고 손목과 팔, 다리를 살피고 가슴을 문질러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싱싱하고 좋은 그릇이구나. 위화감 없이 나의 혼을 받아들인 걸 보면 내 피가 이어진 자인가?”
“그렇습니다. 마르첼로 님의 직계 후손으로 단 한 명 남은 자입니다. 방계는 몇 명 더 찾을 수 있었으나 이 아이만큼 마나가 충분하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없었습니다.”
“좋구나. 그런데 왜 이리 시끄러운가?”
세르지오의 몸을 뒤집어쓴 마르첼로 아르카니오가 매서운 눈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았다.
“그 위선자들입니다. 그놈들도 대법을 방해하려고 총력을 다했습니다만 마르첼로 님의 충실한 종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막은 덕분에 늦기 전에 대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제 문만 여시면 됩니다.”
노인이 공손하게 옆으로 비켜섰고 제단에서 내려선 세르지오가 손을 내밀자 바닥에 있던 가면이 저절로 그의 손으로 끌려왔다.
이제 곧 열리겠다는 듯이 기대에 부풀어 으르렁거리며 들썩거리는 마계의 문을 힐끗 본 마르첼로가 마계의 문을 향해 서서 가면을 얼굴에 쓰려는 순간 동굴 쪽에서 노성이 들려왔다.
“세르지오!”
여기저기 찢겨서 너덜너덜해진 로브 아래 상처투성이가 된 니콜레타가 헐떡거리며 나타나 은창을 겨누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머리를 갸웃 기울이는 마르첼로를 본 니콜레타의 얼굴이 변했다.
“세르지오?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세르지오가 아니구나. 누구지?”
마르첼로가 옆에 비켜서서 시립한 노인을 흘끗 보자 노인이 얼른 대답했다.
“전 마탑주였던 니콜레타 아르카니오입니다. 위선자들의 수장이지요.”
그는 비뚤어진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지금 쓰고 계시는 몸의 마법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아아. 그렇군.”
마르첼로가 피식 웃었고 노인은 이번엔 니콜레타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경배하라. 이 땅의 모든 마법사들 중 가장 위대한 마법사, 역사상 그 이상의 존재가 없었던 대마법사 마르첼로 아르카니오 님의 재림이시니.”
노인의 목소리는 광기를 품은 채 점점 더 높아졌다.
“이제 마르첼로 님이 닫힌 문을 여시면 어둠의 권속들이 쏟아져 나와 모든 위선자와 쓸모없는 자들을 불태우고 진정한 마법사를 따르는 이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암흑의 마수에게 갈가리 찢기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아르카니오의 피를 이은 자임을 감안해 목숨을 남겨 주실지도 모르니.”
“헛소리 집어치워라!”
니콜레타가 은창을 휘둘렀고 흰 빛줄기가 노인을 향해 쏘아져 나갔으나 마르첼로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빛줄기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몸이군.”
마르첼로가 금방 휘두른 손을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