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0화
46. 최후의 인장(12)
제이든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폭죽, 보고 오신 거죠?”
표범의 모습인 카티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에우카와 내가 막을 테니 너는 호수로 가라.”
에우카도 카티야도 제이든이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엄청난 크기였다.
신수가 본체를 다 드러내면 저렇게 큰가 보다.
“이쪽으로, 빨리 일어나! 이쪽으로 와!”
제이든이 겨우 몸을 추슬러 일으키자 벌새처럼 붕붕거리는 요정이 눈앞을 맴돌며 그를 재촉했다.
땅이 갈라지고 검은 짐승이 올라올 때 요정들은 모두 흩어져 숲속으로 숨었지만 비비아나만은 숨지 않고 제이든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빨리 와, 빨리!”
시커먼 그을음을 덮어써서 굴뚝 속을 빠져나온 것처럼 새까매진 요정이 파다닥거리며 제이든을 인도했다.
“어디로 가느냐!”
검은 짐승 위의 형체가 노성을 발하며 제이든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짐승이 불덩이를 토하기 전에 곰과 표범이 양쪽에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크라라라라!”
곰의 앞발에 머리를 맞은 짐승이 고개를 홱 틀면서 거대한 구렁이처럼 입을 쩍 벌리고 에우카에게 달려들었다.
카티야가 은빛 창처럼 짐승의 머리 위에 있는 형체를 향해 뛰어 들었고 그 형체도 마주 손을 휘둘렀다.
그들이 격돌하면서 폭죽이 열 개쯤 한꺼번에 터지는 듯 불꽃이 튀었다.
검은 짐승이 에우카의 어깨를 물어뜯었고 에우카가 고통과 분노에 차서 땅이 흔들리도록 으르렁거렸다.
“그쪽 보지 말고!”
비비아나가 제이든의 눈앞에서 세차게 날개를 파닥거리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저쪽은 신수들에게 맡겨! 넌 빨리 호수로 들어가야 해!”
검은 짐승과 그 위의 마왕인지 마신인지 암흑에서 올라온 자의 기세가 상당한데 카티야와 에우카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제이든은 비비아나의 인도에 따라 호수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어딜!”
검은 짐승의 머리 위에 타고 있던 형체가 제이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에우카와 카티야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검은 짐승이 괴성을 지르며 제이든 쪽으로 향했다.
검은 짐승은 얼굴 전체가 입인 것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마치 유원지의 롤러코스터처럼 쏜살같이 꿈틀거리며 그를 향해 닥쳐들었다.
“빨리 가!”
카티야가 부르짖었고 곰과 표범이 필사적으로 그 몸뚱이에 달라붙었다.
검은 짐승의 옆구리가 에우카의 발톱에 걸려 길게 찢어지면서 시뻘건 속살이 드러났고 카티야에게 물린 목덜미에서도 피가 솟았다.
에우카의 어깨와 카티야의 옆구리도 피투성이였지만 곰과 표범은 악착같이 짐승의 몸에 달라붙었고, 어둠의 짐승은 두 마리의 신수를 몸에 매단 채 검은 연기를 내뿜는 열차처럼 제이든을 덮쳤다.
브레이크를 거는 자동차처럼 에우카와 카티야가 몸을 버티면서 괴수의 속도를 줄이려고 기를 쓰는 바람에 검은 짐승의 궤도가 틀어지자 그 머리 위에 탄 자가 제이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커먼 뭉게구름 같은 것이 제이든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풍덩!
아슬아슬한 순간에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안은 채 물에 뛰어들었다.
검은 구름 덩어리가 제이든의 등을 쫓아와 직격했고 어마어마한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쿨럭!
제이든이 물속에서 기침을 했다.
물에 뛰어들 때 등에 받은 충격 때문에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캑캑 숨을 쉬려고 하던 제이든이 몸부림을 멈췄다.
어라? 숨이 막히지 않네?
아 참, 그렇지. 요정이 준 씨앗 덕분에 물속에서도 숨쉬기가 편한 거지.
입에서 보글보글 물거품이 나왔지만 마치 아가미라도 생긴 것처럼 숨 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위쪽을 쳐다보니 푸른 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바깥의 거센 싸움이 거짓말인 것처럼 물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옆에서 누군가 톡 건드리기에 돌아보니 아실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지만 꼭 필요할 때라면 헤엄을 못 치는 동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잠수를 해본 적은 없을 텐데 아실리는 유연하게 네 다리를 뻗으며 헤엄치는 게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탐탁지는 않은지 미간을 찌푸린 채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고 있었지만.
제이든이 몸을 움직여 보니 마치 운디니움의 무중력 상태의 방에서 물을 내다보며 놀던 때와 비슷했다.
포이는? 포이는 어디 있지?
저만치 하얀 털북숭이 공 같은 것이 위아래로 동동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원래 빨간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아까 그 아수라장 속에서 벗겨졌는지 물에 뛰어들 때 벗겨졌는지 외투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포이 쪽으로 헤엄쳐 가서 동동 떨어져 내리는 포이를 양손으로 받아 안았다.
놀라서 잠깐 정신을 잃었던지 눈을 감고 있던 포이가 제이든이 얼굴을 만지자 눈을 떴다.
눈을 몇 번 깜빡인 포이가 뭐라고 입을 뻐끔거리자 동그란 물방울이 보글보글 나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제이든이 귀를 가리킨 뒤 아래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실리는 혼자 헤엄칠 수 있지만 포이는 안심이 되지 않아 한쪽 팔에 포이를 안은 채 아래쪽으로 헤엄쳐 내려가는데 포이가 제이든의 팔을 흔들었다.
짤막한 네 다리를 바동바동해 보이는 것이 혼자 헤엄칠 수 있다는 말 같았다.
시험 삼아 손을 놓아 보니 포이가 아래쪽으로 내려가려고 헤엄치는 시늉을 했지만 자꾸 동동 뜨는 것이 아래로 내려가는 게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한 바퀴 재주를 넘으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포이를 잡아서 배낭의 줄을 앞발에 쥐여 주었다.
제이든은 팔다리를 쭉 뻗고 미끄러지듯 푸른 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하얀 솜덩어리 같은 포이가 배낭을 꼭 잡은 채 딸려 내려갔고 아실리는 그 옆에서 우아하게 잠수했다.
분명히 물속인데 호흡도 편하고 몸이 젖지도 않는 게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에우카와 카티야는 괜찮을까? 용을 닮은 검은 짐승이 여간 강해 보이지 않던데. 짐승의 머리에 탄 마인도 그렇고.
제이든은 걱정으로 초조해하면서 최대한 빨리 물 아래쪽까지 내려가기 위해 힘껏 발장구를 쳤다.
얼마나 깊이 내려갔을까. 주위의 푸른 물이 검푸르게 어두워졌을 무렵 아래쪽에서 한 점 빛이 보였다.
저기다! 제이든은 더 힘껏 다리를 휘저었다.
둥그스름한 빛의 소용돌이가 점점 커졌다. 마침내 제이든의 손끝이 그 빛에 닿았을 때 빛의 소용돌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와 아실리, 포이를 빨아들였다.
통! 고무공이 튀듯이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제이든이 한두 번 가볍게 튀어 올랐다가 중심을 잡고 섰다.
“포잉!”
고요한 물속의 세상을 빠져나오자 소리가 돌아왔다.
제이든의 배낭을 잡고 따라왔던 포이가 바닥에 떨어져서 통 통 고무공처럼 두어 번 튀었다. 아실리가 그 옆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들이 내려선 공간은 물이 없었다. 깊은 호수 바닥일 텐데 어디서 공기가 들어오는지 몰라도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부드럽고 은은한 빛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이 헤엄쳐 온 호수의 물이 높은 천장처럼 위쪽에서 넘실거렸다.
-제이든. 저기.
아실리가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소리로 목 안에서 고르릉거렸다.
“그래. 저기 우리가 깨워야 할 그가 있어.”
호수의 밑바닥, 물이 없는 공간에 둥글게 몸을 말고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빛이 이 지하 공간을 비추는 광원이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용, 비늘 하나하나를 얼음으로 조각한 듯 투명하게 빛나는 용이었다.
-꼭 얼음으로 빚은 것 같네. 저런 용은 그림에서도 보지 못했는데.
아실리가 조그맣게 말했고 포이는 거대한 용에 압도된 듯 제이든의 다리를 붙잡고 머리만 내민 채 눈을 깜빡거렸다.
얼음덩어리처럼 보이는 저 용이야말로 천 년 전 에트루리안을 도와 마계의 문을 닫은 후 천 년의 잠에 든 빙룡 글라키에나였다.
제이든이 배낭에서 최후의 인장을 꺼냈다.
그는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는 용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한 뒤 최후의 인장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제 천 년의 잠을 깨울 피리를 불어야 한다.
가슴이 떨렸다. 과연 최후의 인장은 내가 자신을 불고 빙룡을 깨울 수 있게 허락해 줄까.
여기까지 겨우겨우 왔는데, 혹시라도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쩌지?
그동안 겪은 환각에서 최후의 인장을 불어 본 적은 없었다.
마지막 환각에서 여기까지 도달하기는 했지만 피리를 꺼낸 순간 환각에서 깨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과연 불 수 있을까.
제이든이 온 마음을 다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린 날숨이 최후의 인장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가늘게 춤추며 나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춤춘다. 그렇게 표현하는 게 가장 알맞을 것 같은 소리였다.
고요한 공간에서, 피리 소리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이, 오랫동안 갇혀 있던 곳에서 놓여나는 기쁨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즐겁게 춤추었다.
처음에는 느리게, 차차 조금씩 빨라지면서 피리 소리가 점점 더 흥겨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빙룡이 눈을 떴다.
조금 전 헤엄쳐 내려온 호수의 물처럼 검푸른 눈이 얼음에 덮인 얼굴 속에서 떠올랐다.
마치 겨우내 얼었던 호수가 초봄의 햇살에 녹아서 그 속을 드러내듯이.
빙룡이 검푸른 눈을 깜박이자 은빛 속눈썹에 맺혀 있던 고드름이 부서지면서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사람 몸뚱이만 한 눈동자가 제이든을 똑바로 보자 제이든은 그 눈 속에 빨려들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파사삭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빙룡의 길쭉한 코끝에서부터 얼어붙은 몸에 한 겹 물을 끼얹은 듯 서서히 생명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코끝이 움직이고, 수염이 흔들리고, 입이 살짝 움직이더니 얼굴과 머리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거대하지만 우아한 목과 어깨, 등, 옆구리와 배로 생명의 물결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긴 꼬리 끝까지 생명의 물이 돌자 글라키에나는 둥글게 말았던 몸을 펴고 스핑크스처럼 앞다리를 내밀고 엎드린 채 제이든 일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용이 머리를 살짝 기울이자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최후의 인장을 쓸 수 있는 자가 왔구나. 귀여운 친구들까지 데리고.”
용은 아실리와 포이를 보며 웃더니 제이든에게 말했다.
“글라키에나라 한다. 옛사람들은 나를 빙룡이라고 불렀지.”
“제이든 로스입니다.”
“약속의 아이로구나. 그리고 포에니, 흠, 고양이에게는 엘리미네온의 흔적이 보이는군. 다들 고생했다. 아! 너무 오랜만에 잠에서 깨었구나. 나를 깨운 건 마계의 문을 열려는 자가 있어서겠지? 아니, 잠깐만 기다려라.”
호수 위에서 싸우고 있는 에우카와 카티야가 걱정된 제이든이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들자 빙룡이 그의 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제이든은 마음이 조급했지만 침착하게 빙룡이 다시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눈을 뜬 빙룡이 제이든에게 미소했다. 너무 거대한 얼굴이라 확실히 보기 어려워도 분명히 미소를 머금은 듯했다.
“그 아이들은 괜찮다. 조력자가 왔구나. 레타논 쪽이 좀 아슬아슬하다만 그쪽도 잘 버티고 있으니 나와 함께 가보도록 하자. 잠시 저쪽으로 비켜 있거라.”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를 저만치 비켜서게 한 빙룡은 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네 다리를 쭉 뻗고 꼬리까지 길게 펴고 기지개를 켠 빙룡이 몸을 화르르 떨자 온몸에서 얼음 가루가 물방울처럼 공중으로 피어오르더니 하얗게 반짝이며 기화되어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크기 차이가 있지만, 동작 자체는 아실리가 비를 맞았을 때 몸을 터는 것과 아주 유사했다.
“자, 이리 올라오렴.”
빙룡이 트럭만 한 앞발 한쪽을 그들 앞에 턱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