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9화
46. 최후의 인장(11)
눈이 밝은 빛에 익으면서 제이든은 눈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앞에 펼쳐진 풍경은 인외비경이라는 말 그대로 이 세상 같지 않은 풍경이었다.
둥그스름한 공터 주위로 가지마다 하얀 눈꽃을 매달고 선 흰 자작나무와 은사시나무가 뺑 둘러 숲을 이루고 있고 숲의 앞쪽으로는 키가 작은 겨울 관목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눈밭인 줄 알았던 공터의 땅은 눈이 아니라 이름 모르는 흰 풀이 양탄자처럼 곱게 돋아나 있는 풀밭이었다.
그리고 흰 풀밭 건너편으로 수정처럼 맑은 호수가 햇살을 받으며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작은 새들이라도 있는지 관목 덤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더니 뭔가 작은 물체 십여 개가 포로롱 날아올랐다.
제이든의 눈앞으로 포로롱 날아오는 물체를 본 아실리가 귀를 쫑긋 세우면서 야오옹 울었다.
-페어리잖아? 꼬마 요정.
손가락만 한 요정들이 벌새처럼 붕붕 날개를 치며 제이든의 얼굴 앞을 맴돌았다.
-사람이다!
-인간이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조그만 방울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들이 붕붕 날개 소리와 함께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부산스러웠다.
손가락만 한 요정들 중 그나마 조금 큰 요정 하나가 뒤늦게 날아오더니 다른 요정들을 뒤쪽으로 물렸다.
-세이렌의 말을 듣고 왔어. 좀 물러나!
-왜? 뭐래? 우리도 들을래.
-우리도 알려줘. 이 사람 누구야?
-좀 뒤로 물러나라니까!
큰 요정이 쨍쨍거리며 다른 요정들을 조금 뒤로 쫓더니 제이든의 얼굴 앞에서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다하르의 빙벽을 최초로 통과하고 신성한 땅에 발을 들인 인간이여!”
한껏 엄숙한 어조였지만 크기가 손가락만 한 데다가 7, 8세 정도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심하게 앙증맞을 뿐 그다지 위엄은 없었다.
하지만 제이든은 공손하게 요정 앞에 머리를 숙인 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이지?”
제이든이 대답했다.
“열려서는 안 되는 문이 열리기 전에 위대한 분의 잠을 깨우고자 합니다.”
붕붕 날갯짓 소리가 마치 벌떼처럼 요란해졌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요정들이 저마다 얼굴을 내밀었다.
-문이 열린다고?
-설마, 정말?
-안 돼, 세상이 다시 지옥이 될 거야!
-어쩌지? 어쩌지? 마왕이 숲을 불태우고 호수를 봉인하면?
붕붕 파다닥거리는 요정들 틈에서 큰 요정이 그나마 침착하게 다른 요정들을 진정시켰다.
“네가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다하르의 빙벽 뒤쪽까지 온 것을 보면 인간 이상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어.”
요정은 제이든의 어깨에 앉은 포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행운의 포에니의 힘을 입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지.”
작은 요정은 아실리를 내려다보았다.
“또 다른 위대한 분의 흔적이 남은 고양이, 좋은 조력자들을 데리고 있구나.”
요정은 제이든을 바라보면서 턱을 쳐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위대한 분께 안내할 수는 없어. 네가 위대한 분을 깨우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해. 나의 이름과 최후의 인장.”
“알고 있습니다.”
제이든이 배낭에서 최후의 인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최후의 인장이다!
-최후의 인장!
-정말로 인간이 최후의 인장을 가져왔어!
최후의 인장을 본 요정이 눈을 빛냈다.
“그럼, 혹시 내 이름도?”
“호수의 요정, 비비아나 르 트리토니스께 호수의 개방을 부탁드립니다.”
작은 요정, 비비아나는 꽃송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웃었다.
“내 이름을 아는구나. 어떻게 알지?”
요정은 얼른 날개를 파닥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어떻게 알든지 그건 너의 능력이지.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관목 덤불로 포르르 날아갔다가 금방 포르르 돌아왔다.
“자, 이걸 먹어.”
요정의 손바닥에는 꽃씨처럼 보이는 씨앗 세 알이 놓여 있었다.
“이걸 먹으면 호수 밑바닥까지 젖지 않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지 않고 내려갈 수 있어.”
제이든은 씨앗을 받으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다. 어려운 건 다 끝났어.
이 씨앗을 먹고 호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그곳에 잠든 자를 깨우면 된다.
“실리랑 포이는 여기서 기다릴래? 호수 아래까지 내려가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해.”
아실리와 포이는 둘 다 물을 엄청 싫어하는데, 굳이 호수 밑바닥까지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지.
지난번 마지막 환각 때는 같이 갔었지만 나중에 보니 굳이 함께 갈 필요가 없었어.
-그래, 고양이랑 토끼는 우리랑 놀자.
-포에니 토끼는 정말 오랜만이야. 델로스 산의 친구들은 잘 지낼까?
요정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포이와 아실리의 주변을 꽃잎처럼 날아다녔다.
아실리가 제이든의 손을 가리켰다.
-그거 먹으면 우리도 호수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응.”
-그럼 나도 갈래. 포이는 여기서 요정들이랑 기다리라고 하자.
“피잇!”
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도도도 달려온 포이가 아실리와 제이든 사이에 답삭 끼어들어서 양쪽을 꼭 붙잡았다.
“포이도 같이 갈 거야?”
“포잉, 포잉.”
귀가 깃발처럼 팔락거리도록 머리를 끄덕이는 포이를 보며 제이든은 마음이 약해졌다.
“물속에 들어가는 거라 싫을 텐데…….”
안전하게 요정들과 기다리고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걸 보니 그냥 같이 가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이전의 마지막 환각에서, 그는 여기까지 왔었고 호수에도 함께 들어갔었다.
그때는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아실리와 포이를 떼어놓지 않았는데, 정작 마지막 관문인 호수 안에서는 아무 일 없이 그들이 목표했던 ‘천 년의 약속을 지킬 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깨우기 직전에 환각에서 깨어나 버린 것은, 그를 깨우는 일은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에게도 씨앗을 먹이고 요정들의 배웅을 받으며 호수로 향했다.
그때, 설원처럼 하얀 풀밭을 밟으며 호수의 가장자리로 내려가는 그의 발 앞에서 우르릉 땅이 울렸다.
땅울림이 점점 심해지더니 풀밭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억 소리가 나면서 땅이 점점 더 깊이 갈라졌다.
“물러서!”
제이든이 아실리와 포이를 감싸 안으며 뒤쪽으로 재빨리 물러섰고 땅이 갈지자로 빠르게 쪼개지면서 그를 쫓아오듯 입을 벌렸다.
“지난번 환각에선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제이든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요정들이 벌떼처럼 비명을 지르며 숲 쪽으로 도망쳤다.
갈라진 땅 안쪽에서 음산하고 불쾌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제이든과 호수 사이를 가로막았다.
시커먼 연기가 솟아올라 눈앞이 혼탁해지는 사이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땅속에서 떠오르듯 그들 앞에 나타났다.
“자칫하면 늦을 뻔했군.”
쇠를 긁는 듯 거칠고 탁한 음성이 울리면서 거무스름한 형체가 입을 열었다.
“네놈 때문에 대업을 망칠 뻔했구나.”
거무스름한 형체의 아래에서 시커먼 짐승이 무시무시한 이빨이 돋아나 있는 붉은 아가리를 벌렸다.
펑 소리와 함께 불덩이가 제이든의 앞으로 날아왔고 제이든은 그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안고 있던 아실리와 포이를 멀리 던졌다.
* * *
“겨우 늦지 않은 것 같군.”
노인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헐떡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검붉은 터번과 눈이 막힌 가면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족제비를 닮은 사내가 그를 부축했다.
“그래, 그 애송이 감정사 놈이 화근이 될 줄 알면서도 미리 처치를 못 한 게 이렇게 발목을 잡는구나.”
노인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놈이 설마 그……, 그의 잠을 깨우러 갔을 줄이야. 가면의 힘으로 그놈의 행보를 읽지 못했다면 이 오랜 세월의 노고가 모두 허탕이 될 뻔했어.”
노인은 겨우 몸을 추슬러서 제단 앞에 앉았다.
제단 위에는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 있었고 아래쪽에는 제물로 준비된 동물들이 묶여 있었다.
“마법사들은 어디까지 왔지?”
“우리 쪽 마법사들이 잘 막고 있기는 하지만,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피해가 제법 큰데도 물러서지 않더라고요.”
족제비 사내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불도마뱀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킬리마나 데포도 그들을 붙잡아 놓지 못해서……, 아마 두 시간쯤이면 여기까지 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흥, 두 시간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 위선자들, 저들도 암중에서는 부와 권력, 힘을 얻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하면서 마법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한다는 게 우습지 않나. 이번에 그 위선자들을 모두 지옥불 속에 던져넣고 말 것이다.”
그가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올 마수들이 황궁을 부수고 마탑을 불태울 것이야. 인간들은 우리에게 복종하는 자들만 살아남을 것이고 마르첼로의 이름을 이은 진짜 마법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카이엔의 이름은 사라지고 마법왕국 아르카니오의 이름이 다시 한번 대륙을 차지할 것이야.”
그는 누워 있는 세르지오의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감정사 놈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 몸에 대마법사 마르첼로 님이 현신하셨을 텐데, 마왕을 그놈에게 보내느라고 힘을 너무 많이 썼다. 좀 쉬어야겠어.”
“마왕이요?”
족제비 사내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노인을 쳐다보자 노인이 주름진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왜, 마왕이 없을 것 같으냐? 저 문 안에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마왕이 있지. 천 년 전 에트루리안이 7년의 전쟁 끝에 용의 힘을 얻어 문을 닫은 이후 절치부심하고 있던 악룡의 마왕이.”
* * *
-제이든, 정신 차려, 제이든!
깜빡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제이든이 눈을 떴다. 온몸이 쑤시고 쓰라린 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시커멓게 패인 구덩이가 치직치직 불티를 뿜으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갈라진 땅 틈에서 솟아오른 시커먼 짐승의 형태가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용?”
용의 형체를 닮은 검은 비늘의 짐승이 머리를 들어 올렸고 그 머리 위에 역시 비늘에 뒤덮인 인간의 형체가 서서 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력도 없고 신력도 없군. 너처럼 약한 존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그 형체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비껴 맞기는 했지만, 연약한 날파리 같은 녀석이 마룡의 불덩이에 즉사하지 않았다니. 신기하군그래.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볼까?”
그는 제이든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관람하겠다는 듯이 짐승의 머리 위에 걸터앉았다.
제이든은 억지로 숨을 들이켰다. 목과 가슴이 타버린 것처럼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매달려 있는 아실리와 포이를 제 등 뒤로 잡아당기려고 더듬거렸다.
다행히 아실리와 포이는 무사한 것 같았지만 마치 뇌가 타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지쳤을 뿐이었다.
징글징글하다 정말.
지독한 환각에서 살아 나와서 이번에야말로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번에도 환각이 아닐까?
아니, 이번엔 환각이 아니야. 제이든은 머리를 저었다.
이번엔 정말 실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네.
제이든은 가슴 속을 파고드는 아실리의 따뜻한 몸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실리, 미안해, 나 너무 지쳤어. 나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못 해. 너와 포이를 두고 가게 돼서 미안해.
그때 아실리가 뭔가를 제이든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입안에서 박하가 터지는 듯 화한 향기가 터졌다.
이 향기는, 언제 맡아 봤더라?
이거, 그 열매, 티아룬 호수 가운데 있는 카티야의 섬에서 그녀에게 받았던 별을 닮은 열매의 향기.
안주머니에 넣어 놓은 채 잊고 있었는데 아실리가 그 열매를 찾아서 제이든의 입에 밀어 넣은 거였다.
열매를 꿀꺽 삼키자 타는 듯하던 목이 시원한 물을 삼킨 것처럼 편안해졌다.
눈이 맑아지면서 호흡이 돌아왔다.
제이든은 비틀거리며 아실리와 포이를 끌어안고 뒤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숨이 끊어지지 않았나? 어떻게 일어난 거지?”
검은 형체는 놀란 듯 벌떡 일어나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뭐, 한 번에 죽지 않았다면 다시 죽여 주마. 두 번은 피하지 못하겠지.”
그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고 짐승의 입이 또 벌어지는 것을 보며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꼭 끌어안았다.
이젠 정말 피할 수 없다.
또 한 번 펑! 소리가 터졌으나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을 뿐 몸에 충격이 없었다.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회색 벽이 보였다.
아니, 벽이 아니고 누군가의 몸이었다.
거대한 은회색 곰이 제이든의 앞을 막아선 채 뒷발로 일어서서 검은 짐승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다.
곰과 나란히 서서 등을 잔뜩 낮춘 흰 표범이 제이든을 살짝 돌아보았다.
금빛 테두리를 두른 보랏빛 눈동자가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