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8화
46. 최후의 인장(10)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겨우겨우 얼음 마수들이 쫙 깔린 통로를 빠져나온 제이든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얼음 동굴 속인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촉촉이 맺혀 있을 만큼 긴장했던 것이다.
“잠깐만 쉬자.”
한 발 한 발을 신중하게 떼느라 시간도 많이 걸리고 온몸이 뻐근했다.
“실리, 포이, 모두 수고 많았어.”
아실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배낭 위에 앉아 있던 포이는 제이든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앞발로 눈을 비볐다.
혹시 제이든의 배낭이 얼음 마수들에게 스치기라도 할까 봐 눈을 크게 뜬 채 계속 집중하고 있었던 게 나름 힘들었던 모양이다.
“눈 아파? 포이?”
“피이잉.”
제이든이 머리를 쓸어주자 포이가 앞발로 비벼서 빨개진 눈을 쳐들며 어리광을 부렸다.
“자, 물 조금 마시고 당 떨어진 것도 조금 채우고 가자.”
배낭에서 건초와 과자, 닭가슴살 등을 꺼내 요기를 하고 잠시 쉰 뒤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숨 자고 몸을 좀 회복해서 가면 좋겠지만 레타논에서 마계의 문을 사이에 둔 채 싸우고 있을 마법사들을 생각하면 시간 여유가 없었다.
다음 통로로 가기 전에 정신을 집중해야 해서 제이든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빙글빙글 몇 번 문질렀다.
“자, 실리, 이번엔 네가 도와줘야 해.”
-? 뭔지 모르지만 말만 해.
아실리는 야무지게 대답한 뒤 제이든을 따라 일어섰다.
얼음 마수가 사라진 통로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사박사박 제이든이 바닥 밟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렸고, 아실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다.
“발 시리지 않아, 실리? 좀 안아 줄까?”
제이든이 물었지만 아실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앞길에 집중해, 제이든.
“예, 예.”
오랜만에 스승님 모드로 돌아간 아실리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제이든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통로 끝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오팔처럼 오묘한 빛을 뿜고 있는 얼음 문은 반투명한 유리처럼 건너편을 어슴푸레 투영시키고 있었다.
문 주변을 타고 하얗게 얼어붙은 식물의 덩굴이 감겨 있는 모습이 마치 장인이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듯했다.
문을 감싸고 있는 얼음 덩굴은 투명한 수정과 옥 등으로 조각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는데 덩굴 사이에는 작은 새와 나비들까지 앉아 있어 마치 동화 속의 모습 같았다.
“정말 예쁘지? 그런데 이 나비와 새들도 아까 본 얼음 마수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자의 잠을 지키는 보초들이야.”
제이든이 문 가까이 가자 갑자기 덩굴이 잠에서 깨어난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비가 한 마리, 두 마리씩 날아오르고 작은 새도 지저귀며 날개를 파닥였다.
얼어붙어 있던 동화가 잠에서 깨어난 것같이 사랑스러운 풍경이었지만 제이든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비들을 살폈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투명한 나비들이 제이든의 얼굴과 허리 근처를 살랑거리며 날아다녔다.
나비 한 마리 한 마리를 집중해서 쏘아보던 제이든의 눈빛이 일순 빛났다.
“이거다!”
제이든의 손이 나비 한 마리를 잽싸게 덮쳤지만 나비는 어림없다는 듯 그의 손을 휙 피하면서 저만치 날아가 팔락거렸다.
날개에서 꽃가루 대신 별이 부서지는 가루처럼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실리, 저 나비 잡을 수 있겠어?”
제이든이 아실리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냐앙!”
아실리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잘 봐야 해. 금방 다른 나비들이랑 섞여 버리니까.”
제이든이 다시 나비들에게 집중했다. 그동안 익힌 감정 기술을 총동원해 나비를 지켜보던 제이든이 손짓했다.
“저 나비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양이가 휙 날아올랐고 나비들이 폭죽 터지듯 화르륵 비산했다.
아실리가 꼬리를 세운 채 캬르릉 울었고 앞발 아래에 얼음 나비 한 마리가 눌린 채 날개를 파닥거렸다.
“잘했어, 아실리! 나비치고는 터무니없이 빠르던데 맨손으로, 아니 맨발로 잡아채다니 역시 우리 실리야!”
제이든이 칭찬하며 아실리의 앞발 밑에서 얼음 나비를 빼내자 아실리가 차가워진 앞발을 핥으며 코를 한껏 쳐들었다.
-빨라 봐야 나비지. 나처럼 노련한 고양이가 나비 한 마리 못 잡을까.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존경의 눈으로 아실리를 쳐다보는 포이를 뒤로하고 제이든은 손에 쥔 얼음 나비를 조심스럽게 문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얼음 나비가 손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듯하더니 문에 감겨 있던 얼음 덩굴이 양쪽으로 스르르 벌어지면서 문이 열렸다.
“포잇!”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뜬 포이가 입까지 동그랗게 벌렸다.
문 안쪽의 공간은 문자 그대로 보물창고였다.
오래된 금화와 은화 무더기, 황금 술잔과 보석이 박힌 왕관, 다양한 색상의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 빛나는 갑옷, 촛대, 온갖 종류의 귀중한 유물과 보석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방이었다.
이쪽저쪽 한 무더기씩 쌓여 있는 보물은 제대로 분류나 진열이 되어 있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옛이야기 속의 보물창고 같았다.
-말로만 듣던 탐욕의 용 아바리타의 보물창고 같네.
아실리가 야옹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아바리타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용을 못 본 지가 수백 년 되었다고 하지만 카이엔에는 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용들은 대체로 진귀한 것과 반짝이는 것을 좋아해서 각자의 보물 창고를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용은 또한 위대한 자라는 호칭답게 고아한 생물이다. 아무것이나 수집하지 않고 특별히 귀한 것만을 수집해 잘 관리한다.
옛 전설의 용사들 중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 용의 눈에 든 사람에게 용이 창고를 개방해 선물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간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로시난트 왕궁의 국보였던 왕관이라든지 다하르의 방패, 카이엔의 망토 등이 용에게 하사받은 선물이라는 전설이 붙은 물건이었다.
그런데 어디에나 예외가 있듯이 용 중에도 예외가 있었다.
탐욕의 용 아바리타는 그 별명 그대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욕심이 많은 용이었다고 한다.
어떤 보물이든 레어 안에 끌어모으고 관리는커녕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않으면서 쌓아두기만 해서 동굴 안이 보물의 산을 이루었는데도 끝없이 욕심을 부렸다던가.
다른 용들이 그를 같은 용의 반열에 놓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용의 신성한 이름을 얻지 못하고 탐욕을 뜻하는 아바리타라는 별명만을 얻었다는 탐욕의 용.
지금 제이든 일행이 지나고 있는 공간은 마치 아바리타의 창고 같았다.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을 돌리지 못할 만큼 휘황찬란한 보물이 손만 내밀면 집을 수 있도록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보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발을 떼지 못할 정도로 귀한 보석들, 무기에 관심이 있는 무사라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 정도의 신병이기들, 예술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품들이 사방에서 아우라를 뿜었다.
-우리 제이든이 정말 대단해. 발 한 번 멈추지를 않네.
발을 재게 놀리며 보물산을 헤쳐 나가는 제이든의 뒤에서 아실리가 감탄을 섞어 골골거렸다.
“그러게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아실리가 깜짝 놀라 팔짝 뛰었다.
꼬리를 팡 부풀린 아실리의 앞에 하늘하늘한 옷을 걸친 미녀가 나타났다.
“이 보물들은 그냥 보물이 아닌데,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마력이 가미되어 있는데 한눈 한 번 안 팔고 직진하시다니,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꿀을 바른 듯 달콤한 음성이 제이든의 귀를 간질였다.
화려한 금발을 허리까지 풀어 내리고 금빛과 분홍빛이 섞인 오묘한 눈을 가진 여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청순한 얼굴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자가 반투명한 천을 옷 대신에 걸친 채 제이든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신 분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저는 세이렌입니다. 그대의 이름은?”
마력을 지닌 음성이 제이든의 귀에 스며들었다.
“포잇!”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던 포이가 뒷발을 탕 구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머, 귀여운 토끼 친구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여자가 놀란 듯 입을 가리는 동작이 말로 할 수 없이 고혹적이었다.
“춥지 않으신가요? 안쪽으로 더 가실 거라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길고 흰 손가락이 제이든의 손목에 부드럽게 감기면서 여자가 몸을 그에게 가까이했다. 마치 찰떡처럼 살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혼을 빨아들일 듯한 금빛 눈이 제이든의 눈을 응시하면서 붉고 도톰한 입술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눈에서 점점 더 기묘한 마력이 제이든의 눈을 향해 흘러들었다.
“포이잇!”
포이가 또 한 번 발을 구르면서 제이든의 귀를 잡아당겼다.
“걱정하지 마, 포이, 난 홀리지 않아.”
제이든이 한 손을 들어 포이의 몸을 토닥이면서 다른 손으로 여자를 뿌리쳤다.
“오?”
그에게 뿌리쳐진 여자가 눈에 이채를 띠더니 손으로 제이든의 몸을 쓸었다.
“그대, 괜찮습니까? 호흡이 어려워진다거나, 몸이 뜨거워진다거나, 어지럽거나 그렇지 않아요?”
제이든은 옆으로 몇 발 피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매혹술은 나에게 먹히지 않으니 비켜주세요.”
여자가 머리를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얼음벽에 부딪혀서 천상의 종소리 같은 메아리가 울렸다.
“오오, 인간 남자가, 그것도 마력이라곤 한 점도 없어 보이는 인간이 마력의 보물 창고를 통과한 데다가 눈과 귀의 매혹에 저항하다니, 신기한 인간이군요. 정말 신기해요.”
여자가 고양이처럼 눈꼬리를 올리면서 손가락으로 제이든의 턱을 가볍게 쓸었다.
“설마, 그대의 눈엔 제가 아름답지 않나요?”
매혹의 요정 세이렌, 환각 속에서 그녀가 남자의 혼백을 빨아내서 빈 껍데기로 만드는 모습을 미리 보지 못했다면 어쩌면 홀렸을 수도 있을 터였다.
제이든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밀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굉장히 아름다우십니다만, 당신이 환영이라는 걸 알 수 있어서요. 그리고 미녀에 대해서는 제가 면역이 좀 있답니다.”
제이든은 속으로 은빛 머리와 보랏빛 눈을 가진 미녀에게 감사했다. 그녀가 단련시켜 주지 않았다면 세이렌의 매혹에 저항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아, 이런, 자존심이 상하는데요. 대체 어떤 미녀가 그대의 눈을 이렇게 높여 놓았을까요?”
세이렌의 환영은 제이든에게서 떨어지더니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요. 젊은이, 그대는 물(物)과 색(色)의 미혹을 모두 통과했으니 인외(人外)의 비경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손짓을 하고 제이든의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제이든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모습은 점점 투명해졌다.
반 이상 투명해진 그녀가 얼음벽 한 곳의 앞에 서자 벽에 떠오르듯이 문이 하나 생겼다.
“자, 이제 나가요. 젊은이, 행운을 빕니다.”
투명해진 세이렌의 목소리마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옅어져 있었다.
문이 저절로 열리고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는 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