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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77화 (17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7화

46. 최후의 인장(9)

아실리의 말을 들은 제이든이 빙그레 웃으며 아실리의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쓸어주었다.

“세상에, 고마워라. 실리. 날 그렇게까지 인정해 주다니.”

아실리에게 세시온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제이든에게 아실리의 말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아실리와 포이를 무릎에 끌어안은 채 고양이와 토끼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에 턱을 올려놓고 속삭였다.

“사실은 실리, 나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야. 나 예지 환각을 한 번 겪고 깨어날 때마다 그냥 도망가고 싶었어.”

제이든은 천성적으로 감성이 풍부하고 감정이입이 잘 되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동하고 좋은 일을 보면 함께 기쁘지만, 안타까운 일이나 슬픈 일을 보면 심하게 공감해서 자신도 힘들 때가 많았다.

유물의 내력을 보기 시작했을 때도 한 번 환각을 보고 나면 그 사연에 몰입해서 감정적으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최후의 인장을 얻고 나서 본 예지 환각은 모두 실제 겪는 것과 같은 환각이었고 결과는 모두 비극이었다.

여섯 번의 환각 중 다섯 번을 죽었는데, 나중에는 환각이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예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초반 몇 번의 환각에서는, 자신의 죽음은 물론 지인들의 죽음을 보는 것은 실로 큰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회귀하는 사람들이 회차마다 금방 납득하고 잘 털고 일어나던데, 난 도저히 그렇게 안 되겠어. 환각이라는 걸 알아도 회복이 잘 안 돼. 매번 환각에서 깨어날 때마다 너무 힘들었어. 난 사실 소인배라서, 세상의 구원 같은 건 다른 사람이 해줬으면 좋겠고 난 그냥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고.”

아실리가 고개를 들고 제이든의 까슬까슬한 턱을 다정하게 핥았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다시 환각을 시도했잖아. 나 제이든이 정말 자랑스러워.

제이든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예언의 글에 보면 천 년의 약속을 지킬 자를 깨우지 못하면 약속의 아이도 깨지 못한다고 했잖아. 내가 온 원래 차원의 병원에서 잠들어 있는 내 몸이 깨어나지 못한다는 말인 것 같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쪽 세상을 구원해야 나도 저쪽 세상에서 다시 깨어나는 거겠지만……,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자꾸 자신을 채찍질해 다시 환각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사실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나한테 세상을 구원한다는 큰 목적은 그렇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아. 하지만 지인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건 차마 못 보겠고.”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의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몸을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환각 속이라는 걸 알아도 레노아나 피니어스, 니콜레타처럼 친분 있는 지인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제이든이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 부드럽고 따스한 몸이 품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던 일이었다.

제이든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거 알아? 아실리? 네가 아니었다면 난 세상의 구원 따위 내던져 버렸을지도 몰라. 널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만 알았다면 이 세상이야 어찌 되건 그냥 너와 포이를 데리고 차원을 넘어가 버렸을지도 몰라.’

제이든은 스스로 소인배라고 생각했다.

환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도 기나긴 여정 끝에 결국 죽음을 맞는 예지를 겪을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여섯 번의 환각 끝에 결국 실제로 다하르까지 온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실리와 포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어쩌면 두어 번 더 환각을 진행하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더 이상의 환각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 따뜻한 몸이 생기를 잃고 내 품속에서 그 숨이 멈추는 일을 절대 겪고 싶지 않아.’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껴안은 채 빙벽의 꼭대기에서 들어오는 빛이 공동의 벽을 쓰다듬는 것처럼 폭포로 가까이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천장에서 내려오던 몇 개의 빛줄기가 서서히 그들에게 가까워져 왔다.

“자, 실리, 가자!”

제이든은 포이를 품에 안고 폭포 옆으로 달려갔다.

“실리, 여기가 열리면 바로 뛰어 들어가는 거야.”

탐조등처럼 서서히 동굴 안을 지나가던 빛줄기가 얼음 폭포의 한 부분을 지나는 순간 폭포가 번쩍 빛났다.

일순 폭포의 아래쪽이 뻐끔 입을 벌리듯 벌어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이를 안은 제이든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아실리가 바로 그 뒤를 따랐고 둘이 안쪽으로 뛰어들자마자 빛줄기가 옆으로 지나가면서 폭포가 다시 닫혔다.

폭포의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제이든이 오르막길을 달려 올라가며 소리쳤다.

“실리, 이쪽으로 뛰어. 나랑 떨어지면 안 돼.”

수정처럼 반짝거리는 벽을 따라 제이든과 아실리가 달려 올라갔고 품에 안긴 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이든의 어깨 너머로 그들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래쪽에서 물이 솟아나서 넘실넘실 그들의 뒤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물에 따라잡히면 안 돼!”

발꿈치를 삼킬 듯 따라오는 물의 수위가 높아졌고 제이든이 휘청하다가 다시 몸을 바로잡았다.

-넘어지면 안 돼, 제이든!

아실리가 캬아옹 울었고 제이든은 대답할 틈도 없이 할딱거리며 오르막길을 달려 올라갔다.

오르막길 끝부분에 널찍한 얼음 바위가 보였다.

“뛰어올라, 아실리!”

제이든이 소리치며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미야옹!”

그보다 먼저 뛰어오른 아실리가 몸을 돌리며 제이든을 살폈다.

제이든이 포이를 내려놓고 무릎에 손을 짚은 채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살아 있는 푸른 구렁이처럼 넘실거리며 그들을 쫓아오던 물결은 바위 바로 아래까지 따라온 채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통로를 채운 채 아쉽다는 듯 찰랑거리는 물결을 보며 제이든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이든, 우리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와야 해?

물에 잠겨 버린 통로를 보며 아실 리가 머뭇거렸다.

설마 다른 길이 있겠지? 있을 거야.

겨우 숨을 고른 제이든이 허리를 펴면서 물 싫어하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나올 때는 이 길로 안 올 거야. 그런데…….”

그는 미안한 듯 아실리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물에 들어가야 할 일이 한 번 더 있긴 해.”

아실리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꼬리를 팡 부풀리면서 몸을 후르르 떨었다.

“자, 이제 정말 조심해야 해.”

제이든은 물이 차 있는 통로 반대쪽, 빙벽의 안쪽을 향했다.

그들이 서 있는 바위로부터 빙벽 안쪽으로 널찍한 통로가 펼쳐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얼음으로 된 조각상들이 보였다.

소의 머리를 한 괴물, 곰을 닮은 괴수, 오크와 오우거, 웨어울프, 말로만 들었던 트롤 등 온갖 괴수의 모습을 한 얼음상이 금방 덤벼들 것 같은 모습을 한 채 통로를 막고 있었다.

“지금부터 저 사이를 지나갈 거야. 절대 아무것도 건드리면 안 돼.”

“포잉?”

포이가 제이든의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건드리면 어떻게 되느냐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건드리면…….”

제이든은 앞에 펼쳐진 통로를 두리번거리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처럼 돼.”

조악하게 깎은 돌망치를 들고 있는 오우거의 발밑에 얼어붙은 채 쓰러진 사람의 형체가 둘 보였다.

“옛날에 이 빙벽 안에 막대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있었대. 보물을 찾는 원정대가 몇 번이나 꾸려졌다고 하는데, 대부분 이 빙벽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바깥만 돌다가 했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뛰어난 용사 몇 명은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나 봐.”

그들은 씁쓸한 얼굴로 오우거의 발아래 있는 시신을 보았다.

꽁꽁 얼어 있어서 부패하지 않은 시신은 어제 쓰러진 사람처럼 생생했다.

“옷차림으로 보면 이백여 년쯤 전 다하르의 기사들이 흔히 입었던 갑옷이야. 투구에 달린 장식을 보면 평기사는 아니고 신분이 꽤 높은 기사였을 것 같아. 저쪽에 쓰러진 사람은 마법사야. 아마 이 기사랑 같이 들어왔겠지.”

제이든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 쓰러진 걸 보니까 그들은 아마 이 얼음 마수들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몰랐을 것 같네.”

-이 얼음상을 건드리면 저 마수가 살아서 움직이나? 레타논의 곰 석상처럼?

아실리가 조그맣게 야옹거렸다.

“응, 내가 환각에서 봤을 때는 그랬어. 실리, 내가 앞장을 설 테니까 조심해서 따라와.”

-아니, 내가 앞에 갈게. 이런 복잡한 길을 빠져나가는 건 내가 더 나을 거야.

아실리가 제이든의 앞으로 나서자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포이를 등에 멘 배낭 위에 올려 앉혔다.

“실리, 꼬리 조심해. 포이는 배낭 잘 잡고.”

아실리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위로 바짝 세운 뒤 얼음 마수들 사이를 부드럽게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고양이답게 유연하게 마수들의 틈을 빠져나가는 아실리의 뒤를 제이든이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갔다.

“삐잇!”

제이든이 몸을 돌리거나 옆으로 틀 때 등에 멘 배낭이 얼음 마수상에 가까워질 것 같으면 포이가 즉시 경고음을 울렸고 제이든은 멈춰 섰다가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쳤다.

-저기 또 사람이 있네.

“이렇게 멀리까지 잘 들어왔는데 결국 마수를 건드렸나 봐. 싸운 흔적이 대단한데! 저런 괴수를 쓰러뜨린 걸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부서진 얼음 사이로 커다랗게 구덩이가 패여 있고 소의 머리를 한 마수가 얼어붙은 채 쓰러져 있었다.

마수를 쓰러뜨린 용사 또한 마수와 겹쳐진 채 시신이 되어 있었다.

“이 사람, 전에 아실리가 해준 옛이야기에 나오는 티키안 세크 같은데? 세렌토의 흑곰.”

마수와 용사의 시체 옆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던 제이든이 시체 옆에 떨어진 곰 머리 모양의 투구와 검은 곰 가죽 망토를 가리켰다.

-그러네. 백 년쯤 전에 모험을 떠난 후 사라졌다더니.

아실리가 조그맣게 냐우웅 울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두 자루 쌍도끼만 있으면 용도 때려잡을 거라던 용사가 여기서 죽었구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참.

“보물 욕심 때문이었는지 명예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미노타우로스와 맞장 뜰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있었구나.”

제이든은 마수와 동귀어진한 용사의 모습에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면서 그들 옆을 지나쳤다.

“자, 정말 조심해서 가자. 저런 괴물을 깨워 버리면 우린 그냥 끝이야.”

아실리와 제이든의 발걸음이 한결 더 신중해졌고 포이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뜬 채 제이든의 배낭이 어딘가에 스치지 않도록 감시했다.

* * *

같은 시간 레타논에서는 마법사들이 모래사막 아래에서 마계의 문으로 가는 길을 열려는 흑마법사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부상자는 뒤쪽으로 보내.”

“예!”

“그놈들은 또 벽 속으로 도망쳤나?”

“예. 꼬리를 잡으려면 계속 쫓아야 할 텐데 왜 여기서 멈추라고 하셨습니까?”

“불도마뱀을 기다리고 있어.”

“불도마뱀이요?”

더 이상 전진하지 말라는 명을 받은 마법사들이 모래 동굴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불도마뱀이 왔다.”

마법사 몇 명이 세 마리의 거대한 불도마뱀을 데리고 나타나자 테오도르가 니콜레타에게 달려갔다.

“불도마뱀을 앞으로 보냅니까?”

“그래, 앞쪽에 킬리마나 데포가 깔려 있다는 제보가 있으니까.”

“예에.”

테오도르가 머리를 갸웃했다.

“불도마뱀이 킬리마나 데포의 천적이기는 하지만, 앞에 킬리마나 데포가 많다는 건 어떻게 아십니까?”

“그걸 예지한 아이가 있거든.”

니콜레타가 앞선 전투로 모래와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쓸면서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우릴 위해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어. 테디, 그 아이가 오기 전에 문이 열리지 않도록 우리도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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