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6화
46. 최후의 인장(8)
겨울철도 아닌데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어우, 추워. 실리, 포이, 잠깐 옷 좀 입자.”
제이든은 포탈을 나서자마자 아실리와 포이에게 외투를 입히고 단추를 잠가 주었다.
전에 포니에게 선물 받은 빨간 털코트가 여기서 또 유용하게 쓰이네.
“안녕하세요. 감정사님.”
다하르의 포탈 출구에서 제이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이동 쪽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마법사였다.
“니콜레타 님 연락을 받고 하룬에서 바로 출발했습니다. 길이 어긋나지 않아 다행이에요.”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인상 좋은 마법사는 이미 적당한 자리에 마법진을 그려 놓고 제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쪽 빙벽까지 가신다고 했는데 거기는 공간이동 포탈이 없어서요.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제가 임시로 포탈을 열겠습니다.”
니콜레타의 공간 포탈은 다하르의 최북단 도시까지 제이든 일행을 데려다줄 수 있었지만 거기서부터 빙벽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고 설치된 포탈도 없었다.
그렇다고 썰매나 마차 등의 이동 수단을 쓰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이동 마법 전문 마법사를 수배해 놓았던 것이다.
“이 포탈은 일회용이고, 쓰임을 다하면 즉시 사라지니까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나가셔야 합니다.”
로브 위에 두툼한 털외투를 입은 마법사가 제이든 일행을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나저나 빙벽 쪽은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곳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고양이랑 토끼까지 있는데.”
“예. 나름대로 방비는 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웁니다. 다하르는 처음이시라면 날씨나 환경 모두 만만치 않을 텐데요. 거기가 생각보다 더 춥습니다. 혹시라도 여의치 않다면 빙벽을 다녀오실 동안만이라도 제가 맡아 드릴 수 있습니다.”
소심해 보이는 마법사는 동물을 좋아하는지 아실리와 포이를 보며 계속 마음이 쓰이는 얼굴이었다.
제이든은 슬그머니 웃었다. 저 마법사가 키우는 반려동물은 불도마뱀이다. 추위를 엄청나게 타는 동물인지라 보호자가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 것 같았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 애들은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게 꼭 필요한 아이들이기도 하고요.”
“포잇, 포잇!”
제이든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포이가 어깨에 힘을 주고 가슴을 펴면서 몸을 세웠다.
그런 포이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면서 아실리도 힘차게 야옹야옹 울었다.
-그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거야. 우릴 두고 갈 생각은 하지 마!
제이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실리와 포이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예지 환각 속에서 처음 빙벽에 갈 때는 제이든도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가도 될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이야 환각인 걸 알지만 정작 환각을 겪을 때는 실제 상황과 똑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세 번을 겪을 때까지도 환각인지 실제 상황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제이든이 확실하게 환각과 실제 상황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건 네 번째 환각에 이르러서였다.
세 번째 환각 때 처음 다하르에 왔을 때, 그는 빙벽에 가기 전에 아실리와 포이를 니콜레타에게 맡겼었다.
아실리와 포이는 격렬히 반대했지만 제이든도 완강했다.
다하르의 빙벽이 얼마나 춥고 험할지 모르는 데다, 첫 번째 예지 때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있는 채로 식인 식물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닥으로 떨어진 기억이 너무 강렬했다.
아실리와 포이를 안전한 곳에 맡기고, 죽더라도 혼자 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환각을 거치면서 제이든은 자신에게 아실리와 포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환각이든 실제 상황이든 절대 아실리와 포이를 떼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마법사는 제이든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순순히 포탈을 열 준비를 하면서도 쭈뼛쭈뼛 뭔가 망설이더니 또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제가 직접 이동은 여러 번 해 봤는데 다른 사람을 이동시키는 마법은 한 사람 이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끼와 고양이까지 있다고 해서, 혹시라도 잘못될까 두려워서 저보다 경험 많은 마법사를 추천했었는데, 제이든 감정사님이 저를 지명하셨다고 들어서 놀랐습니다.”
제이든은 불안해 보이는 마법사를 향해 싱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리오 클로버 마법사님이 무사히 저희를 빙벽 아래까지 보내주실 걸 믿습니다.”
마법사는 감동받은 얼굴이 되어 포탈을 열기 시작하는 손에도 더 힘이 들어갔다.
“초면에 절 그렇게 믿어주시다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야, 당신이 성공하는 걸 이미 겪어 봤거든.
제이든은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제이든은 맨 처음 레타논으로 바로 갔을 때를 포함해 이미 여섯 번이나 미래를 보았다.
가면의 주술을 쐬었던 때문인지 중요한 부분의 기억이 끊기는 현상이 한두 번씩 있었지만, 그래도 여섯 번의 예지 환각을 겪으면서 계속 올바른 방향으로 미래를 수정해 나갔다.
그는 빙벽에 갈 때 다른 이동 수단도 사용해 봤고, 리오 클로버보다 경험이 많다는 마법사의 공간이동 포탈도 사용해 봤다.
세 번째 예지 때 썼던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결과가 좋지 않았고, 네 번째 예지 때는 다른 마법사의 공간이동 포탈을 썼는데 그때는 포탈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열려 버리는 바람에 빙벽까지 가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예지 때 리오 클로버의 공간이동 포탈을 사용했는데 결과가 좋았기에 이번에 니콜레타를 만나자마자 리오 클로버를 준비시켜 달라고 지명했던 것이다.
“됐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녹색 안개가 일렁이는 포탈의 입구가 열렸고 제이든은 리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아실리와 포이를 안은 채 얼른 포탈로 들어섰다.
“무운을 빕니다!”
리오의 목소리가 안개 뒤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 * *
포탈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몇 초 지나지 않아 포탈이 사라지고 인적 없는 들판에 바람 소리만 스산하게 몰아쳤다.
리오 클로버의 공간이동 포탈은 정확한 위치에 열려서 제이든을 거대한 성벽 같은 얼음산 앞에 떨궈 놓았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는 다하르의 유명한 빙벽이었다.
이 빙벽 근처에는 추위와 척박한 토양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마차로 일주일은 가야 했다.
백 년을 살아온 아실리도 다하르의 빙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어붙은 들판 위에 까마득히 높이 솟은 빙벽의 표면에는 은색, 흰색, 짙고 옅은 푸른색의 가로 줄무늬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마치 신이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 놓은 것처럼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어때, 아실리? 발 시리지 않아? 안아 줄까? 포이는 배낭에 들어갈래?”
아실리와 포이는 둘 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포이는 원래 눈밭을 뛰어다니는 산토끼라지만 아실리는 고양이다.
추운 걸 질색하는 동물이지만 예전에 제이든과 함께 에우카의 힘을 받은 이후로 추위를 덜 느끼게 되어서인지 다하르의 빙벽 앞에서도 그리 힘들어하지 않는 듯했다.
“저쪽으로 갈 건데, 잠깐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제이든은 배낭을 열고 니콜레타에게 받아온 마법 폭죽을 꺼냈다.
마탑에서 제이든의 요청에 따라 긴급으로 특별히 제작해 준 폭죽이었다.
제이든이 가느다란 대나무 통에 든 폭죽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자 마치 별똥별처럼 꼬리를 끌면서 하늘 높이 올라간 폭죽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소리를 내며 터졌다.
“기술 좋네.”
카이에른의 축제 때 용이니 그리핀이니 정교한 모양으로 불꽃이 터지는 폭죽을 여러 가지 봤지만, 지금 제이든이 쏘아 올린 폭죽은 그에 비해 간단했지만 명확했다.
하늘에 번지며 모양을 이룬 불꽃은 단순화한 고양이와 토끼, 그리고 젊은 청년의 얼굴이었다.
-신호탄이야?
포이는 턱이 떨어져라 하늘을 쳐다보며 신기해했지만 아실리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응, 근데 잘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어. 최대한 오래 지속되게 만들어 달라고는 했는데.”
-아는 사람이 보면 누군지 금방 알아보겠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청년의 얼굴은 제이든을 닮아 있었고, 고양이와 토끼 형상이 같이 있으니 제이든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제이든과 연관시킬 만했다.
-이것도 환각 속에서 본 거야?
“아니야, 이건 이번에 새로 만들었어. 지난번 환각을 겪었을 때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제이든은 하늘 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마법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환각 속에선 모닥불로 연기를 올렸는데 효과가 부족해서 더 확실한 신호가 필요할 것 같았어.”
-누구 보라고 하는 건데?
“글쎄? 못 볼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말해 줄게.”
제이든은 희미하게 웃고는 배낭을 고쳐 멘 뒤 빙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빙벽에는 군데군데 얼음이 쪼개진 틈이 있었다.
그런 틈이 나올 때마다 신중하게 확인하던 제이든이 마침내 멈춰 섰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좁은 틈을 확인한 제이든은 몸을 모로 세워서 얼음벽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아실리도 그 뒤를 따랐다.
입구는 몹시 좁았지만 안쪽은 점점 넓어졌고 바람이 들지 않아 그런지 생각보다 춥지도 않았다.
“포이이!”
포이가 조그만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비집고 들어온 빙벽 내부의 공간은 마치 수정과 옥으로 벽을 쌓아 올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부터 몇 줄기의 빛이 공간 안쪽으로 은은하게 드리워졌고 빛이 닿는 벽은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군데군데 박혀 있는 이름 모를 마정석에서도 빛이 흘러나와서 빙벽 안의 공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갈림길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제이든은 망설이지 않고 길을 찾아 들어갔다.
한 시간쯤 걸어 들어갔을까?
-막다른 길인데, 제이든?
얼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폭포가 십여 미터 위쪽부터 바닥까지 얼음꽃을 이루고 있었다.
“이 길이 맞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자.”
제이든은 얼음 폭포 앞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더니 아실리와 포이를 무릎에 앉혔다.
“실리, 포이, 내가 미처 설명을 못 했는데, 너희들이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있을 거야. 없으면 더 좋겠지만 내 예지몽이랄까, 환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도와줘야 해.”
-말만 해.
“포잉!”
아실리가 믿음직하게 대답했고 포이도 눈을 반짝이며 다부지게 울었다.
제이든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고마워.”
아실리는 제이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왠지 제이든의 분위기가 변한 것이 안쓰러웠다.
제이든이 처음 카이엔에 왔을 때만 해도 소년티가 채 빠지지 않았었고, 원래 세상에서 나름대로 어려운 일도 겪었던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밝고 순수한 아이였다.
카이엔에서 잘 적응하고 감정사로 자존감까지 강해지면서 본래의 명랑한 성격도 잘 살아났었는데 이번에 여러 번 환각을 겪고 난 뒤 많이 가라앉았단 말이지.
아실리는 짠한 눈으로 제이든을 보다가 혼자 고롱고롱거리며 생각했다.
하긴 그렇게 힘든 환각을 여러 번 겪으면 정신적으로 붕괴할 수도 있고 되든 안 되든 그냥 냅다 원래 차원으로 도망칠 수도 있는데 우리 제이든을 봐.
자기 세상의 일도 아닌데 그 무시무시한 환각을 겪고 나서도 도망치기는커녕 끝까지 세상을 구원하려고 들잖아. 가슴도 따뜻하지만 정말 정신적으로 강한 친구야.
아실리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제이든의 손등을 핥자 제이든이 아실리를 내려다봤다.
“실리, 왜?”
아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앞발로 수염을 정돈한 후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제이든, 내가 그동안 오래오래 살면서 나의 세시온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고, 제이든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세시온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는데.
아실리는 코끝이 빨개진 채 앞발을 가슴에 살짝 올렸다.
-내가 사과할게. 스타일은 좀 다르지만 제이든도 세시온 못지않은 사람이야. 인간 중의 인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