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5화
46. 최후의 인장(7)
제이든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면서 기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내가 겪은 일은 꿈……, 환각이었구나.
-제이든, 얼굴이 파래, 일단 좀 앉아.
“포잉, 포잉!”
아실리와 포이가 양쪽에서 제이든을 잡아당겼다.
서재 한쪽에 마련된 안락의자에 몸을 내려놓자 고양이와 토끼가 얼른 뛰어 올라와 한 녀석은 무릎에, 다른 녀석은 어깨에 안착했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털북숭이 두 마리가 몸을 그에게 딱 붙이고 머리를 비비면서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있는 생명력을 다 그에게 밀어 넣고 싶다는 듯이 골골거리자 몸도 마음도 차차 따뜻해져 왔다.
허리에서 뭔가 스르르 움직였다.
레칸도르의 금척이 아직 몸에 감겨 있었다.
‘운명을 재는 자.’
이 금척이 왜 운명을 재는 자인가 했더니…….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안은 채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최후의 인장을 받침대에 놓고, 비밀 책장 전체가 화려한 빛에 감싸인 후 에트루리안의 서를 들여다봤을 때.
최후의 인장과 가릉빈가문 수막새의 이미지가 나란히 눈앞에 떠올라 왔었다.
마치 원래의 세상에서 게임을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제이든은 펼쳐진 책장 앞에 선 채 고민했었다.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 거지? 순서로 봤을 땐 최후의 인장을 선택해서 맡은 일을 끝낸 후 수막새를 이용해 집으로 가는 게 맞는 거겠지?
하지만, 네 개의 유물을 찾아서 열두 개의 유물을 완성한 걸로 내 일은 끝난 게 아닐까?
차원을 건널 수만 있다면 그냥 집에 돌아가도 되는 거 아닌가?
그냥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제이든의 마음이 수막새 쪽으로 기울자 아스토시엔 산, 숨겨진 계곡의 동굴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가 처음 카이엔에 떨어졌던 그 자리였다.
똑, 똑,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굴 속의 작은 샘.
수막새를 손에 든 제이든 자신의 환영이 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환영 속의 제이든이 손바닥을 살짝 그어 피를 내고 그 손으로 수막새를 덮자 수막새가 일렁거리면서 기왓장으로부터 부드러운 푸른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는 공중에서 뭉쳐지더니 작은 새의 모습을 이루었고, 처음에는 작은 파랑새 같던 모습이 점점 커지면서 거대한 새의 형태로 커지기 시작했다.
수막새에 새겨진 가릉빈가 새의 모습이 동굴 속에 나타났다.
형태를 갖춘 가릉빈가가 우아하게 날개를 펴자 제이든과 샘이 한꺼번에 날개 아래에 가려졌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가릉빈가의 모습이 다시 안개로 흩어지면서 서서히 사라진 후 동굴 속 샘 옆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내가 차원을 넘어 집으로 돌아간 건가?
제이든이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이 그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레타논의 가장 북쪽 끝자락, 마계의 게이트가 있던 자리.
모래벌판 아래 이리저리 뚫린 땅굴과 공동들이 파노라마처럼 제이든의 눈앞을 휙휙 지나가다가 한 자리에서 멈췄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린 채 모여 있었다.
가운데는 제단을 쌓아 놓았고 그 주위에 흰 양과 검은 염소, 붉은 늑대와 금빛 사슴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와 남자도 제단 아래에 한 명씩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높이 쌓은 제단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고, 그 앞에 익숙한 가면을 쓴 노인이 서 있었다.
제단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세르지오 아르카니오. 그가 제단에 누워 있었다.
그가 제물일 리는 없을 텐데?
노인의 등 뒤, 한눈에 보기에도 마기를 풀풀 흘리는 문이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문양이 가득 새겨진 거대한 문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의 줄기며 덩굴이 담장이처럼 달라붙어 있는데 문 안에서 계속 기괴한 소리가 났다.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문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어린 양의 목덜미를 잡은 노인이 단검을 들어 올렸고 제이든은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른 후 제이든이 눈을 떴을 때, 제단 위의 세르지오가 피를 뒤집어쓴 채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들 뒤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노인이 얼굴을 들었을 때 가면의 막힌 눈이 제이든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시야가 갑자기 새까맣게 변했다. TV의 화면이 갑자기 꺼져 버린 것처럼.
이게 다인가? 문이 열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나?
제이든이 답답해하고 있던 차에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제이든은 숨을 헉 들이마셨다. 어느새 쏟아져 나온 마수로 지옥이 펼쳐진 카이엔 대륙이 보였다.
마수에게 쫓기는 사람들, 처참한 모습의 시신들, 마수와 싸우는 사람들, 마법사들, 전사들…….
싸우는 사람들이 제이든의 눈앞을 휙휙 지나갔다.
마법사 무리 사이에서 은창을 휘두르고 있는 니콜레타, 지팡이에서 불꽃을 내뿜고 있는 테오도르, 그리고 마법은 어쨌는지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레노아 등이 보였다.
수도로 몰려든 마수들을 상대하는 기사들, 병사들, 민간인들을 피난시키고 있는 피니어스와 엘리노어…….
땅속에서 솟아 나와 레타논을 짓밟은 마수들 사이에서 포효하는 회색곰, 그리고 흰 표범도 언뜻 보인 것 같았다.
마계의 문과 가까운 탓에 피해가 큰 콜레디오바와 센디니온, 피투성이의 갑옷 차림으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키리안, 성문을 열고 사람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는 안젤리카.
지원을 위해 동부의 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는 아카디아 백작과 디안느.
인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눈앞을 계속 지나갔다.
* * *
“맞아,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정신을 못 차렸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제이든이 자세를 고치면서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 장면을 봤을 때, 그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을 때 카이엔의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노인과 세르지오가 마계의 문을 여는 의식을 치를 준비가 이미 끝났고 문이 열리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래서 정신없이 니콜레타 님에게 연락하고 레타논으로 달려가려고 한 거야.”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제이든은 허리에 감긴 레칸도르의 금척을 만져보았다.
“운명을 재는 자가, 내가 그렇게 행동했을 때 운명이,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 거였어.”
제이든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에트루리안의 서와 레칸도르의 금척이 내게 미래를 보여주었지만, 그 미래는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
그는 손을 펴고 비아트리스의 반지를 보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좋은지 반지가 알려주지 않으려나?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선택했을 때 카이엔이 어떻게 지옥이 되는지를 보여주면서도 반지가 그의 손가락을 찌르지 않는 걸 보면 반지는 이 선택에 개입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선택은 오로지 제이든에게 달린 모양이었다.
카이엔의 위기를 막는 걸 먼저 선택할 수 있지만, 그가 바로 레타논으로 달려가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실패하는 미래를 봤으니까.
“그렇지만 그 미래는 또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을 거야.”
마수가 쏟아져 나와 폐허가 되는 레타논과 에우카의 환각을 봤지만, 그게 확정된 미래는 아닐 터였다.
제이든은 이전에 다른 형태의 미래를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떠도는 섬에서 금척을 얻고 에우카와 헤어졌을 때, 제이든은 에우카와 레타논의 평화로운 미래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 미래를 향하는 길도 있는 거겠지.
제이든은 몸을 일으켜 다시 에트루리안의 서 앞으로 갔다.
아까는 내가 너무 당황했어. 그렇게 급하게 덤비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자.
제이든은 침착하게 책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책장이 그를 반기듯 빛을 뿜었고 문자가 공중으로 떠올라 왔다.
-수많은 낮과 밤이 흐른 후……
제이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턱대고 레타논으로 달려갈 일이 아니었어.
천 년의 약속을 지킬 자를 먼저 깨워야 하는데,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
용의 말을 담은 책이여. 내게 그 길을 보여주렴.
제이든은 그 이후 다섯 번의 환각을 더 보았다.
다섯 번의 환각 속에서 네 번의 죽음을 겪은 제이든은 기진맥진해서 서재의 의자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날이 뿌옇게 밝을 무렵에 잠에서 깨었다.
“실리, 포이, 일어나, 방으로 가자.”
제이든은 가슴 위에 엎드려 잠든 포이와 옆구리에서 잠든 아실리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그가 반복해서 환각을 겪는 동안 안절부절못하고 옆을 지키던 아실리와 포이도 어지간히 곤했는지 둘 다 제이든이 움직이는데도 깨지 않고 있었다.
아실리가 겨우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더니 얼른 제이든의 얼굴을 살폈다.
-좀 잤어, 제이든? 오늘도 책을 연구할 거야?
“아니, 이제 답을 찾은 것 같아.”
쓰러져 잠들 때만 해도 몸이 물먹은 솜처럼 피곤하고 머릿속은 반복되는 환각으로 혼란스러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다하르의 겨울 눈으로 씻어낸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우편국에 다녀올게. 포이랑 집에 있어.”
-니콜레타 님한테 연락하려고?
“응. 얼른 갔다 올게.”
* * *
아실리는 우편국에 다녀온 후 짐을 싸는 제이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날 저녁 내내 에트루리안의 서를 연구하면서 환각에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더니 하룻밤 만에 나이를 서너 살은 더 먹은 것처럼 무게감이 생겼다.
환각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한 번만 겪어도 진이 쭉 빠진다고 했는데 어젯밤엔 대체 몇 번을 겪은 거야.
혹시나 깨어나지 못할까 봐 옆에서 조바심을 내던 아실리가 그만하고 쉬었다 다음 날 하자고 몇 번이나 말렸는데도 제이든은 시간이 없다면서 듣지 않았다. 웬만하면 아실리의 말을 잘 들었는데.
걱정이 된 포이가 낑낑거리면서 제이든에게 매달렸는데도 제이든은 에트루리안의 서 앞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몸이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야, 어젯밤엔 정말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미련도 하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죽자고 반복하다니.’
아실리가 호오 한숨을 내쉬는데 제이든이 배낭을 조이고 어깨에 메었다.
“다 됐다. 실리, 가자.”
-어디로 가?
“일단 니콜레타 님이랑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니콜레타 님의 가게부터.”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공간이동 포탈을 탔다.
우편국에서 미리 긴급 연락을 보낸 덕분에 니콜레타의 골동품점에는 니콜레타 외에 올리비에 데스탕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아실리와 포이까지 떼어 놓고 골방에 들어가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온 세 사람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가 가능한 마법사와 전사들을 모아 레타논으로 먼저 가겠소.”
“그래, 나는 제이든부터 옮겨 주도록 하지. 제이든, 정말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겠니?”
“괜찮습니다. 니콜레타 님이 안 계시면 데스탕 님 혼자서는 땅의 입구를 열기 어려우실 거예요. 제가 부탁드린 일을 서둘러 주세요.”
“다하르에는 내가 연락을 해 놓으마. 부탁한다. 제이든.”
니콜레타가 안쓰러운 듯 제이든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 차원의 일도 아닌데 너무 고생이 많구나. 카이엔의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 미안하고 고맙다.”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니콜레타의 공간이동 포탈에 올랐다.
-제이든, 우리 어디로 가? 레타논?
“아니, 올리비에 데스탕 님이랑 니콜레타 님이 레타논으로 가실 거야. 우리는 일단 다하르로 가.”
공간이동 포탈이 은색과 보라색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포탈이 움직이기 전에 제이든이 아실리를 품에 안으며 고양이의 뾰족한 귀에 속삭였다.
“다하르의 얼음산, 그 빙벽 아래에 우리가 깨워야 할 존재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