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4화
46. 최후의 인장(6)
“하아악!”
고양이의 날카로운 하악질 소리가 울리면서 조셉이 제이든에게서 손을 뗐다.
아실리가 제이든의 앞을 가로막은 채 조셉을 향해 입술을 말아 올렸다.
“물러서요!”
공중에서 레노아가 떨어져 내리면서 제이든과 아실리의 앞을 막았다.
조셉이 침착하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양손을 펴서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제이든 씨와 아는 사람입니다. 해칠 의사는 없어요.”
그가 물러서다가 누군가에게 부딪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테오도르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제이든 씨, 아는 사람입니까?”
테오도르가 물었고 제이든이 등에서 배낭을 내려 안쪽을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예. 안면은 있습니다만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제이든이 배낭 입구에 얼굴을 대고 걱정스럽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포이, 괜찮아?”
“포잉.”
-내가 보고 올게.
안쪽에서 들려오는 포이의 목소리는 씩씩하게 들렸지만, 걱정이 되었는지 아실리가 배낭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갔다.
금방 다시 나온 아실리가 몸을 살짝 털면서 팔다리를 쭉 폈다.
-포이는 괜찮아.
그제야 안심하고 배낭을 다시 멘 제이든이 조셉 쪽으로 눈을 돌렸다.
조셉이 테오도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로스 감정사님, 저 기억하시죠? 왜 전에 카이에른에서…….”
“예. 기억합니다. 레옹 바레 씨의 비서이셨죠?”
“맞습니다. 알아봐 주시는군요.”
조셉이 싱긋 웃었고 제이든은 테오도르를 향해 말했다.
“전에 감정 일 맡았던 분의 비서입니다.”
그 말을 들은 테오도르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면서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옹 바레라면 그 가면을 갖고 있었던 무역상 아닙니까?”
“맞습니다.”
조셉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때 절도범이 들어 창고가 다 털렸는데 가면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지요. 로스 감정사님이 관심을 많이 보이셨던 물건인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 후 화재 사건까지 터져서 바레 씨가 입원하시는 바람에 저도 정신이 없었습니다.”
테오도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죠? 민간인은 여기 들어올 수도 없을 텐데요.”
조셉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대답했다.
“레옹 바레 씨의 경호 임무를 맡았던 팀장이 전직 용병이었습니다. 테나레 지드라고, 마나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검사였죠.”
“테나레 지드……, 사막의 외짝귀?”
용병의 이름에 반응한 것은 레노아 쪽이었고 조셉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젊은 여자 마법사님이 아실 만한 이름은 아닌데, 견식이 넓으시네요.”
그는 다시 테오도르 쪽을 향했다.
“아무튼, 전성기 때는 그런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유명한 용병인데, 나중에 손을 씻고 경호 임무로 돌아선 사람이에요. 화재 때도 그 양반 없었으면 바레 씨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마탑에 아는 사람이 있었는지 이번에 그 양반한테 연락이 왔더군요.”
그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저도 그 용병단에 잠깐 있었습니다.”
“당신이?”
제이든은 새삼스럽게 조셉을 훑어보았다. 호리호리한 몸이나 얼굴의 인상 어디로 봐도 비서가 딱 적격인 사람이었다. 용병단과는 전혀 연관될 일이 없는 것 같은 인상인데.
하기야 마법사 테오도르도 그냥 보기엔 후덕한 곰 인형 같은 사람인데 의외로 전투형 마법사라고 하니까.
“제 전투력은 보잘것없습니다. 행정 업무가 적성에 맞는 사람이고요. 그런데 쓸데없이 마나가 많단 말입니다. 테나레 씨가 따라오라고 강권하는 바람에 끌려왔지요.”
테오도르가 위쪽을 흘끗 쳐다보는 걸 따라 제이든도 위쪽을 쳐다보았다.
여긴 지하에서 또 한 층 더 아래 지하인가?
그들이 떨어진 곳에는 모래와 흙이 섞인 천장이 보일 뿐 구멍 같은 건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둥그스름한 공동인데 사방으로 통로가 예닐곱 개 나 있었다.
위쪽에서 느꼈던 폭발 직전과 같은 불안감이나 위태로운 분위기가 베어 내기라도 한 듯 사라진 채 그들은 고요한 공간에 따로 뚝 떨어져 있었다.
레노아의 지팡이 끝에서 나는 빛이 공동 안을 비추고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것이 왠지 더 스산했다.
제이든은 손으로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위쪽은 급박한 상황일 텐데, 우리만 이렇게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나.
레옹 바레의 사무실에서는 조용하기 그지없던 저 비서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인 것도 처음 알았네.
제이든은 불안한 눈으로 레노아와 테오도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레노아가 제이든의 눈길을 느꼈는지 돌아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테오도르는 조셉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언뜻 봐도 마나량이 상당해 보이기는 하는데, 잠깐 손목 좀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테오도르가 조셉에게 손을 내밀자 조셉은 잽싸게 몸을 피했다.
“아뇨, 아뇨. 이런 곳에서 뭘 믿고 마법사에게 손목을 내줍니까.”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저도 여기서 테나레 지드 말고는 못 믿습니다.”
“사막의 외짝귀라면 선발대에 포함되었을 테고, 조셉 씨는 여기서 뭘 하셨죠?”
조셉은 다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전투원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데 몸에 품은 마나만 필요 없이 넘치는 사람이 왜 불려왔겠습니까? 충전기 역할이죠.”
충전기? 제이든은 잠깐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테오도르나 레노아는 바로 이해한 듯했고 제이든도 잠시 후 깨달았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한 후 마나가 떨어졌을 때 마나를 응급 수혈하는 역할인 모양이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지나가는 말로 듣기는 했는데, 언뜻 보니 조셉은 그리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 테나레 지드와의 친분으로 같이 온 것 같은데.
“마나 보조 역할이면 이렇게 깊이 들어오진 않으실 텐데?”
테오도르가 고개를 기웃하자 조셉이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초입 쪽에만 있기로 했지만 어쩌다 보니 자꾸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어요. 마기 때문에 안쪽에서 마나 손상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아서. 그러다 여기 떨어졌는데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더라고.”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뭐, 마법사들이 그렇죠. 필요할 때 마나나 받아먹으려 들지.”
테오도르가 묘하게 이채를 띤 눈으로 조셉을 훑었고 제이든도 그를 다시 보았다.
저 사람은 전투력도 없다면서 여기가 전혀 무섭지 않나?
용병 경험이 있다지만 말을 들어서는 그때도 마나 공급책 역할이었던 것 같고 전투에 나선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직접 싸우지 않더라도 용병단의 싸움을 본 일이 많아서 침착한 건가.
그때 레노아가 갑자기 테오도르와 조셉의 등 뒤쪽을 가리켰다.
“누가 찾으러 오는 걸 기다릴 수 없어요.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요.”
테오도르와 조셉이 뒤를 돌아보더니 재빨리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모랫바닥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돋아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크기의 콩나물처럼 생긴 식물이 꿈틀거리며 머리를 모래 밖으로 내밀었다.
아까 테오도르가 말한 킬리마나 데포라는 마계의 식물이 흐늘거리며 뱀처럼 솟아 올라왔다.
식물의 줄기는 보고 있는 동안 순식간에 길어지고 굵어지면서 몸을 불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또 하나, 뒤쪽에서 또 하나…….
“저쪽으로 빨리 뛰어요.”
테오도르가 외쳤고 레노아가 제이든의 팔을 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따끔!
반지가 제이든의 손가락을 찔렀다.
“레노아 씨, 여기는 안 됩니다!”
제이든과 레노아는 이미 가장 가까운 통로에 발을 들여놓았었는데 제이든이 레노아를 끌면서 뒷걸음질 쳐 나와 옆 통로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이번엔 반지가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았고 제이든은 배낭 줄을 단단히 잡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아실리가 가장 앞에서 달리고 레노아와 제이든이 그 뒤를 따랐다.
뒤를 돌아보니 테오도르와 조셉이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뒤를 따르듯이 식물의 머리가 모래 속에서 차례로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마치 뱀 떼가 차례로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요!”
레노아가 그를 재촉했고 제이든도 그녀를 따랐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지만 통로는 구불구불 이어졌다.
어느새 제이든의 바로 옆까지 따라붙은 테오도르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펑 소리가 나면서 제이든의 발뒤꿈치 쪽에서 솟아오르던 킬리마나 데포가 불꽃에 휩싸였다.
마법사는 몸을 쓰는 건 잘 못하는 거 아니었어? 레노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테디 아저씨는 왜 이렇게 잘 달리는 거야.
입에서 단내가 나고 옆구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도저히 더 못 뛰겠는데.
그때 갑자기 통로가 뚝 끊어지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바로 앞에서 달려가던 아실리가 펄쩍 뛰었다.
“실리!”
제이든이 팔을 내뻗어 공중에 뜬 아실리를 낚아채 안았다.
굴처럼 뚫려 있던 통로가 뚝 꺾어지면서 급격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자칫 잘못하면 굴러떨어질 뻔했다.
겨우 몸의 균형을 잡은 제이든과 레노아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내리막 앞으로 작은 광장처럼 펼쳐진 공동.
수십 줄기의 킬리마나 데포가 마치 미역밭이라도 이룬 것처럼 흐늘거리며 공동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동안에도 계속 솟아 올라오고 있는 마계의 식물을 보며 제이든과 레노아가 동시에 몸을 떨었다.
“너무 많은데, 뚫고 나가기 어렵겠는데요.”
공동 건너편으로는 널찍하게 뻗은 길이 보였고 그쪽의 길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 보였다.
뒤쪽 통로에서 솟아오른 킬리마나 데포를 태워버리고 달려온 테오도르가 헐떡이며 아래쪽 공동을 내려다보았다.
“태우면서 돌파해야 하나.”
“위쪽으로는 어려울까요?”
테오도르와 레노아가 빠르게 의견을 나누다가 제이든을 향했다.
“가운데 쪽만 일직선으로 킬리마나 데포를 태울 겁니다. 금방 옆에서 줄기가 뻗어올 수 있지만 무시하고 불길을 따라 최대한 빨리 달려서 건너가세요.”
그는 맨 뒤에서 따라온 조셉을 돌아보았다.
“조셉 씨에겐 미안한데 솔직히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제이든 씨 옆에 붙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두 분을 함께 보호할 수 없으니 제이든 씨가 먼저 건너가고 레노아가 그 뒤를, 그리고 조셉 씨는 나중에 저랑 가시죠.”
조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실리, 여길 건너갈 때까지만 배낭에 들어가 있어.”
제이든은 아실리를 배낭에 넣은 뒤 테오도르의 신호를 기다렸다.
“자, 달려요.”
통로 끝부분에 선 테오도르의 지팡이에서 불꽃이 줄기를 이루며 킬리마나 데포 무더기 사이로 뻗어갔다.
치치치칙!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킬리마나 데포의 줄기가 오징어처럼 몸을 비틀었고 불길이 지나간 자리를 제이든과 레노아가 밟으며 달려갔다.
불꽃이 사그라들기 전에 그 자리를 뚫고 나가려니 다리가 화끈거렸다.
덜 탄 줄기들이 그들의 다리를 휘감으려 들었지만 레노아가 제이든의 뒤에 바짝 붙은 채 지팡이를 검처럼 휘두르며 줄기를 털어냈다.
공동의 절반 정도 거리를 달려왔는데 앞쪽의 킬리마나 데포들은 그새 더 커진 몸으로 다리를 감아왔고 테오도르의 불꽃이 점점 약해졌다.
“으헉!”
미처 타지 않은 줄기가 제이든의 다리를 휘감아서 제이든이 고꾸라졌다.
뒤에 따라붙었던 레노아가 재빨리 줄기를 뜯어내며 제이든을 일으켰으나 잠깐 지체한 동안 벌써 양쪽에서 킬리마나 데포의 줄기가 넘실거리며 그들을 덮치려 들었다.
“이쪽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 위쪽에서 누군가의 쨍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래 천장에 구멍이 열리고 있었다.
아까 위쪽에서 제이든의 앞을 인도하던 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밧줄 하나가 꿈틀거리며 내려왔고 제이든이 밧줄을 잡자마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끌어올렸다.
“아!”
식물의 줄기가 그의 다리를 감고 당기는 바람에 올라가다 말고 떨어질 뻔했다.
“어서 올라가요.”
레노아가 그의 다리에 감긴 줄기를 끊어내자 제이든의 몸이 다시 위로 향했다.
“레노아 씨!”
아래를 내려다본 제이든이 비명을 토했다.
어느새 레노아의 몸이 허리 위까지 킬리마나 데포의 줄기에 감겨 있었던 것이다.
“안 돼요. 빨리 밧줄을 잡아요!”
“어서 가요. 제이든 씨, 문을 꼭 닫아…….”
레노아가 말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킬리마나 데포의 붉은 줄기에 휘감기는 것을 보며 제이든이 비명을 질렀다.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면서 몸이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간다.
아래쪽에서 붉은 킬리마나 데포들이 마치 붉은 뱀처럼 입을 벌렸다.
* * *
“흐윽! 헉! 헉!”
제이든은 숨을 몰아쉬었다.
명치가 갑갑하고 옆구리가 타는 듯이 아팠다. 목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제이든, 괜찮아? 숨 쉬어, 제이든.
아실리가 그의 다리를 부둥켜안은 채 뒷발로 서서 걱정스럽게 야옹거렸다.
제이든은 다시 세시온의 서재에서, 환한 빛에 감싸인 에트루리안의 서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