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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73화 (173/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3화

46. 최후의 인장(5)

앞서가던 마법사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사람에게 몸을 굽히고 뭔가 말을 듣고 있었다.

제이든 일행이 다가가자 마법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자들입니다. 벽에서 튀어나와 공격했다네요. 이분은 북부에서 참전하신 용병이시고.”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있던 용병이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앞 팀이 이미 확인하고 지나간 길이라 방심했어. 시온이랑 합작해서 셋은 해치웠는데, 젠장! 한 놈이 도망갔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놓쳤지 뭐야.”

그는 가죽 갑옷을 입고 다리 옆에 대검을 놓은 채 한쪽 다리를 이상한 각도로 뻗고 앉아 있었다.

“앞에 전사들이랑 마법사들이 길을 트면서 가고 있지만 그래도 이놈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하면서 가라고.”

용병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 섞인 침을 퉤 뱉고는 말했다.

“거, 이렇게 말하긴 기분 나쁘지만 이놈들 실력이 나쁘지 않았어.”

제이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두어 걸음 옆에 무장을 한 채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목에서 어깨까지 쩍 벌어진 검상이 나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검붉은 색으로 모랫바닥에 스며드는 중이었다.

옆에 쓰러진 사람은 옷차림으로 보아 마법사 같은데 눈에 띄는 외상은 없지만 역시 시신으로 보였다.

눈길을 피하려고 하는데 자꾸 뭔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쪽으로 신경이 집중되었다. 목으로 자꾸 마른침이 넘어갔다. 머리가 핑 돈다.

제이든이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시체, 그것도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사람이 죽는 걸 본 것은 ‘붉은 손의 단검’ 때 환각 속에서 왕자들의 죽음을 봤을 때가 처음이었다.

실제로 본 게 아니라 환각이었는데도 그 이후 며칠이나 힘들었는데, 이번엔 직접 시신을 보다니.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앞으로도 더 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머리가 쭈뼛 섰다.

“한 놈을 놓쳤다고요? 어디로 갔어요?”

테오도르가 물었고 다리를 다친 용병이 벽 쪽을 가리켰다.

“마법사였는데 벽으로 들어갔어. 모래무지가 모래에 숨어들어 가는 것처럼 쑥 들어가더라니까. 시온이 쫓아가긴 했는데.”

“시온 소니크 말입니까?”

“응, 같은 마법사니까 알겠네?”

테오도르는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는 벽 쪽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다치신 곳 치료는?”

“힐링을 받긴 했는데 마기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회복이 잘 안 되네. 응급처치만 한 거라, 나중에 밖에 나가서 제대로 치료해야지.”

부상당한 검사는 허벅지 아래쪽부터 무릎 밑까지 붕대 비슷한 기다란 천을 칭칭 감아 꽉 동여매 놓은 상태였는데, 피에 전 것은 물론 다리를 뻗은 모양새가 무릎 관절이 작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레노아가 그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았다.

하얀 빛이 그녀의 손으로부터 퍼져 나와 남자의 다리 전체를 감쌌다.

잠시 후 그녀가 손을 떼자 검사는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고마워. 아가씨, 치유사인가? 통증이 훨씬 덜한데.”

“아니, 치유사는 아닙니다. 제가 훈련한 건 복원 마법이에요.”

“복원 마법? 그림이나 조각상 같은 데 쓰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문관국 마법유물부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더군요.”

레노아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유물과는 달라서 생명체는 상처를 입은 지 서너 시간만 지나도 제 능력으로는 복원할 수 없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거든요.”

언젠가 세렌토에서 오스틴과 돌을 던져 나무에 꽂는 연습을 했을 때 레노아가 나무에 꽂힌 돌을 뽑고 나서 그 자리를 쓰다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제이든도 그때 나무에 난 상처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걸 보고 레노아가 뭔가 치유 마법 같은 걸 쓴 줄 알았는데 복원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 중 신관이 있을 겁니다. 신관에게 성력을 받으면 훨씬 나을 거예요.”

“어쨌든 치유 마법이건 복원 마법이건 한결 상태가 좋아진 거 같아 고마워. 자, 난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 기다릴 테니 댁들은 빨리 앞으로 가봐. 앞 팀과 간격이 벌어지면 또 중간에 누가 나타날지도 몰라.”

용병이 자세를 좀 더 편하게 고치면서 제이든 일행을 밀어내듯 앞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뒤쪽에서도 모래를 밟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의 뒤쪽을 지키며 따라오는 사람들이 가까이 온 것 같았다.

테오도르가 제이든을 살짝 앞쪽으로 밀었고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앞으로 걸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몇 구의 시체와 부상자를 더 보았다.

유황 냄새가 점점 더 강해졌다. 제이든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기침을 했다.

붉은 머리의 여자 궁사가 쓰러져 있는 모습도 보았다. 이미 생명을 잃은 것 같았다.

제이든의 걸음걸이가 흐트러지고 호흡이 빨라졌다.

그간 꾸준히 체력 단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제이든은 근본적으로 예전 세계에서나 카이엔에서나 그림이나 그리고 유물 공부나 하던 책상물림이었다.

시신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에 익숙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쩌자고 여길 왔을까. 내가 여길 꼭 왔어야만 했을까?

그냥 수막새를 챙겨서 동굴에 갔으면 집으로 조용히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유황 냄새에 섞여 피 냄새까지 나는 듯해서 제이든이 숨을 헐떡거렸다.

“제이든 씨.”

레노아가 그의 등에 손을 댔다.

그녀의 손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힘들겠지만 정신 차리세요.”

“……예.”

제이든이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쉰 뒤에 대답했다.

등 뒤에 닿은 레노아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보면 레노아도 이런 상황에 익숙한 건 아닐 텐데.

제이든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어깨를 곧게 편 뒤 발을 떼었다.

뭔가 타는 냄새가 강하게 났다.

앞서가던 마법사가 지팡이 끝에 불을 일으켜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말고 잠시 기다리세요”

마법사의 말을 들은 테오도르가 레노아와 제이든을 멈춰 서게 하고 자신만 앞으로 갔다.

석순 옆에 흐늘거리는 식물의 줄기 같은 것이 보였는데 마법사가 그걸 태우고 있었다.

그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테오도르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앞에 있는 마법사와 제이든 일행 사이에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연락이 올 때까지 여기서 잠시 기다리죠.”

주위를 두리번거린 테오도르가 사람 무릎 높이 정도로 솟아오른 모래 덩어리를 가리키며 제이든에게 말했다.

“잠깐 앉을까요? 힘드시죠?”

두툼하게 쌓인 모래 덩어리는 보기에는 모래 같았지만 앉았을 때의 느낌은 단단하게 뭉친 돌덩어리 같았다.

제이든이 앉자 아실리가 무릎 위에 올라와서 머리를 제이든의 배에 비볐다.

아실리의 따뜻한 몸을 끌어안고 고릉고릉 목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정신없이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킬리마나 데포인가요?”

레노아가 물었고 테오도르가 끄덕였다.

“킬리……, 그게 뭔가요?”

제이든이 묻자 테오도르가 반투명한 막 건너편에서 마법사가 태우던 식물을 가리켰다.

“저거요. 마기를 먹고 자라는 식물인데, 지금은 막 싹이 튼 것 같지만 좀 더 커지면 지나가는 생명체를 휘감아 잡아먹습니다.”

“옛날 레타논에는 킬리마나 데포가 지천이어서 에트루리안이 마계의 문을 닫기 전에는 마수만큼이나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해요.”

“마계의 문이 닫힌 후 마기를 공급받지 못하면서 차차 멸종되었다지만 그전에는 피해가 컸다고 하지요. 번식 속도도 워낙 빠르고 생명력도 강하고.”

테오도르는 자신도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올리비에 데스탕 님과 같이 간 사람들이 저걸 못 봤을 리는 없고, 지금 눈에 띈 걸 보면 이제 막 땅 밖으로 올라오는 중일 겁니다. 이쪽으로 덩굴을 뻗을까 봐 보호막을 쳤으니 잠시 기다리셨다가 안전 확보가 되면 다시 출발하죠.”

석순 옆의 킬리 뭐시기인가 하는 식물을 다 태웠는지 마법사와 전사가 앞쪽으로 이동해 모퉁이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반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어렴풋이 보였다.

제이든이 끌어안고 있던 아실리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실리, 여기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배낭 안에 들어가서 포이랑 같이 있을래?”

-아니, 밖에 있을래. 포이는 괜찮을 거야. 내가 밖에서 제이든 지켜야지.

테오도르가 로브 안쪽 어딘가에서 작은 병을 꺼내더니 제이든에게 내밀었다.

“한 모금 드시면 좀 나을 겁니다.”

박카스 병 크기의 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더니 속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좀 풀어졌다.

“원래는 마나 안정을 위해 마법사들이 쓰는 보조제인데, 제이든 씨가 마나가 없기는 하지만 마기를 쏘인 증상에도 좀 도움이 될 겁니다. 신체가 나른해지기 때문에 많이 마시면 안 되고요.”

병을 돌려준 제이든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대륙전쟁이 끝난 지 삼백 년이 지났으니, 카이엔에도 이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없을 텐데요. 테오도르 씨나 레노아 씨는 무척 침착하시네요.”

‘시신을 봐도’라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테오도르는 이해한 것 같았다.

그가 잠시 후 말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시신을 본 게 처음은 아닙니다. 카이엔 내륙 지방의 치안은 매우 좋은 편이지만, 변두리 지역의 경우는 또 다르거든요. 산적이나 해적, 도적단 등이 끊기지 않고 있어서 지엽적인 싸움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북부 산악 지방은 예전부터 마수가 많았고, 마수가 마지막까지 남았던 곳이기도 하지요. 산적도 많아서 그들 상대로 고용된 용병도 많았고요. 저도 젊었을 때 북부의 용병들과 함께 일한 기간이 꽤 됩니다. 그래서 시신이라든지 전투가 낯설지는 않습니다.”

“산적 상대로 싸우신 건가요?”

“아니요.”

테오도르는 드물게 미소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때 제 상대는 흑마법사였습니다. 산간 마을의 어린애들을 흑마법의 제물로 썼던 극악한 자였지요. 그놈의 논리도 지금 마르첼리언이라는 자들의 논리와 똑같았습니다. 위대한 마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쓸모없는 인간을 좀 희생시키면 어떠냐고 당당했지요.”

테오도르는 투명한 보호막 건너편을 주시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놈을 처치하는 데 꽤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그놈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 지금 마르첼리언의 선봉에 서서 활개를 치고 있었을 겁니다.”

테오도르의 매서운 표정을 보며 제이든이 어깨를 움츠렸다.

저 아저씨가 저렇게 날카로운 표정도 짓는구나. 포동포동하고 순둥순둥해서 곰 인형 같기만 하더니.

제이든이 레노아를 슬쩍 보자 뒤쪽을 바라보고 있던 레노아가 말했다.

“제가 원래 무술가가 되고 싶었다는 말은 들으셨지요? 저는 리카노스 섬 출신이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쪽 바다에 해적이 자주 출몰하곤 했어요. 제 할아버지도 해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으셨고요. 지금은 해적 소탕이 다 끝나서 리카노스 섬이 안전하지만.”

그러니까 레노아도 시신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라는 말이네.

머리를 끄덕인 제이든이 잠시 몸을 펴고 스트레칭이라도 하려고 아실리를 옆에 내려놓고 일어선 순간이었다.

예고도 없이 발밑이 푹 꺼졌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 제이든의 몸이 어딘가에 내팽개쳐졌다.

떨어질 때 본능적으로 몸을 뒤집었다. 등으로 떨어지면 혹시라도 배낭 속의 포이가 다칠까 봐.

앞으로 몸을 돌리면서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쳤는지 한동안 정신이 몽롱했다.

“제이든 로스 감정사님.”

누군가 그를 불렀다.

제이든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자 눈앞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뿔테안경에 얇은 입술, 수수하고 단정한 인상.

“조셉 씨?”

카이에른의 무역상 레옹 바레의 뒤를 따르던 비서 조셉이 제이든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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