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2화
46. 최후의 인장(4)
모래가 갈라진 사이로 거대한 짐승이 입을 벌린 듯한 구멍이 드러났다.
선두의 마법사 몇 명이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고 잠시 후 신호를 받은 사람들이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이든 씨는 좀 기다리세요. 안전이 확보된 뒤에 들어가야 하니까.”
제이든은 막사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중간의 기억이 끊겼기 때문인지 제이든에겐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뜬금없고 급작스러웠다.
“그러니까, 그 흑마법사 노인과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마계의 문을 다시 열려고 하고,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제이든이 묻자 그의 옆에 서 있던 레노아가 대답했다.
“네, 옛 대마법사 마르첼로 아르카니오를 숭배하고 그의 뜻을 이으려 하는 집단이라는군요.”
“어떤 끔찍한 수단과 방법을 쓰든지 가리지 않고 마법의 힘과 효과만 높이면 된다는 집단인데, 마르첼로 아르카니오가 예전에 대륙의 공적으로 몰렸던 것에 굉장한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신도에 가깝지요.”
“지하에서 암약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제이든 씨 덕분에 꼬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때 납치당하셨을 때.”
레노아와 테오도르가 번갈아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던 제이든이 말했다.
“아니, 그런데 그놈들이 흑마법사를 숭상하는 광신도라는 건 알겠는데, 마계의 문은 왜 열려고 하는 건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미친놈들이지요!”
테오도르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동글동글한 뺨에 순둥순둥한 곰처럼 생긴 마법사가 화를 내는 얼굴이 왠지 현실감이 없었지만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계속 추적해서 몇 놈 잡아들였는데, 그놈들 말로는 계속 연구해온 흑마법이 마기를 얻으면 뭐 폭발적으로 힘이 늘어난다나요? 게다가 마계의 문을 열면 대마법사 마르첼로가 재림해서 그들을 영광의 자리에 올려놓을 거라고 그러더군요.”
“마계의 문을 열고 마수가 쏟아져 나오면 이 세상이 지옥이 될 텐데, 다 같이 공멸하고 싶은 건지.”
레노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하늘을 보았다.
“자기들을 마르첼리언이라 부릅니다. 원래는 마르첼로의 뜻을 잇는 자들이라고 더 긴 명칭이 있다는데, 간단히 부르면 마르첼리언인가 봐요. 이념과 합리화를 위해서는 안 시켜도 줄줄 말을 잘 늘어놓는데, 언제 무슨 일을 벌일 건지에 대해선 하나같이 입을 꽉 다물고 있어서 늦기 전에 이 장소를 알아내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네요. 어떻게 알아내셨는지.”
제이든이 감탄하자 레노아가 이상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저는 니콜레타 님께 들었지만, 니콜레타 님 말로는 제이든 씨가 알려주셨다던데요?”
“제가요?”
제이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 날짜와 장소도 제이든 씨가 지정하고, 먼저 서두르셨다던데…….”
이것도 기억이 사라진 동안에 일어난 일인가. 대체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날짜를 맞춰 보니 사흘 정도의 기억이 통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그동안 정말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내가 이 장소를 알려 줬다고?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온통 모래뿐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혹시 여기가 떠도는 섬 유적지 근처일까요?”
지난번에 에우카를 만났던 떠도는 섬과 가까운 곳일까 싶어 물었더니 레노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떠도는 섬과는 거의 레타논의 끝과 끝이라고 할 만큼 떨어져 있어요.”
“그렇군요…….”
제이든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고 테오도르가 제이든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기억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막사 밖에서 사람이 들어왔다.
“제이든 씨, 이제 출발하시면 되겠습니다.”
제이든이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잠시만요.”
제이든은 포이를 어깨에서 내려 등에 메고 있던 배낭에 넣었다.
“포이,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여기 들어가 있자.”
불안한 듯 제이든의 어깨에 꼭 붙어 있던 포이가 까만 귀를 까딱거리면서 배낭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잠깐만.
아실리가 야웅 울더니 포이를 따라 배낭 안으로 폴짝 뛰어들어갔다.
“괜찮아? 불편하진 않아?”
“포잇!”
포이의 씩씩한 울음소리가 배낭 안에서 들려왔고 아실리의 냐아옹 소리가 따라왔다.
-제이든, 배낭 좀 흔들어 봐.
제이든이 배낭을 들고 몇 번 흔들다가 내려놓자 아실리가 사뿐 뛰어나왔다.
-응, 괜찮겠어. 생각보다 쾌적해. 별로 흔들리지도 않고. 포이가 좋아하는 옷 있어서 그거 줬어.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안전하게 넣을 수 있다고 니콜레타가 말했던 것처럼 배낭 안쪽이 그런대로 괜찮은 모양이다.
포이가 자리를 잘 잡을 수 있도록 아실리가 봐주고 나온 듯해 제이든도 안심이 되었다.
“고양이는 배낭에 넣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테오도르가 물었고 아실리가 먼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예. 아실리는 괜찮습니다. 제 앞가림은 할 거예요.”
제이든이 대답하자 테오도르가 알았다는 듯 일어섰다.
구멍 입구에 도착하자 올리비에 데스탕은 보이지 않았고 니콜레타가 서 있었다.
“올리비에는 안으로 들어갔단다. 나는 여기서 이 입구를 유지해야 하니까 같이 들어갈 수 없어.”
니콜레타가 손자를 보듯 제이든의 얼굴을 향해 안타까우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네가 약속의 아이라는 걸 믿는다. 잘 부탁해. 제이든.”
“하지만 제가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기억하지 못할 뿐 네가 알고 있을 거야. 내게 먼저 연락한 것도 너인걸.”
니콜레타는 주름진 손가락으로 제이든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 번 어루만졌다.
“네 세상의 일도 아닌 걸 떠맡게 해서 미안하구나. 우리 모두 무사히 문을 봉인할 수 있기를!”
구멍의 입구에 선 채 제이든은 예전에 에트루리안의 서에서 읽었던 글을 생각했다.
-수많은 낮과 밤이 흐른 후, 어둠의 씨앗을 품은 자들이 닫힌 문을 다시 열고 카이엔을 혼돈 속에 빠뜨리려 할 때, 약속의 아이가 나타날 것이다.
닫힌 문이 다시 열리기 전에 천 년의 약속을 지킬 자를 깨우리니, 만약 깨우지 못한다면 그 역시 영원히 깨지 못하리라.
내가 정말 그 예언서에 나오는 약속의 아이일까? 그렇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하지만 천 년의 약속을 지킬 자는 누구지?
눈앞에 음산하게 입을 벌린 구멍을 바라보는 동안 테오도르가 제이든의 한쪽 팔을 잡았고 레노아가 다른 쪽 팔을 잡았다.
아실리는 사뿐 뛰어올라 제이든의 배낭 위에 안착했다.
“자, 이제 내려가실까요?”
검게 입을 벌린 구멍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유황 냄새처럼 불쾌한 냄새가 음산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마치 저승을 향해 뚫린 입구 같았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번지점프를 앞두었을 때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방망이질하면서 두 발이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꾸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자, 뜁니다!”
양쪽에서 제이든의 팔을 잡은 레노아와 테오도르가 뛰어내렸고 제이든도 그 사이에서 저절로 뛰어내렸다.
으아아악 비명이 나오는 것을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던 몸이 차차 속도를 줄이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아마 양쪽의 마법사들 중 누군가가 부유 마법을 쓴 거겠지.
그러고 보니 레노아는 공격형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랬는데, 나와 여러 번 같이 일을 하다 보니 날 도와주러 온 건가.
떨어져 내려가는 동안 제이든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마침내 털썩 소리와 함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휘청거리는 제이든의 몸을 양쪽의 마법사들이 넘어지지 않게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제이든이 침을 삼키면서 대답했고 아실리가 배낭 위에서 사뿐 뛰어내려 가볍게 몸을 털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앞쪽에서 마법사 하나가 그들을 불렀다. 지팡이 끝에 손전등처럼 빛무리가 뭉쳐져 있었다.
마법사보다 몇 걸음 앞으로는 칼을 뽑아 든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검사가 한 명 보였다.
마법사는 아무래도 물리적 공격에 반응이 늦을 수 있으니까 전사를 한 명씩 붙여서 서로를 보완하게 하는 것 같았다.
먼저 간 사람들이 놓았는지 어둠침침한 굴 가장자리 쪽의 벽에 횃불 대신 빛을 내는 마정석을 박은 막대기들이 말뚝처럼 간격을 두고 꽂혀 있었다.
길이 점점 넓어졌다. 종유석처럼 불규칙한 모양의 모래 기둥들이 고드름처럼 천장에 주렁주렁 달려 있고, 바닥에는 석순 같은 모래 기둥들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마치 모래시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벽에서 모래가 부슬부슬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이거 벽이 무너지지는 않으려나?
천장의 저 모래 고드름들은 떨어지지 않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보면 모래는 아닌가? 흙인가?
생각하자마자 앞쪽에서 뭔가 우르릉 쾅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을 포함해 세 사람 모두 움찔하고 놀랐고 앞쪽에서 길을 안내하던 마법사 역시 몸을 후드득 떨었지만 곧 다시 몸을 세웠다.
불쾌한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제이든은 애써 힘을 냈다.
이건 여기가 지하라서 기온이 떨어져서 그런 거야. 자꾸 등골이 써늘한 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닐 거야. 공기가 차가워서 그래.
레노아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낮은 소리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호흡이 곤란하거나 하지는 않으신지요?”
“예. 숨쉬기 편하진 않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유황 냄새 같은 게 불쾌하고 코가 좀 따갑기는 한데……, 지하라서 그런가요? 설마 근처에 화산 같은 건 없겠지요?”
제이든이 말하자 레노아와 테오도르가 눈을 마주치더니 테오도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저 고양이도 그렇고. 니콜레타 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약속의 아이가 맞는가 봅니다.”
“?”
제이든이 무슨 말인가 싶어 쳐다보자 레노아가 대신 말했다.
“여기는 지금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겠지만, 지금 이 공동에 고여 있는 마기만 해도 보통 사람이나 동물은 서 있기도 어려울 겁니다.”
테오도르가 말을 이었다.
“사람을 많이 데려오지 못한 것도 마나의 힘으로 마기를 억제할 수 있는 마법사나 전사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래요. 그런데 우리 제이든 씨는…….”
테오도르는 볼록한 뺨을 부풀리며 웃어 보였다.
“용감하기도 하시지만, 마나 한 줌 없는 몸으로도 마기를 끄떡없이 받아내고 계시네요. 유황 냄새가 난다고 하시는 걸 보면 마기를 전혀 못 느끼는 건 아닌데.”
테오도르는 다시 아실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저 고양이도 보통 고양이는 아닌데요? 토끼는 포에니 토끼고, 고양이는 마기를 거뜬히 이겨내고……, 우리 이 일이 끝나면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얘기 좀 많이 해요. 제이든 씨께 궁금한 게 많네요.”
테오도르는 별명인 테디처럼 곰을 닮은 얼굴로 상냥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날카롭게 반짝였다.
조금 더 걸어갔을 때 갑자기 아실 리가 하악 소리를 내며 멈췄다.
바닥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세 명? 네 명 정도인가?
셋은 쓰러져 있었고 한 명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