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1화
46. 최후의 인장(3)
핑, 피용, 피용!
고무줄을 튕기는 듯한 이명이 귀를 때렸다.
귀를 감싸고 있던 손을 뗀 제이든이 눈을 떴을 때는 은색과 보라색의 안개가 눈앞에서 걷히는 중이었다.
왠지 익숙한 장소인데?
니콜레타의 골동품 가게, 공간이동 포탈의 출구였다.
내가 왜 여길 들어왔지? 조금 전까지 세시온의 서재에 있었는데.
온통 빛에 감싸인 에트루리안의 서를 들여다보려고 책장에 얼굴을 가까이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얼른 주변을 돌아보니 포이는 어깨 위에 있고 아실리는 다리 옆에 붙어 있었다.
포탈이 멈추고 눈앞에 출구가 나타났다.
일단 나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한 발 움직이는데 보랏빛 로브를 입은 몸집 작은 할머니가 포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제야 왔구나. 힘들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가자. 제이든.”
니콜레타가 포탈 안에 뛰어들어 몇 번 손을 움직이자마자 공간이동 포탈이 바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가는 건지……?”
미처 마치지 못한 질문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공간이 일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니콜레타의 공간이동 포탈은 공용 포탈에 비해서는 무척 쾌적하지만 그래도 공간이동 포탈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의 출렁거림이 심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제이든의 몸이 평소 같지 않았다. 마치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나른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너무 오래 가는데.
옆을 보았지만 시야가 온통 일렁거리는 포탈 안에서는 옆 사람을 확인하거나 말을 나누는 게 어려웠다.
어깨에 있는 포이의 보송보송한 털을 더듬으면서 제이든은 눈을 감은 채 침을 삼켰다. 멀미가 날 것 같은 속을 다스리고 혼란한 정신줄을 잡으려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일단 침착하자. 이동이 끝나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거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공간의 일렁거림이 멈추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서 내리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바람이 심하니까 후드 써라. 토끼랑 고양이 잘 챙기고.”
니콜레타의 재촉에 따라 포탈 바깥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강렬한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제이든은 기겁하며 아실리를 안아 올려서 포이와 함께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쪽이다. 제이든.”
니콜레타를 따라 모래바람을 뚫고 몇 미터쯤 걸어가니 마치 군대의 막사 같은 커다란 천막이 서 있었다.
“니콜레타 님, 이제야 오셨네요. 제이든 씨도.”
막사의 입구에 서 있던 레노아가 반색을 하며 그들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늦지 않았지?”
“모르겠어요. 니콜레타 님. 열리기 시작한 건 확실한데 아직 제대로 열리진 않은 것 같아요.”
막사 안에는 레노아를 비롯해 테오도르 등 안면 있는 마법사들 몇 명, 그리고 제이든이 얼굴을 모르는 마법사들도 십여 명이나 들어차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사처럼 보이는 사람들, 검사나 창수도 열댓 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제이든이 더듬거리자 레노아와 니콜레타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제이든, 네가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해서 내가 기다렸다가 같이 왔잖아.”
“기억이 안 나나요?”
니콜레타와 레노아가 제이든의 팔을 붙잡았고 아실리까지 당황한 목소리로 높게 울었다.
-제이든, 왜 그래? 기억이 안 나?
제이든은 머리를 흔들었다.
“저는……, 세시온 님의 서재에 있었는데.”
서재에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들여다보고 뭔가 읽었는데, 뭘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이든은 머리를 쥐어짰다.
내가 책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뭣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때 레칸도르의 금척이 일어서서……, 그러니까 몸을 일으키는 금빛 코브라처럼 혼자 받침대에서 일어서서 미끄러져 왔었다.
‘금척이 내 몸을 감았었어.’
제이든은 허리춤을 들춰보았지만 아무것도 감겨 있지 않았다.
분명히 금척이 내 몸을 감았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주술에 걸린 걸지도 몰라요. 제이든 씨가 한 번 납치를 당했었잖아요. 어쩌면 그때 뭔가 흑마법을 당했을지도.”
“잠깐, 잠깐만요.”
제이든은 손을 내저어서 레노아의 말을 멈추게 한 뒤 얼른 아실리를 안고 구석자리로 갔다.
“실리, 무슨 일이 있었어? 나 최후의 인장을 받침대에 놓고 에트루리안의 서를 본 뒤부터 기억이 안 나.”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그의 품에 안긴 아실리가 놀란 듯 미야옹 울면서 걱정스럽게 앞발을 들어 제이든의 이마를 짚었다.
“응, 빨리 좀 알려줘. 어떻게 된 건지.”
고양이는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빠르게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냥냥 소리가 섞였다.
-제이든이 빛 속에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읽고 있었어. 소리를 내지 않아서 내용은 못 들었어. 뭔가 선택해야 한다고 중얼거린 것만 들었어. 그리고 운명을 재는 자, 레칸도르의 금척이 갑자기 움직여서 제이든의 몸을 감았고. 어?
아실리가 갑자기 당황한 얼굴로 초록색 눈을 크게 떴다.
-나, 나도 갑자기 기억이 안 나. 우웅, 그담에 니콜레타 님이랑 연락을 했고, 제이든이 허둥지둥 짐을 싸서 공간이동 포탈을 탔어……, 그런데 책을 본 뒤 니콜레타 님과 연락할 때까지 있었던 일이 왜 기억이 안 나지?
그때 곁으로 다가온 니콜레타가 제이든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나중에 찾아보자. 우선 우리가 서로 연락한 이유는 레타논에 마기가 창궐하기 시작해서야. 천 년 전 봉인된 마계의 문이 열리려고 한다. 문을 열려고 하는 건 전에 네가 만났던 흑마법사 노인과 세르지오 녀석이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적지 않아. 문이 열리는 걸 막으려면 최후의 인장이 필요해서 네가 온 거야.”
“제가 최후의 인장을 입수한 건 슈링밖에 모르는데.”
“정말 기억을 못 하는구나. 너도 나한테 연락했고 슈링도 서부로 떠나기 전에 내게 연락해 줬단다. 자, 이럴 시간이 없어.”
제이든은 그제야 여기가 레타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온통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메마른 언덕뿐인 바깥 풍경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달랐지만, 맨 처음 환각 속에서 에트루리안의 병사들과 함께 보았던 장소와는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마계의 문은 이미 열리기 시작했고, 전투에 능한 마법사들과 전사들이 모였단다. 시간이 없어 많이 오지는 못했지만 다들 정예고, 계속 소집을 하고 있으니 좀 더 오겠지만 일단 우리가 해결하는 게 최선이야.”
니콜레타의 옆으로 흰 수염을 기른 마법사가 다가왔다.
“자네가 제이든 로스로군. 말은 많이 들었네. 나는 올리비에 데스탕일세.”
“현 마탑주란다.”
니콜레타가 소개했고 제이든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올리비에 데스탕의 뒤에 서 있던 마흔쯤 되어 보이는 마법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니콜레타에게 물었다.
“이렇게 어리바리한 애송이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감정사로는 유능하다지만 마법을 쓸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전투원도 아닌데.”
그는 제이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마나도 없어 보이는데……, 민간인을 데리고 갔다가 괜히 발목이나 잡는 거 아닐까요?”
“그럼, 에반 자네가 최후의 인장을 쓸 텐가?”
니콜레타가 매섭게 말하더니 제이든을 향했다.
“최후의 인장을 꺼내 보렴.”
내가 최후의 인장을 가져오긴 했던가?
제이든은 얼떨떨한 상태 그대로 메고 있던 배낭을 열어서 손을 넣었다.
최후의 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제이든의 손에 잡혀 올라왔다.
“피리잖습니까?”
“피리였어요? 인장이 아니었나요?”
“최후의 인장이 피리였나?”
제이든의 손에 들린 최후의 인장을 본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니콜레타가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
“이 피리가 최후의 인장이라는 것은 천 년 동안 대대로 이 피리를 지켜오던 수호자가 보증했고, 여기 있는 제이든이 최후의 인장을 찾아낸 사람이오. 에트루리안의 기록에 따르면, 이 인장은 천 년 전 에트루리안이 마계의 문을 닫을 때 이 땅의 인간이 더 이상 이 인장을 사용할 수 없으리라는 저주를 받았지. 하지만 제이든 로스는 이 인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요.”
니콜레타는 아까 제이든을 못 미더운 눈으로 보던 마법사를 불렀다.
“에반!”
“예.”
“최후의 인장을 좀 받아 보겠나?”
노련해 보이는 중년 마법사는 두 손을 내밀어 제이든에게서 최후의 인장을 받았다.
“헉!”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깜짝 놀라 신음하면서 황급히 최후의 인장을 제이든에게 돌려주었다.
“어떤가?”
에반은 벌게진 두 손을 들여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뜨겁습니다. 마치 불에 달군 것처럼 피리가 뜨거워졌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니콜레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최후의 인장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수호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이 피리는 수호자와 선택받은 자, 즉 제이든 로스만 만지거나 불 수 있습니다. 마계의 문을 다시 봉인하려면 이 피리가 꼭 필요하고요. 자,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 뭐죠?”
누군가 대답했다.
“문까지 길을 뚫는 일이죠.”
“그리고?”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그 문까지 제이든 로스를 안전하게 데려가는 겁니다.”
레노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이 다시 봉인될 때까지 제이든 로스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요.”
니콜레타가 확성 마법으로 막사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이 말한 것처럼 제이든 로스는 마법을 쓰지 못하고, 전투원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카이엔의 운명이 달렸어요. 여러분! 마수가 쏟아져 나와 카이엔을 쑥밭으로 만들기 전에 문을 닫을 수 있게, 이 사람을 지켜 주세요!”
막사 전체에서 천둥 치듯 우르릉 소리가 났다.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두드렸고, 검사들을 칼집을 손으로 때리고 창수는 창대를 바닥에 두드려 니콜레타의 말에 응답했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를 지키자고 이래도 되는 건가. 내가 뭐라고.
제이든은 가슴이 떨렸다. 마계의 문을 닫는다고?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저분, 토끼와 고양이를 데리고 가나요?”
붉은 머리의 여자 한 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잘 단련된 체격, 간편한 옷차림에 등에 활을 걸고 있는 걸로 보아 궁사였다.
“아, 그렇지!”
니콜레타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 토끼와 고양이는 꼭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 모두 불안하죠? 벌써 마기가 새어 나오는 데다가 이미 한판 전투를 치른 사람들도 있고.”
니콜레타가 말하면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반짝거리는 눈송이 같은 안개가 지팡이로부터 퍼져 나와 포이를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포에니 토끼다!”
“포에니를 실제로 보다니!”
그동안 포이에게 씌워져 있던 환영 마법이 풀리고 포이의 본래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
니콜레타가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모두 힘을 내요! 살아 있는 행운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 * *
마법사건 전사건 모두 비장한 얼굴이었지만 포이를 보고 난 사람들이 부쩍 사기가 오른 걸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럼 출발하죠.”
니콜레타가 앞장서서 막사를 나가더니 올리비에 데스탕과 나란히 서서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마주했다.
두 마법사가 동시에 모래바람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순간 모래바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수처럼 솟아오르면서 가운데에 통로가 생겼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사막 버전으로 보는 것 같았다.
니콜레타 님, 맨날 삭신이 쑤시네, 머리가 어지럽네, 이제 현장 못 뛴다고 은퇴한 늙은이 일 시키지 말라고 꿍얼거리시더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