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70화
46. 최후의 인장(2)
슈링의 나이는 아실리도 정확히 모르지만 백 살이 넘은 지 오래인 건 확실하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넉넉히 봐도 오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머리는 새하얗지만 키가 큰 데다 자세가 곧고,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진 게 얼굴에 연륜이 보이긴 했으나 연둣빛 눈은 소년처럼 맑고 피부도 생기가 있었다.
‘버드나무 같네.’
키는 크지만 골격이 가는 편이라 늘씬하고 맑은 느낌이 나무로 치면 버드나무, 동물이라면 큰 사슴 같은 느낌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제이든 로스라고 합니다.”
제이든이 머리를 숙이자 슈링이 웃었다.
“오호, 요즘 명성이 자자한 2급 감정사가 아니신가. 역시 자네가 세시온의 후인이었군.”
“절 알고 계신가요?”
“음, 숲속에 박혀 사느라 세상 소식에 어둡긴 해도 감정사 쪽으로는 귀를 좀 기울이고 있거든. 사문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천재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했지.”
슈링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제이든에게 손짓을 했다.
“자, 해가 저물 때도 다 되었으니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하세. 밤에 비가 올 것 같으니 양들도 집에 넣어야 하고. 세이디, 양들을 데리고 가자.”
“왕!”
개 이름이 세이디인가 보다.
세이디는 양 무리 뒤쪽으로 달려갔고 슈링은 목에 걸고 있던 피리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평범한 갈대 피리처럼 보였는데 깜짝 놀랄 만큼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슈링이 피리를 불며 걷자 양들이 매애매애 울면서 그의 뒤를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아니,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인가!’
양들이 하멜른의 아이들처럼 슈링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세이디가 낙오하는 양이 없도록 양 무리 뒤를 지키며 종종걸음을 친다.
제이든도 포이를 어깨에 태운 채 아실리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숲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아 아담한 집 한 채가 있는 빈터가 나왔다.
집 뒤쪽으로 지어진 우리에 양들을 넣고 난 슈링이 제이든을 집으로 안내했다.
마치 커다란 나무 둥치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집이었다.
벽도 나무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고 천장에도 얼기설기 나뭇가지가 얽혀 있었는데 벽에 걸린 다양한 피리가 눈길을 끌었다.
갈대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상아로 만든 것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피리가 십여 개나 걸려 있었다.
“날이 더우니 시원한 음료가 낫겠지?”
슈링이 길쭉한 유리잔 두 개와 동그랗고 낮은 접시 세 개를 담은 쟁반을 들고 왔다.
엘프의 피가 흐른다더니, 밀짚모자를 벗은 그의 귀는 확실히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길고 뾰족했다.
“냐우웅!”
아실리가 나무라는 듯이 제이든을 향해 울었다.
-그렇게 귀를 힐끔힐끔 보면 실례야!
제이든은 얼른 눈을 돌리며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유리잔에는 맹물 안에 푸른 나뭇잎이 한 장씩 잠겨 있을 뿐이었는데 라임과 비슷한 시원한 향이 났다.
슈링은 빨간 나무 열매가 물에 잠긴 접시를 아실리와 포이, 세이디에게 하나씩 주면서 제이든에게 눈짓했다.
“마셔 보게, 더위가 가라앉을 거야.”
한 모금 마셔 본 제이든이 저도 모르게 카! 하고 목에서 우러나오는 탄성을 토했다.
“이거 굉장히 시원하네요. 맛도 좋고!”
얼음도 넣지 않은 맹물처럼 보였는데 입에서 목으로 넘어가면서 땀이 싹 가라앉을 만큼 시원한 데다 맛이 아주 향기로웠다.
“포잇, 포잇!”
나무 열매가 담긴 물을 맛본 포이와 아실리도 찹찹찹 맛있게 먹고 있었다.
“자, 내게 찾아왔다는 건 열한 개의 유물은 이미 다 찾았다는 거겠지?”
가만히 제이든을 뜯어보던 슈링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지?”
“……예,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을 한 번 본 적이 있다네. 동방에서 만난 사람이었지. 그 사람과 아주 비슷한 기운을 가졌군.”
슈링은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말을 이었다.
“최후의 인장은 에트루리안 이후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유물이야. 그 저주를 풀려면 열두 개의 유물이 다 모여야 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땅의 사람이 아닌 이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군.”
슈링은 일어서더니 벽에 걸린 피리들 중 하나를 내렸다.
그가 손을 댈 때까지는 평범한 갈대 피리 같았는데, 슈링이 피리를 벽에서 내리자 그의 손에서 피리가 모양을 바꾸었다.
환영 마법을 씌워 놓았던 건지 진짜 모습을 드러낸 피리는 책에서 본 최후의 인장과 같은 모양이었다.
‘아니 이 양반, 그 중요한 유물을 그냥 벽에다 걸어 놓았던 건가?’
제이든의 놀란 얼굴을 본 슈링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원래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지 않나.”
아, 네. 카이엔에도 그런 말이 있군요? 제 고향에도 똑같은 말이 있는데.
제이든은 속으로 대답하며 슈링이 손에 든 피리를 바라보았다.
실물을 보면 좀 다를까 했는데 역시 피리의 재질을 알 수 없었다.
무척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지긴 했는데…….
제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피리를 주시했다.
“직접 보겠나?”
슈링이 그에게 피리를 건네주었다.
제이든은 피리를 받아들고 집중해서 보았다. 금방 푸르스름한 아우라가 떠올라 오더니 금빛으로 변했다.
혹시 환각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긴장했으나 환각은 오지 않았다.
손에 들고 가까이 봐도 피리의 몸체가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옅은 회색이고, 형태는 속이 빈 갈대 같지만 그보다 훨씬 매끄럽고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있는 재질이었다.
머릿속에서 비슷한 물질을 짐작해 보느라 한참 온갖 자료를 다 떠올려 보던 제이든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피리, 재질이 뭔가요?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네요.”
명색이 2급 감정사인데, 멸종된 코끼리의 상아도 알아볼 수 있는 제이든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재질이라니, 그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자네가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아마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네.”
슈링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용의 수염으로 만든 피리거든.”
제이든은 놀라서 피리를 떨어뜨릴 뻔했다.
용의 수염이라고요? 그, 날개를 펴고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나는 용 말입니까?
그는 환각 속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던 은룡 엘리미네온을 생각했다.
그 거대하고 장엄하던 생명체, 아니, 대체 누가 그런 존재의 수염으로 피리를 만들 생각을 했담.
제이든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 고향에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다는 속담이 있긴 합니다만, 세상에, 용의 수염이라니……”
“용이 양해한 일이니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네.”
제이든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슈링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나저나 최후의 인장도 자네에게 손을 허락한 모양이니 나야말로 이제 좀 쉴 수 있겠어. 그 피리를 지키느라고 내가 백오십 년 동안 꼼짝도 못 했다네.”
그는 한숨 놓았다는 듯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내 이전에 그 피리를 지키던 사람은 삼백 년을 지켰다는데, 나는 그래도 빨리 손을 뗄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군. 내 생전에 후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려줘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그럼 누군가 최후의 인장을 천 년 동안 지켜온 건가요?”
“그렇지. 열두 개의 유물 중 에트루리안의 서와 함께 최초의 유물이자 마지막 유물이라네. 에트루리안이 직접 사용했던 것은 이 두 가지뿐이거든.”
다른 유물들은 그 이후에 생긴 것들도 있고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모르게 된 것들도 있었는데 최후의 인장만은 지키는 사람이 계속 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원래는 에트루리안의 서에도 지키는 자가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수백 년 전에 지키는 자가 해를 당하면서 책을 잃었어. 그 후 종적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지.”
제이든은 최후의 인장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슈링에게 물었다.
“열두 개의 유물을 모두 찾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세시온 다미에르 님이 이미 여덟 개를 찾아 놓으셨기에 저는 네 개만 채우면 됐었습니다. 이제 최후의 인장을 찾았으니 열두 개를 모두 찾았는데요.”
“임무 달성을 축하하네.”
“그럼 이제 저는 자유인 거죠?”
“음?”
“실은…….”
제이든은 슈링에게 원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매개체를 구한 것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열두 개의 유물을 모두 찾아서 세시온 님과의 약속을 완수했으니까 저는 이제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 해서요.”
“글쎄…….”
슈링은 턱을 만지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네. 나는 이백 년 전에 내 이전에 최후의 인장을 지키던 엘프에게서 인장을 물려받았네. 그분은 내게 에트루리안의 서와 최후의 인장에 대해 말해주고 누군가 열한 개의 유물을 다 찾은 사람이 최후의 인장을 찾으러 올 때까지 지켜달라고 했지.”
옛날 생각을 하는지 슈링의 눈이 아련해졌다.
“나는 그분께 목숨을 빚진 일이 있어서 기꺼이 최후의 인장을 맡았지. 세시온 다미에르를 알게 되면서 그가 열두 개의 유물을 찾기 시작한 걸 알았는데 그도 결국 다 찾지 못하고 떠났지만.”
슈링은 먼 곳을 보는 듯하던 눈을 제이든에게 돌렸다.
“좋은 후인이 나타나 결국 그 기나긴 과업을 끝냈군. 나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하지만, 자네, 에트루리안의 서를 갖고 있겠지?”
“예.”
“최후의 인장을 가지고 돌아가면 에트루리안의 서가 앞으로의 일을 알려줄 걸세.”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열두 개의 유물을 다 찾았으니 아마 자네도 자유일 거야. 자네가 원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그 책이 알려줄 것 같군.”
제이든 일행은 슈링에게 저녁을 대접받고 하룻밤 묵은 뒤 다음 날 아침에야 그의 집을 떠났다.
고기 한 점 없이 풀 종류와 빵밖에 없는 식사였는데도 무척 맛있었다. 비슷비슷한 샐러드가 어떻게 그렇게 다른 맛을 내는지.
포이는 다양한 종류의 건초를 받아서 배가 빵빵하도록 먹었고 아실리도 제 몫으로 받은 음식이 입에 맞는지 잘 먹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뵈어도 될까요?”
그에게 부쩍 호감을 느낀 제이든이 묻자 슈링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며칠 후면 나도 여기 없을 걸세. 나도 이제 고향에 가 보려고 하거든. 서쪽 끝에 있는 엘프의 숲으로.”
그는 최후의 인장을 찾으러 올 세시온의 후인을 기다리느라 계속 아스토시엔 산 근처에 머물렀던 모양이었다.
“자, 시공을 넘은 여행자에게 행운이 있기를!”
슈링은 마부석에 앉은 제이든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말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말이 알아서 걷기 시작했고 뒤에서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숲을 빠져나오고 산길에 도착할 무렵까지도 새가 노래하는 듯한 피리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 * *
세시온의 서재, 비밀 책장의 마지막 자리, 제이든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최후의 인장을 꺼내 받침대 위에 놓았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는데……, 파도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이 끓어오르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보글보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장 전체가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녹색에 가까운 푸르스름한 빛이 책장 전체에서 번져 나오다가 점점 더 밝아졌다.
그리고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책장에서 오색 빛의 분수가 쏟아졌다. 열두 개의 유물이 서로서로 빛줄기를 뿌리면서 빛으로 이어졌다.
시야가 다채로운 빛으로 가득 차면서 너무 눈이 부셔서 제이든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쏟아지는 빛에 겨우 눈이 좀 익은 제이든이 손을 치웠을 때 에트루리안의 서가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게 보였다.
후루루룩 넘어가던 책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고 분수처럼 쏟아지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제이든은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