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9화
46. 최후의 인장(1)
제이든이 아스토시엔 산의 숨겨진 계곡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여름이 한창이었다.
하이옌 항구에서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얻은 이후 들어오는 의뢰를 모두 거절하고 집으로 직행한 길이었다.
지난번 출행 이후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돌아오는 길은 놀라울 정도로 평탄했는데, 어쩌면 비아트리스 성녀의 반지 덕분일 수도 있었다.
여정 중에 제이든이 경로나 일을 선택해야 할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잘못된 선택을 하면 반지가 그의 손을 찔러서 경고를 하였기 때문에 피할 수 있었다.
만약 반지의 경고가 없었다면 오지랖 넓은 제이든이 또 다른 일에 휘말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는데.
제이든은 손가락을 펴서 성녀의 반지를 보았다.
다른 유물과 달리 이 반지만은 서재의 비밀 책장에 두지 않고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반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비아트리스의 반지를 서재에 놓으려고 들어간 날이었다.
이미 몇 번 해본 일이라 이제는 자연스럽게 반지를 빼서 정해진 자리에 놓았다.
“이거 봐, 아실리, 제자리에 오니까 반지가 빠진다.”
그동안 반지는 제이든의 손가락 안에 스며들기라도 한 듯이 빠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세시온의 서재, 비밀 책장 앞에 서자 자연스럽게 빠진 것이다.
제이든이 반지를 제자리에 놓고 용의 눈을 꺼내서 반지를 비추었다.
반지와 용의 눈과 에트루리안의 서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서로 이어지면서 책장이 후르르 넘어갔다.
펼쳐진 책장을 용의 눈으로 비춰 보니 책장에서 그림이 일렁거렸다.
“최후의 인장……, 이게 내가 찾아야 하는 마지막 유물이지?”
제이든이 찾아야 하는 네 번째 유물, 마지막 유물은 피리였다.
지휘봉 정도의 길이에 구멍이 일곱 개 뚫려 있고 끝부분이 태평소의 나팔 부분처럼 반구형으로 벌어져 있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재질을 알 수 없네. 설명을 다 읽을 수가 없어. 그림은 상세한데……, 현재 에세나에 있다고 적혀 있고.”
-최후의 인장이 에세나에 있었구나.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줄 몰랐네.
제이든의 옆에 붙어 있던 아실리가 나직하게 야옹거렸다.
세시온이 기록해 둔 열두 가지 유물 중 마지막에 적혀 있는 유물의 이름이 최후의 인장이어서 제이든은 도장 종류라고 생각했었다.
“피리인데 이름이 왜 인장이지? 실리는 알고 있었어?”
-나도 이름이랑 소유자만 알고 있었어.
아실리는 마지막 유물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전에도 아실리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알아도 소용없다고 대답해 주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세시온이 그랬거든. 후인이 열한 개의 유물을 다 찾고 난 뒤에 말해 주라고. 그 사람에겐 마지막에 가야 하니까.
아실리는 코를 쫑긋거리면서 말했다.
-최후의 인장은 영웅 에트루리안이 마를 쫓기 위해 사용했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전해져 내려오지 않아서 나도 잘 몰라. 열한 개의 유물을 다 모으면 위치를 알게 될 거라더니 책이 가르쳐 주네.
“응…….”
-제이든, 동굴부터 가 보고 싶은 거야?
눈치 빠른 아실리의 물음에 제이든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야, 아직 마지막 유물도 모으지 못했고, 매개체를 쓰는 정확한 방법도 모르는걸.”
그동안 차원 이동 매개체를 찾아다니는 동안 찾기만 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정작 매개체라고 확신하는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손에 넣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일단 열두 개의 유물을 다 찾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최후의 인장부터 찾자.”
비밀 책장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제이든의 앞에서 비아트리스의 반지가 빠르게 반짝거리며 빛을 뿜어냈다.
“뭐지?”
반지는 마치 두고 가지 말라고 제이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제이든이 손을 내밀어 반지를 집어 들자 반지는 빨려드는 것처럼 제이든의 손가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끼고 다니라는 건가 봐.
“그러게.”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마치 안심했다는 듯 반짝거림을 멈추고 자리를 잡았다.
* * *
아스토시엔 산에는 다섯 개의 큰 산봉우리가 있다.
세시온의 집이 있는 두 번째 봉우리에서 동쪽을 향하면 아룬빌과 레이크빌을 거쳐 도시로 나가게 되고, 반대로 서쪽으로 산을 넘으면 산기슭을 끼고 펼쳐진 목초지가 있어서 양과 염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 마을의 이름이 에세나라고 했다.
-그 할아버지,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 줄 몰랐네.
마지막 유물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시온 다미에르의 지인이었다고 했다.
“아니 세시온 님의 지인이라면 나이가 몇 살이야? 백 살도 넘은 거 아니야?”
-그 사람은 엘프의 피가 섞인 사람이야.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살아.
아실리가 냐옹냐옹 말했다.
-에트루리안의 최후의 인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다들 봉인용 인장을 생각했었어. 나도 본 적은 없어서 피리인 줄은 모르고 도장인 줄 알았어.
피리인데 인장이라면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효과가 있는 피리, 만파식적 같은 건가?
제이든이 생각한 만파식적(萬波息笛)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피리이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부친인 문무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동해의 섬에 대나무 한 그루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어 부니 침입해 오던 적이 물러가고, 가뭄이 들 때 불면 비가 내렸으며 홍수가 날 때 불면 물결이 잔잔해졌다고 했다.
그 피리의 이름이 만파식적이다.
카이엔에서도 신력 높은 신관이나 사제가 우수한 장인과 힘을 합해서 이처럼 벽사파마(辟邪破魔:삿된 것을 물리치고 마를 부순다)의 기운을 가진 물건을 만든 것들이 있었다.
예전에 톰슨 골동품상에서 보았던 테렌스의 종도 이런 종류의 유물이었다.
* * *
“와, 저쪽은 첩첩산중인데 바로 그 뒤에 이런 들판이 있었네.”
“포잇!”
제이든이 감탄했고 포이가 동조하듯이 눈을 크게 뜬 채 팔짝 뛰었다.
에세나는 숨겨진 계곡에서 마차로 사흘 거리였다. 실제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산봉우리를 끼고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점점 완만해지는 산기슭을 따라 마차를 몰자 갑자기 눈앞이 탁 터지면서 널찍한 목초지가 펼쳐졌다.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해 멀찍이 가느다란 은빛 띠처럼 보이는 강변에 이르기까지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고 한쪽 옆으로는 숲이 이어져 있었다.
여름이 한창이라 들판도 숲도 온통 푸르른데 그 풀밭 위로 하얀 구름 같은 양떼가 몽실몽실 뭉쳐져 있고 넓게 울타리를 두른 목초지 안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도 보였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여러 번 가 봤는데 이쪽으로는 안 와 봐서 여기 이런 들판이 있는 줄 몰랐어.”
-중간에 산이 끼어 있으니까. 일부러 이쪽으로 올 일이 없었지.
아실리가 마부석에서 바람을 들이마셨다.
포이가 뒷발로 일어선 채 귀를 팔락거리며 앞발을 달싹거리는 게 내려가서 풀밭을 뛰고 싶은 모양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포이. 저기 큰 나무 있는 데까지 가서 쉬자.”
산기슭을 따라 난 좁은 길에서 들판 사이로 뻗은 길로 들어섰다.
풀이 잔뜩 자란 걸 보면 사람 왕래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제이든이 목표로 한 큰 나무 주변에는 이삼십 마리쯤 되는 양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컹, 컹!”
천천히 다가오는 마차를 보고 털이 북슬북슬한 양치기 개가 먼저 컹컹 짖었다.
나무 둥치에 기대 졸고 있던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마차 쪽을 보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붙임성이 좋은 성격인지 청년은 씩씩한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네면서 마부석의 아실리와 포이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산 쪽에서 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어디서 오세요?”
“아룬빌 쪽에서 왔습니다.”
제이든이 말을 마차에서 풀며 물었다.
“에세나로 가려면 이 길이 맞나요?”
청년이 갈색으로 그은 얼굴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에세나요? 여기가 에세나인데?”
청년은 손으로 멀찍이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마을부터 여기 들판 전체가 다 에세나예요.”
“아하.”
제이든이 고삐를 길게 늘어뜨려서 나뭇가지에 느슨하게 묶어 주자 말이 기쁜 듯이 서성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았는지 풀을 뜯기 시작했다.
“토끼를 내려 주고 싶은데 개는 괜찮아요? 덤비지 않을까?”
제이든이 묻자 목동 청년이 손사래를 쳤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 우리 로이는 훈련이 잘돼 있어서 함부로 덤비지 않아요.”
청년은 제이든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우리 애는 물지 않아요 하는 게 아니고, 로이는 공격받지 않으면 절대 덤비지 않아요. 마을에도 토끼나 고양이가 있지만 잘 지내는걸요.”
양치기 개가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점잖게 앉아서 왕 짖었다.
포이가 폴짝 뛰어 마차에서 내려오더니 풀밭에서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아실리가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켠 뒤 나른하게 드러누워 포이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혹시 피노라는 목동 출신 할아버지를 알아요? 에세나에 사신다던데.”
제이든이 묻자 양치기 청년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피노요? 피노……, 잘 모르겠는데.”
-피리 부는 할아버지를 아느냐고 물어봐.
아실리의 말을 듣고 제이든이 다시 묻자 청년이 손뼉을 딱 쳤다.
“아하, 슈링 할아버지! 피리 하면 슈링 할아버지죠.”
“슈링?”
“예, 별명이 슈링이에요. 맞아, 그 할아버지 이름이 피노였구나. 모두 슈링이라고 부르니까 잊어버렸어요.”
“갈대?”
“맞아요. 제일 좋은 소리가 나는 갈대죠.”
슈링은 카이엔의 물가에서 나는 갈대의 일종이다.
심지가 굵고 공명이 좋아서 꺾어서 피리를 만들면 소리가 곱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가 갈대 피리를 기막히게 불거든요. 그래서 별명이 슈링이 됐대요. 우리 아버지 대부터 그렇게 불렀대요.”
“그럼 슈링 할아버지는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어요?”
“저쪽에 숲 보이죠?”
청년은 들판 옆쪽으로 이어져 있는 숲을 가리켰다.
“그 할아버지는 숲을 좋아하셔서 마을에 살지 않고 숲속 오두막에 살아요. 뭐 마을 바로 옆이긴 하지만.”
숲 바로 옆의 풀밭에도 하얗고 몽실몽실한 양들이 한 무리 보였다.
“저 양들이 슈링 할아버지네 양들이에요.”
“고마워요.”
제이든은 잠시 쉬었다가 청년이 가르쳐 준 숲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양치기가 없네?”
숲에 가까이 다가가자 스무 마리 남짓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였는데 양치기가 없었다.
새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다가 무리에서 이탈하려는 양이 있으면 얼른 앞을 가로막고 단속하는 털북숭이 개가 한 마리 있을 뿐이었다.
“너 참 영리한 개구나. 주인은 어디 있니?”
흰색과 검은색 털이 북슬북슬한 양치기 개에게 말을 걸자 개는 총명해 보이는 눈을 반짝이더니 숲 쪽을 향해 달려갔다.
숲 초입의 나무 밑에 앉아 왕왕 짖길래 보니 나뭇가지에 뿔고동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이걸 불면 되니?”
“왕!”
대답하듯 짖고 난 개는 무리에서 빠져나가려는 아기 양 하나를 얼른 몰아서 도로 무리 안에 밀어 넣었다.
“양은 너 혼자 보는구나? 주인도 없이.”
“우우왕!”
맞다는 듯이 짖는 개가 알려준 대로 나뭇가지에서 뿔고동을 벗겨내 입에 대고 살짝 불었다.
“뿌우~”
낮고 부드러운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화답하는 듯한 피리 소리가 숲 안쪽에서 맑게 울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나뭇잎을 밟으며 가까워지는 소리가 났다.
밀짚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은 훤칠한 남자가 나무 사이로 몸을 드러냈다.
“오? 웬 손님이지?”
밀짚모자 밑으로 하얀 명주실 같은 은발을 드리운 남자가 모자챙을 위로 올렸다.
나뭇잎처럼 갸름한 연둣빛 눈이 탐색하듯 제이든을 향했다.
“냐앙!”
아실리가 제이든의 앞으로 살랑살랑 나서서 인사하듯 한쪽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잠시 제이든과 아실리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 세시온 다미에르의 고양이 아니냐? 이름이 아실리였던가?”
“냐아옹.”
“그래, 드디어 피리를 받으러 온 거냐?”
슈링은 제이든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이 친구가 세시온의 후인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