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68화 (168/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8화

45. 수상한 음식점(5)

제이든은 속으로 날짜를 짚어 보았다.

수지가 말한 시계 장인은 파비앙 뒤포르일 것이다.

문제의 기왓장이 용오름에 휘말려 떨어진 건 이윤호와 파비앙 뒤포르가 모두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니 지금부터 적어도 십 오륙 년 전이다.

제이든 자신이 카이엔에 떨어진 것이 이제 6년째에 접어드는데 시간 간격이 너무 컸다.

이윤호가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매개체가 그가 함께 가져온 식칼이었다면, 제이든의 매개체도 제이든과 함께 건너온 물건일 것 같은데.

혹시 해송박물관의 기와가 아닌 걸까?

제이든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옆에 앉아 있던 아실리가 꼬리로 그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함께 차원을 넘어왔다고 해서 꼭 같은 시간대에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실망하지 마.

고마운 눈으로 아실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제이든이 다시 수지를 향했다.

“혹시 그 기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수지는 한쪽 눈을 살짝 찡긋거리며 웃었다.

“우리 집에 있답니다. 할아버지가 제게 물려주셨죠.”

선박 갑판에 떨어진 잡동사니들은 모두 선박 주인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가끔 그런 물건들 중에 보물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아는 선주는 갑판 위에 떨어진 것들을 모두 신중하게 회수해 검토한 후 날짜를 정해 공개 경매를 했다.

갑판 위에서 발견된 물건들 중에는 오래된 은화도 있었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아마도 바닷속에 오래 잠겨 있던 난파선에서 나왔으리라고 추측되는 옛 장신구나 유물 등도 있었으나 가치가 있어 보이는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특이한 새의 문양이 그려진 기왓장은 용오름에 휘말려 갑판에 떨어졌는데도 손상이 크지 않고, 고상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명성 높은 시계 장인 파비앙 뒤포르와 수지의 할아버지인 이윤호-유노 리가 그 기와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파비앙 뒤포르도 낙찰받고 싶어 했지만 유노 리의 갈망이 더 컸기 때문에 결국 기와는 그가 낙찰받았다.

“그때 기준으로 상당한 거금을 냈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이 기와의 가치에 비해 낙찰가가 너무 높았던 거 아니냐고 말들이 많았거든요.”

유노 리는 거금을 들여도 좋으니 그 기와가 꼭 갖고 싶었다.

차원을 건너기 전에는 나이도 어렸고 형편도 어려워서 골동품이나 유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기와가 어떤 물건인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한국 물건인 것 같았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기와가 고향의 물건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따로 감정도 받지 않으셨대요. 제게 물려주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누군가 이 기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넘겨줘도 좋다고.”

수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기와를 보러 가실까요?”

식당의 뒤쪽으로 돌아들어 가니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을 두른 돌담 사이에 나무 문이 달려 있었다.

제이든은 이채로운 눈으로 담과 문 위에 올려진 기와를 바라보았다.

“그 기왓장을 구입하신 후 할아버지가 기와에 흥미가 생겨서 동방 대륙의 기와를 많이 모으셨답니다. 그리고 식당과 살림집 사이를 구분하는 돌담을 지으면서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에 이런 돌담이 있었대요.”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담 위의 기와를 만져보았다.

이 기와는 동방 대륙, 센 왕국에서 흔히 사용한 기와라 조선 기와와는 모양이 좀 달랐다.

그러나 담을 쌓은 형태는 조선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와돌담을 닮았다.

“수막새도 있네요.”

수지는 ‘수막새’라는 말을 모르는 듯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제이든이 돌담 사이에 끼워진 수막새 기와를 만지자 금방 알아챈 듯이 웃었다.

“아, 무늬기와 말씀이시군요. 이거 넣어서 짓는다고 일부러 동방에서 집과 담을 지어 봤다는 기술자를 불러왔었어요.”

돌담 사이에 무늬가 있는 수막새를 끼워 넣어 장식한 것을 보니 이윤호는 확실히 눈썰미가 있었다.

그가 차원을 넘어 온 것이 십 대 후반이었을 텐데, 어려서 보았던 기와돌담을 기억했다가 재현해 낸 것이다.

그는 제대로 차원을 건널 수 있을지 모르는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돌아가지는 않겠다, 여기 남겠다고 결정했다.

그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어 거금을 주고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입수하고, 동방의 기와를 사들여 어렸을 때 보았던 기와돌담을 지으며 향수를 달랜 모양이었다.

“색다른 형태의 돌담이라고 건축하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 가고 그랬어요. 이렇게 무늬기와를 넣어 쌓은 돌담은 처음 본다고.”

“그럴 겁니다.”

동방 대륙에는 가 본 적 없지만 책이나 환각 속에서 본 이쪽 세계의 돌담과는 다른 형태였다.

제이든은 돌담을 보면서 대구 달성 도동서원의 기와돌담을 떠올렸다.

도동서원의 기와돌담은 낮고 소박하지만 중간중간 수막새를 넣어 운치 있게 쌓은 돌담인데 지금 보는 돌담이 그 느낌을 닮아 있었다.

돌담 사이의 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작은 뜰이 딸린 아늑한 살림집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요식업을 아버지가 크게 번창시켰기 때문에 시내에도 저택이 있지만, 할아버지는 여기가 제일 정이 간다고 말년에는 여기서만 지내셨어요. 저도 여기가 좋아서 할아버지 수발든다는 핑계로 여기 와 있었고요.”

잔디 위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동글납작한 돌길을 따라 지어진 집은 한옥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동방 느낌이 풍기는 집이었다.

기와돌담을 봤을 때 이미 알 수 있었지만 공들여 지은 게 표가 났다.

“원래는 식당에 붙여 지은 살림집이어서 잠만 잘 수 있을 정도로 조촐한 집이었다는데, 나중에 성공하신 후에 개축했다고 해요. 이쪽으로 잠깐 앉으세요. 고양이랑 토끼 친구도 요기 앉으렴.”

거실 소파에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가 나란히 앉자 수지가 방에서 자단목 함을 가지고 나왔다.

함 안에 부드러운 천에 싸인 채 들어 있는 기왓장을 본 제이든이 숨을 삼켰다.

한쪽이 좀 깨졌고 약간 손상이 있었지만 제이든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해송박물관의 가릉빈가문 수막새였다.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드나들면서 보아온 바로 그 수막새였다.

그러나 그 수막새보다 먼저 제이든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기와 옆에 끼워져 있는 쪽지 한 장이었다.

네모반듯한 종이에 꾹꾹 눌러 쓴 손글씨는 한글이었다.

‘열심히 살았고 다 이루었다. 아쉬운 것 없이 행복했다. 다만 가끔 그리울 뿐.

33xxxx-1xxxxxx 이윤호’

별말 아니었지만 카이엔에 와서 처음 한글을 보니 제이든의 가슴이 뭉클했다.

게다가 이 주민등록번호.

이윤호가 차원을 넘어 온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는 주민등록번호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세계에 왔을 것이다.

제이든이 환각 속에서 본 이윤호는 원래 세계에 그다지 미련이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모형제도 없었고 그를 따뜻이 보살펴 준 가까운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카이엔에 와서야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꿈꾸던 요리사가 되었고, 가정을 이루고, 사업에도 성공했고.

그럼에도 그는 수십 년간의 이계 생활에도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잊지 않고 남겨놓았다.

유노 리가 아니라 이윤호라는 서명과 함께.

먼 훗날 누군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 있다면 그를 알아봐 주고 기억해 주길 바랐을까.

“손님은 이 글자를 알아보시는 거죠?”

“예. 제 고향의 글자거든요.”

손가락으로 쪽지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제이든이 기와를 주시하자 기와가 은은한 청색 빛무리를 내뿜었다.

점점 금빛을 띠기 시작하는 기와의 아우라를 보며 제이든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다.

이거야말로 해송박물관에서 그와 함께 이 세계로 차원을 넘어온 유물이고, 그를 다시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매개체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제이든은 고개를 들고 수지에게 물었다.

“이 기와, 할아버님께서 얼마 주고 사셨습니까? 제가 구입하고 싶습니다.”

“상당히 비쌌는데요…….”

“괜찮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제이든을 잠시 바라보던 수지가 싱긋 웃으면서 기와가 든 자단목 함을 제이든 쪽으로 살짝 밀었다.

“이 기와를 알아보시고, 할아버지의 글도 알아보시고, 김치와 인삼도 알아보신 분이니 그냥 드릴게요. 할아버지도 누군가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라고 하셨어요.”

“아마 카이엔에서 이 기와를 알아볼 사람은 저뿐이긴 하지만 그냥 받을 수는 없습니다. 큰돈 주고 사셨을 텐데 제대로 돈을 내고 사야죠.”

제이든과 수지는 실랑이를 한 끝에 제이든이 5천 골드를 입금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양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든이 상자를 배낭에 집어넣고 꾸벅 인사를 하자 수지도 머리를 숙이며 웃었다.

“아니에요. 기와가 임자를 찾아간 것 같아 저도 기뻐요. 고향 분이 와서 물건을 알아봐 주셔서 할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예요.”

함께 뜰로 나오자 그녀는 한쪽 담 아래에 핀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고향 분도 만나고 기와도 임자를 찾아갔으니 할아버지의 묘에 가서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잠시 망설이던 제이든도 입을 열었다.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저도 하이옌을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윤호의 묘는 항구와는 반대쪽으로 마을 뒤편에 있는 낮은 산, 잠의 신 솜누스의 사제들이 관리하는 공동묘지에 있었다.

카이엔의 신화에서 산 사람의 생명을 거두는 것은 죽음의 신이지만 죽고 난 뒤의 영혼을 돌보는 것은 잠의 신이다.

제이든은 카이엔의 신화를 익힐 때 그 부분을 좋아했었다.

‘따뜻하고 평화롭잖아. 죽음의 신이 아니라 잠의 신이 사자(死者)들을 돌본다는 게.’

잠의 신이 돌보는 곳인 만큼 공동묘지는 마치 평화로운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이윤호의 묘는 리 가문의 가족묘지 자리에 두 기가 나란히 있었는데 잘 가꿔져 있고 싱싱한 꽃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 묘예요. 금슬이 아주 좋으셨지요. 솜누스 신의 사제들이 잘 관리해 주시지만 우리 가족도 자주 와요.”

꽃다발을 놓는 수지의 말을 들으며 제이든은 묘 앞에서 잠시 묵념한 뒤 눈을 떴다.

그는 가만히 묘를 바라보았다.

서울에 있는 누나와 매형, 조카의 얼굴이 스쳐 갔다.

이미 6년이 지났다. 처음에 그토록 못 견디게 그립고 생각만 해도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던 아픔이 어느새 아련하게 흐려져 있었다.

“냐아옹!”

아실리가 가만히 제이든의 다리에 몸을 기댔고 어깨 위의 포이도 제이든의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포이의 보송보송한 털을 느끼면서 제이든은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여기 누운 이윤호 씨처럼 평생 이곳에서 살다가 여기서 가족을 만들고, 이 땅에 묻히게 되는 건 아닐까.

지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아지면 나도 이윤호 씨처럼 돌아가지 않는 걸 선택할 수도 있을까.

서울에 돌아가면 내 눈은, 설마 다시 안 보이게 되는 건 아니겠지.

만약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서울 병원에 있는 내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 * *

수지와 작별하고 하이옌을 떠난 제이든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포잉, 포잉, 포오잉.”

포이가 어리광을 부리며 제이든의 귀를 간질였다.

말을 몰고 있는 제이든이 생각에 잠겨 있느라 반응을 보이지 않자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린 포이가 쪼르르 그의 몸을 타고 내려가 아실리에게 치근덕거렸다.

-제이든, 왜 그렇게 말이 없어?

포이의 이마를 핥으며 달래 준 아실리가 제이든의 무릎에 앞발을 올리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 뭐 생각 좀 하느라고.”

한 박자 늦게 제이든이 대답하자 아실리는 초록 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고르릉거렸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그래, 고마워.”

제이든은 한 손으로 고삐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골골거리는 고양이와 토끼의 머리를 쓸면서 생각했다.

가릉빈가문 수막새는 제이든을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매개체고, 그 매개체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이든이 처음 눈을 뜬 그 동굴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 동굴이 있는 아스토시엔 산,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는 지금 그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제이든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또 가슴이 두근거리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미친 듯이 말을 급히 몰아서 빨리 돌아가고 싶기도 했고, 한없이 천천히 가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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