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7화
45. 수상한 음식점(4)
윤호에게는 아실리와 같은 안내자가 없었기에 그는 처음에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이세계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고 어딘가 외국에 떨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항구의 사람들이 바닷가에 쓰러져 있던 윤호를 구해서 마을에 데려갔지만 그가 계속 한국이니 서울이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자 풍랑에 떠내려온 소년이 기억까지 잃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딱하게 여겼다.
촌장과 주민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했고 마을의 일을 거들며 살게 해 주었지만 윤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게 된 것은 꽤나 시일이 흐른 후였다.
윤호가 어느 정도 이쪽 세계에 적응한 후, 그가 불도 잘 다루고 음식 솜씨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마을의 요리사가 그를 제자로 삼아 돌봐주었다.
당시엔 동방 대륙과 카이엔과의 교역이 끊기지 않았을 때라 항구에 카이엔 대륙에서 오는 배가 종종 들어왔다. 서방 사람들을 보며 윤호는 생각했다.
‘카이엔 대륙이라는 곳에 가면, 거기는 지구랑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생긴 걸로 보면 서양 사람들 같은데, 유럽이라든지 그런 데랑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몇 년 후, 요리사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윤호는 무역선의 선상 요리사 일을 얻어서 카이엔으로 떠났다.
긴 항해 끝에 하이옌 항구에 도착한 윤호는 카이엔 대륙 역시 지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체념하고 온전한 카이엔인으로 살기로 했다.
몇 년간 모은 돈으로 작은 음식점을 내고, 동방풍의 음식을 팔았다.
동방 대륙에서 배운 음식 외에도 한국식 요리를 섞어 만들었기에 독특하고 독창적인 요리를 파는 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몇 가지의 한국 요리를 섞어서 팔았던 것은 다른 식당과의 차별화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이 음식을 알아보는 사람, 그처럼 차원을 넘어 온 사람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었다.
차원 이동 이야기를 했다가는 정신병자로 몰리거나 마법 치료를 받게 될까 봐 자신의 이야기는 숨겼다.
식당은 번창했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착실하게 사는 동안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식당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호는 아무래도 이 세계에 자신 외의 다른 차원 이동자는 없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방 대륙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골동품 상인이 그를 찾아왔다.
“이거 어때요? 어렵게 입수했는데 진짜 좋은 물건이거든요. 내가 다른 데 가져가기 전에 리 씨부터 보여주려고 들고 왔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는 용입니다. 옛적 센의 왕이 부적처럼 머리맡에 놓고 잤다는 용이에요.”
골동품상이 보여 준 것은 큼지막한 수정구였다. 상아로 만든 받침대 위에 투명한 수정구가 올라앉아 있고 그 안에는 눈 덮인 산꼭대기 위에 날개를 접고 앉은 황금 용이 있었다.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용은 머리 위의 뿔부터 몸의 비늘 하나하나, 실오라기 같은 발톱까지 극히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받침대는 흠집이 많았고 한쪽 모서리가 깨어졌으며 수정구의 표면도 탁하고 자잘한 균열이 여러 군데 있었다.
수정구와 받침대의 연결 부분은 불그스름하게 변색한 것이 피라도 물든 것처럼 보기 안 좋았지만 안쪽의 풍경과 황금 용은 말짱해 보였다.
상인이 수정구를 들고 흔들어 보이자 수정구 안에서 눈보라가 화르르 일면서 황금 용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허! 잘 만들었네!”
눈보라가 가라앉은 뒤 다시 한번 흔들자 이번엔 바다가 나타났다.
“마법으로 만든 거지요?”
“그렇죠. 대마법사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 같은 골동품상이 다룰 물건은 아니에요.”
“근사한 물건이긴 한데…….”
“원래 이 수정구는 센의 왕실 유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골동품상이 수집한 물건이에요. 그런데 작년에 그 사람이 사고로 죽었답니다. 그 아들 되는 사람은 골동품에 흥미가 없어서 수집품들을 다른 이에게 팔았는데 그때 흘러나온 걸 제가 용케 샀습지요.”
“흠, 그렇군.”
“수도에 가서 팔면 훨씬 더 비싸게 팔 수 있는데 제가 리 씨에게 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갖고 온 겁니다. 이거 처음 소유자가 센의 젊은 왕이었는데 후계자가 아니었는데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에 용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게 이 용이라는 말도 있고. 리 씨야 지금도 성공하셨지만요. 이거 하나 들여놓으시면 사업이 더 번창할 겁니다.”
“에이,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장식품인데. 나중에 갖다 붙인 이야기겠지.”
수정구를 도로 밀어 놓으려던 윤호가 멈칫했다.
용의 푸른 눈이 그를 힐끔 쳐다본 듯했던 것이다.
“……숨겨진 마법이 있다는 말도, 리 씨, 제 말 듣고 있어요?”
입에 기름을 바른 듯 말을 늘어놓고 있던 상인은 윤호가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수정구 속의 용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미안하오. 잠시 딴생각을 했소. 그래, 얼마라고?”
윤호가 생각했을 때 골동품상이 부른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왠지 이 용의 수정구를 꼭 사야 할 것 같았다.
골동품상은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받고 만족스럽게 돌아갔고, 수정구는 윤호의 침대 머리맡에 놓였다.
몇 달 후, 윤호는 침대의 위치를 바꾸려다가 수정구를 잘못 건드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쿠쿠!”
용케 몸을 날려 수정구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내었다.
“어휴, 다행이다.”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걸 보면 내구성이 강한 물건이라 바닥에 떨어진다고 깨지진 않겠지만 또 모를 일이지.
그동안 계속 견뎌왔던 것이 한 번의 충격으로 파사삭 깨질 수도 있지 않나.
수정구를 제자리에 놓으면서 손이 따끔해서 보니 손가락을 베어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받침대의 깨진 부분에 긁혔나 하면서 꾹 눌러 지혈을 하고 잊어버렸다.
그날 밤 윤호는 꿈을 꾸었다.
“차원의 교차로에 빠진 자로군.”
동굴처럼 낮게 울리는 음성이 윤호의 머리에 울렸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 목소리가 윤호의 귀를 찔렀다.
“다시 묻는다. 내게 피를 먹인 자여. 원하는 것이 있느냐?”
꼭 대답을 해야 할 듯한 무게가 윤호의 무의식을 짓눌렀다.
“제,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대답했다.
“차원의 교차로가 열리는 곳에서, 너와 함께 온 것에게 피를 먹여라.”
차원의 교차로가 열리는 곳이 어디람.
꿈속에서도 윤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튼 예언이라는 것들은 이렇게 애매모호하다.
그때 윤호의 눈앞에 산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 그리고 줌으로 당긴 것처럼 산길이 눈앞으로 지나가더니 숲과 작은 폭포가 있는 계곡의 풍경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분명히 처음 보는 곳인데, 누가 알려주는 것처럼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너와 함께 온 것이 너를 돌려보내는 열쇠다.”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사라졌고 윤호의 의식도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윤호가 잠에서 깨었을 때 수정구는 병아리가 깨고 나온 알처럼 쪼개져 있었다.
그리고 용의 미니어처는 사라지고 없었다.
방을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황금 용은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네. 떨어뜨렸을 때 깨지지도 않았는데, 밤에 누가 들어와서 수정구를 깨고 용만 가져갔을 리도 없고.”
간밤에 꾼 꿈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설마 그게 진짜 일어난 일이었을까?
그날 식당에 나가서 주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벽 한쪽에 부적처럼 걸어 놓은 식칼이 윤호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 그 칼을 샀을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 위해 걸어 놓은 것인데.
“나와 함께 온 것이라면……, 저 식칼이 아닐까?”
꿈속에서 본 장소에 찾아가서 저 칼에 내 피를 먹이면 된다는 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윤호는 오래도록 식칼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계속 흘렀고, 윤호의 귀밑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여우는 죽을 때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죽어서도 고향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데, 그래서인가, 나이가 들수록 식칼을 바라보는 날이 잦아졌다.
그리 좋은 일이 있었던 고향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득해진 어린 시절이지만, 춥고 배고프고 아팠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도……, 그리웠다.
“할아버지!”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와 그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수지야, 주방에서 뛰면 안 된다고 몇 번 말하누?”
“에헷!”
소녀는 할아버지의 허리춤을 감싸 안으며 영민한 눈을 반짝였다.
“할아버지, 닭꼬치 해 주세요. 할아버지 비법 양념으로요. 수지는 새로 배운 과자를 만들어 드릴게요.”
“또 지난번처럼 숯덩이를 먹게 하려고?”
“아니에요. 이번엔 진짜 맛있게 만들 수 있어요.”
소녀는 할아버지의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를 꼭 끌어안았다.
“할아버지, 어디 가시면 안 돼요. 네?”
“…….”
“수지 두고 어디 안 가죠? 할아버지?”
윤호는 몸을 굽혀 손녀를 껴안았다.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볼이 그의 거칠어진 뺨에 맞닿았다.
그는 손녀를 안은 채 식칼이 걸려 있는 벽에 등을 돌렸다.
그래, 내 집은 여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여기 있고 내 일도 여기 있어.
“어디 보자. 아가, 닭꼬치는 맵게 해 줄까? 순하게 해 줄까?”
* * *
“기억나네요. 그런 일이 있었죠.”
수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아직 어렸지만, 그맘때의 할아버지는 왠지 마음이 붕 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어디로 훌쩍 가버릴 사람처럼. 그래서 눈만 뜨면 기를 쓰고 할아버지를 쫓아다녔죠.”
제이든이 윤호의 식칼을 쓰다듬자 아실리가 조금 불안한 듯 야옹거렸다.
-이게 그 매개체야? 제이든이 찾고 있던 매개체?
제이든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은 윤호의 매개체다. 아마 윤호를 그들의 차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물건이었겠지만, 제이든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제이든은 다른 매개체를 찾아야 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혹시 이런 기와를 보신 적 있으신지요?”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그린 스케치북을 수지에게 보여 주자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 적 있어요. 이거, 그쪽에서 온 거죠? 할아버지랑 제이든 씨가 온 곳.”
“정말입니까? 어디서 보셨어요?”
제이든이 반색을 하자 수지가 웃었다.
“할아버지도 그 기와를 보고 엄청나게 반가워하셨는데. 지금 제이든 씨처럼요.”
“예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일이었어요. 그때는 항구가 폐쇄되기 전이라 선박도 많이 다녔지요.”
어느 날 용오름에 휘말렸던 선박 하나가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항구에 들어왔다.
“굉장했다니까, 항구 근처여서 다행이지 먼바다에서 만났으면 뼈도 못 추릴 뻔했소. 연이 되어 하늘에 떠다니다가 나중에 둥둥 떠다니는 판자때기로 돌아올 뻔했다오.”
선장의 너스레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뜯겨나간 갑판 위에는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비롯해 장화, 옷가지, 어딘가의 집에서 통째로 떨어져 나온 듯한 창틀, 가구의 일부 등 온갖 잡동사니가 다 널브러져 있었다.
“그만하기 다행이야. 저기 화이트샌드 쪽에서는 용오름에 황소가 날아갔다던데.”
“에끼, 아무리 그래도 황소가 날아갔을라고.”
“아 진짜야. 옆 마을에 가서 떨어졌다니까. 그런데 다행히 죽진 않았다더군.”
선박의 갑판 위에 흩어진 물건들은 대체로 쓰레기에 가까운 잡동사니였지만, 혹시라도 뭔가 쓸 만한 물건이 있을까 싶어 동네 잡화상과 골동품상이 살펴보러 올라갔다.
“그때 우리 마을에 왔던 여행객들 중 시계 장인이 한 분 계셨거든요.”
수지가 말을 이었다.
“그분이 그런 잡동사니에 관심이 많아서 같이 배에 올라갔었는데 그 기와를 찾으셨지요.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기와인데 의외로 멀쩡하다고 다들 놀랐답니다.”
#작가의 말
여담이지만 1980년 7월 경남 사천 지방을 통과한 내륙성 용오름에 황소가 휩쓸려 올라가 20m 높이까지 날아다니다 떨어졌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놀란 황소가 나흘이나 밥을 못 먹었는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