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64화 (164/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4화

45. 수상한 음식점(1)

제이든은 주머니에서 레일라의 머리를 묶었던 리본을 꺼냈다.

독특한 색감의 실로 깃털 문양의 수를 놓은 리본.

이 리본은 오래전 아레시아라는 이름의 소녀가 루시나 새에게서 선물 받은 깃털에서 뽑은 실로 짠 리본이었다.

제이든은 아까 본 환각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했다.

은발을 곱게 빗어 내린 노부인이 담요를 가슴까지 끌어올린 채 창가의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침대 옆에 걸린 새장의 꼭대기 부분에 묶여 있는 리본이 보였다.

노부인은 여러 개 겹쳐 놓은 베개에 졸린 듯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 질 녘인지 석양이 창밖에 가득 펼쳐지는데 노을 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왔다.

새를 발견한 노부인이 미소를 지었고 여명의 하늘 같은 날개를 가진 새는 미끄러지듯 날아들어 와 날개를 접더니 부드럽게 노부인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노부인은 새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들었지만 기력이 달리는지 손을 다 들어 올리지 못했고 새가 대신 그녀의 가슴에 제 가슴을 가져다 댔다.

새는 머리를 그녀의 턱 밑에 딱 붙이고 가슴에 기대어 서로의 심장 소리를 나누었다.

평화롭게 잠든 노부인의 숨소리가 점점 얕아졌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넘어가고 방이 어두워졌지만 새와 노인은 함께 잠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여명의 보랏빛이 방을 비추기 시작할 때, 새가 머리를 들었다.

억지로 떨어지듯 노부인의 가슴에서 몸을 일으킨 새는 몇 번이나 그녀의 잠든 얼굴에 머리를 비빈 후 결심한 듯 날개를 펴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침 해가 뜨는 하늘로 날아갔다.

낡은 새장 꼭대기에 매달린 리본이 인사라도 하듯 팔락였다.

* * *

세월이 흐르고 사람은 떠났고, 루시나 새는 자연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 새도 지금쯤은 다시 그 사람과 함께일지도.

제이든은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바니가 들고 있는 새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오래전 그 소녀와 한 마리의 새가 함께 했던 날들, 새장이 담고 있는 다정한 기억.

“제이든 씨, 무슨 생각을 하세요?”

바니가 툭 치는 바람에 정신이 들어 보니 어느새 레일라의 집에 다 와 있었다.

아니, 집은 아니고 양조장 뒤의 헛간이네.

제이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엉성한 헛간에서 이제 열두어 살 되는 여자애가 산다고?

“진짜 집은 아니에요.”

레일라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아빠랑 저는 일 주는 곳을 따라서 여행을 하거든요. 여기 묵은 지는 한 달 좀 안 됐어요. 아빠는 여기 양조장에서 일하고, 저는 꽃도 팔고 바느질도 해요. 음식도 하고.”

“애가 아직 어린데 손끝이 아주 여물어요.”

바니가 레일라를 대견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요만할 때부터 바느질을 했는데 레일라는 그때 저보다 더 솜씨가 좋아요. 얘는 재능이 있어요.”

“엄마한테 배웠어요. 엄마는 할머니한테 배웠대요.”

레일라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면서 말했다.

“정말 잘해요. 얘가 바느질한 걸 제가 그냥 사준 게 아니에요. 충분히 판매 가치가 있어서 산 거지. 조금만 잘 배우면 자수도 바느질도 한 사람 몫을 할 건데.”

“나 베도 짤 줄 알아요.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는 집에 베틀도 있었는걸요.”

칭찬을 받은 레일라가 눈을 빛내면서 생글 웃었다.

“옛날에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베 짜는 걸로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그랬어요.”

“이 리본도 그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물려주신 거고?”

“아마 그럴 거예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뒤쪽으로 양조장 쪽에서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터덜터덜 나타났다.

레일라의 아버지인 막스는 의외로 얌전해 보이는 인상에 몸집도 작고 호리호리한 사람이었다.

술만 먹으면 뭐든지 다 팔아 버린다고도 하고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품팔이로 떠돌아다니며 어린 딸이 삯바느질에다 꽃팔이를 하게 만드는 걸로 봐서는 몰상식하고 덩치가 큰 술고래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이거 참,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는 제이든과 바니에게 몇 번이나 깊이 머리를 숙였다.

“딸아이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새장값은 제가 벌어서 꼭 갚겠습니다.”

“아니, 새장값은 이미 따님의 리본으로 받았습니다.”

“아빠가 술을 안 마셔야 돼. 술 마시면 누가 뭘 달라고 하든지 다 줘 버리잖아요!”

레일라가 야무지게 나무랐고 막스는 제 몸의 반도 되지 않는 딸에게 머리를 숙였다.

“진짜 미안하다. 레일라. 내가 이 버릇을 고쳐야 할 텐데.”

“벌써 몇 번째예요? 엄마 베틀도 팔고, 할아버지 밭도 그 나쁜 아저씨한테 말도 안 되게 팔아버려서 이렇게 여기저기 다니게 됐는데 내 새장까지! 내가 이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아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자 애 아빠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이거 겨우겨우 찾아왔는데, 아빠 못 믿겠어. 술 먹으면 또 팔아버릴까 봐. 저번에도 그랬잖아! 집도 없는 사람이 새도 없는데 새장을 뭣 하러 갖고 다니냐고 팔라고 하니까 팔아 버렸잖아!”

“아빠가 잘못했어. 레일라, 아빠가 잘못했으니까.”

진땀을 흘리는 막스에게 바니가 툭 던지듯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레일라를 저희 집에 보내시면? 안 그래도 일손이 좀 모자라던 참이니 저희 집에서 일을 거들게 하면 좋겠어요. 바느질을 잘하니까 조금만 배우면 제 몫을 할 거예요. 물론 일한 만큼 돈도 제대로 챙겨 줄 거고요.”

울음을 뚝 그친 레일라가 바니의 얼굴을 봤다가 제 아빠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봤다.

“괜찮을지…….”

막스가 망설이면서 딸을 내려다보자 레일라가 두 손을 모아 잡으면서 외쳤다.

“나 갈래. 아빠, 나 갈래요. 바니 언니네 좋아. 나 바느질 잘할 수 있어요. 아줌마가 해준 수프도 맛있고 바니 언니네는 토끼도 있어.”

신이 났던 소녀는 제 아빠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미안한 듯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막스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내가 자주 올게, 아빠. 내가 열심히 일해서 빵도 사 오고 감자랑 고기도 사 오고.”

주춤 말을 멈췄던 레일라는 자신 없는 듯 말을 고쳤다.

“음, 고기는 못 사 올지 모르지만 빵이랑 감자는 꼭…….”

“아니다. 레일라, 아빠한테 뭐 안 사 와도 돼.”

막스가 꽉 잠긴 목소리로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더니 바니를 향했다.

“제가 애를 고생시켜서……, 애가 이렇게 어린데 제 걱정만 하네요. 저한테 있는 것보다 바니 씨한테 가서 일 배우는 게 훨씬 낫겠지요. 먹는 거나 자는 것도 그렇고, 염치없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애가 철도 들었고 제 엄마 닮아 손도 야무지니까 데리고 계실 만할 겁니다.”

그는 풀죽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여기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레일라 몫으로 보내겠습니다.”

“저, 막스 씨.”

제이든이 살짝 끼어들었다.

“레일라는 이렇게 아빠 따라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바니 씨한테 가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막스 씨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예? 아니, 전 아픈 데가 없는데요.”

“술 자주 드시고, 술 드시면 온전한 판단 하시기 어렵고 취중에 남이 시키는 말 뭐든지 따르고 그러신다면서요. 유품이건 뭐건 다 팔아 버리시고. 그게 아픈 겁니다.”

제이든은 냉정하게 딱 잘랐다.

“따님 생각하셔서 치료받으세요. 그래야 다시 같이 사실 수 있어요.”

스케치북을 꺼낸 제이든이 몇 마디 적은 뒤 종이를 북 찢어서 막스에게 내밀었다.

“여기 찾아가 보세요. 이베스에 사는 약제사 시오나 아이리스 씨입니다. 제가 따로 비둘기를 보내서 말을 전해 둘 테니, 제이든 로스가 보냈다고 하시고요. 그분이 이런 쪽으로 아주 탁월하니까 호되게 굴려서 몸 안의 독소를 싹 빼줄 겁니다.”

몸뿐 아니라 정신의 독소도 빼주겠지.

시오나가 막스를 족칠 모습이 눈에 선했다.

“꼭 가시는 겁니다. 알겠죠?”

막스는 본성이 얌전하고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라, 쭈뼛거리면서도 순순히 제이든이 건네주는 쪽지를 받았다.

제이든은 속으로 살짝 혀를 찼다.

알콜 중독자는 사납고 거친 사람들이 많다고들 생각하지만, 막스처럼 온순하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중독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막스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치이는 삶을 살아왔을 것 같았다. 남의 말에 휘둘리고 남이 시키는 일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런 자기 자신이 싫어서 술로 도피한다.

그런 경우 취중에 본래의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인격이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막스는 취해도 남의 말에 잘 따르는 형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누가 술을 먹이고 사기를 치거나 무리한 일을 시켜도 금방 넘어가 버리면서 주위에 이용당하는 것이었다.

“아빠, 꼭 가야 해요. 약속해요. 이번엔 진짜 가서 치료받고 와요. 그래서 나랑 같이 살아요.”

레일라의 간절한 눈을 바라보던 막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이와 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었다.

“이번엔 진짜죠? 진짜 약속한 거죠? 안 어기는 거죠?”

몇 번이나 다짐한 레일라가 제이든 쪽을 휙 돌아보더니 배꼽에 손을 올리고 꾸벅 몸을 굽혔다.

“오빠, 고맙습니다!”

호칭이 아저씨에서 오빠로 바뀌었다!

제이든은 흐뭇해져서 레일라의 머리를 토닥토닥 쓸었다.

그럼, 그럼, 나 아직 이십 대인데 아저씨는 너무했지.

* * *

“포잇, 포잇!”

“잠깐 기다려 봐. 포이, 지금 읽어 볼게.”

우편국에서 나온 제이든이 마차에 오른 뒤 방금 전해 받은 서신을 정리했다.

“막스 씨는 이베스에서 치료 잘 받고 있대. 시오나 씨가 알콜 중독을 고치고 정신 개조까지 해서 보내겠다고 의욕이 활활 불타고 계시네. 약초 캐는 거랑 이것저것 일도 시키는데 생각보다 시키는 일을 잘한다는데?”

-다행이다. 나 그 레일라라는 아이 마음에 걸렸는데.

아실리가 햇살 아래로 몸을 쭉 펴고 기분 좋게 고릉 고르릉 소리를 냈다.

봄이 한창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 다가오는지 햇살이 제법 뜨거워졌다.

“레일라는 바니 씨 댁에서 잘 지내고 있나 봐. 그 댁 가족들이 막내딸처럼 귀여워한다는데. 정말 잘 됐다. 바느질 솜씨도 일취월장했다고 하고. 그리고 이것 좀 봐.”

제이든은 작게 접힌 종이를 펼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다.

새장 안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당근을 끌어안은 채 누워 있는 아기 토끼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언젠가는 꼭 새를 키우고 싶지만 일단은 미미가 놀이터로 쓰고 있다네.”

“포잇, 포이잉!”

포이가 그림을 보고 깡충거리며 뛰었다.

“그래, 내 생각에도 언젠가는 그 새장을 찾아오는 새가 있을 것 같아.”

제이든은 편지를 접어서 정리한 뒤 가슴을 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서 희미한 짠물 냄새가 느껴졌다. 바다가 가까운 모양이다.

“자, 드디어 하이옌 항구에 왔어. 그 동방 음식점부터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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