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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63화 (163/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3화

44. 백 가지 새(8)

네리아 부인이 베틀에서 머리를 들고 걱정스럽게 아레시아 쪽을 주시했다.

길쌈 솜씨야 누구라도 인정하는 아레시아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없고 나이가 어렸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잃은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게다가 성격이 급한 리디아를 비롯해 경험이 없는 참여자들 몇 명은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흔들리는 것도 보였고.

지금도 아레시아가 손을 멈추고 머리를 숙인 채 짜던 명주를 들여다보고 있자 일사불란하던 주위의 베틀 소리가 박자를 잃고 흐트러진 게 들렸다.

이대로라면 아레시아뿐 아니라 남쪽 모둠 전체의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었다.

‘한번 다잡아 줘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극복하게 그냥 둬야 할까?’

잠시 일을 멈추고 다들 모이게 해서 한번 고삐를 당겨 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아레시아가 무슨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들고 위쪽을 쳐다보았다.

경연장을 덮은 흰 천막 위로 어른어른 뭔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비쳤다.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였지만 구름치고는 형태가 작고 수가 많았다. 새떼가 지나가는 건가?

한 마리의 새가 오후 햇살에 날개를 빛내며 경연장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삐루루루”

방울을 굴리는 듯한 울음소리가 아레시아를 향해 다가왔다.

“루리!”

아름다운 보라색 날개를 펼친 새가 아레시아의 머리 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루시나! 루스렌키아 여신의 전령이다!”

새를 숭상하는 도시 에테노리움의 관리답게 한눈에 루리를 알아본 수석 관리관이 입을 딱 벌렸다.

루리가 아레시아의 머리 위에서 홰를 치자 보라색 날개깃 하나가 마치 꽃잎이 떨어지듯 베틀 위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삐루루루!”

루리가 다시 한번 높이 지저귀자 천막 위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들이 줄지어 경연장 안으로 날아들어오기 시작했다.

흰 새, 푸른 새, 붉은 새, 보랏빛 새, 온갖 색의 깃털을 반짝이며 수십 마리의 새들이 마치 석양에 오색으로 빛나는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베 짜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흘러들었다.

아레시아의 베틀 위로 봄날 산들바람에 벚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늘하늘 깃털이 떨어졌다.

한 잎 두 잎씩 깃털을 떨어뜨린 새들은 경연장 안을 크게 선회한 뒤 다시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루리 하나만 남긴 채.

사라지는 새들을 향해 고맙다는 듯 날개를 퍼득인 루리는 아레시아의 베틀 꼭대기에 앉아서 의기양양하게 삐루루루 목소리를 높였다.

아레시아가 얼떨떨한 채로 베틀 위에 떨어진 깃털들을 바라보자 루리는 답답한 듯 베틀 꼭대기에서 몇 번 깡충거리며 홰를 쳤다.

얼른 주우라는 듯이 삐루루거리는 루리를 본 아레시아가 천천히 깃털을 주워 모았다.

양 손 가득 깃털을 쥔 그녀는 루리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마워, 루리, 내 생각을 해준 거구나?”

“삐루루!”

큰일 해냈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편 루리가 아레시아의 어깨 위로 깡충 건너오더니 부리로 그녀의 귓전을 콕콕 찍었다.

“그……, 아레시아 양 새인가요?”

수석 관리관이 다가와서 물었다.

경연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예, 제 친구이긴 한데요.”

“루, 루시나인데요?”

“새끼였을 때 죽어가는 걸 산에서 주워 와서…….”

수석 관리관은 커다래진 눈으로 계속 루리를 보다가 겨우 목소리를 다듬었다.

“큼, 아무튼 새가 경연장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만.”

“죄송합니다. 사실 집에 두고 왔었는데 어떻게 절 찾아왔더라고요.”

아레시아는 머리를 꾸벅 숙였지만 어깨에 앉아 있던 루리는 반대로 가슴을 쫙 폈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듯 위풍당당하게 머리 볏과 목덜미 털을 부풀리는 루리를 보면서 관리관이 다시 말을 더듬었다.

“그, 저, 그럼 다른 새들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루리, 네가 데려왔니?”

“삐루!”

관리관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믿기 어렵지만 그런 것 같네요. 피니어스와 루시나는 새들을 이끈다더니!”

관리관은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제 눈으로 봤는데도 믿어지지 않네요. 마치 옛이야기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푸른 매 피니어스의 명에 따라 백 마리 새들이 마류시카에게 깃털을 한 장씩 주었다는 게 옛날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 줄은.

그는 깃털을 모으고 있는 아레시아와 루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 루시나 새가 마치 아레시아 양이 어려움에 처한 걸 알고 도와주려고 한 것 같네요.”

“저보고 기운 내라고 한 거겠죠.”

아레시아는 생긋 웃었다.

“몇 년이나 함께 살았더니 서로 기분이나 몸 상태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됐거든요. 그래도 이런 것까지 챙겨줄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그녀는 루리의 등을 어루만졌다.

“덕분에 기운이 났어요. 이 깃털을 여기서 쓸 수는 없지만 힘내서 명주를 마저 짜보도록 할게요.”

그때 누군가 차분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어쩌면 쓸 수 있을지도 모르죠.”

“카나 씨?”

카나 웨일스가 어느새 다가와서 관리관 뒤에 서 있었다.

웅성거리는 다른 참여자들과 달리 그녀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였다. 표정만 보면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에테노리움에는 세테니아의 물레가 있잖아요? 실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요?”

“카나 씨! 왜 그런 말을 해주…….”

카나의 뒤에서 펄쩍 뛰던 갈색 머리 여자가 카나의 눈총을 받고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있는 실로 할게요.”

아레시아가 손사래를 쳤다.

전혀 베를 못 짤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안 그래도 경연이 어수선해졌는데 여기서 세테니아의 물레까지 들어오면 논란의 중심이 될 게 뻔했다.

“루리, 숙소에 가 있어.”

“삐루루.”

“얼른!”

루리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아레시아가 엄격하게 말하자 마지못해 날개를 펴고 밖으로 날아갔다.

“관리관님, 다들 경연을 계속하도록 해 주세요. 저 때문에 소란스러워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자, 다들 정숙하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아레시아의 말을 들은 관리관이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다시 베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아레시아도 다시 명주 짜기에 집중했다.

아까는 거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베틀 한쪽에 모아 둔 깃털 묶음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루리가 이렇게까지 응원해 줬는데 열심히 해야지.

* * *

그날 밤으로 피니어스의 백 마리 새 전설이 재현되었다는 소문이 에테노리움 전역을 강타했다.

덕분에 다음 날 심사를 앞둔 경연장 주변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사실 루리를 따라 경연장에 들어왔던 새들은 이십여 마리에 불과하지만 마치 백 마리 새가 깃털을 떨구고 것처럼 소문이 돌았다.

하기야 열 마리든 백 마리든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경연장 안에는 각 모둠별로 제출한 베가 나란히 쌓여 있었고 정해진 심사위원 외에는 출입할 수 없었지만 바깥의 사람들은 이미 반쯤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하루 동안의 심사 끝에 결과적으로 우승은 아레시아가 소속된 남쪽 편이 가져갔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데다 들쭉날쭉한 사람들 없이 모두 실력이 고르고 아레시아의 깃털 문양과 네리아 부인의 세마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아레시아가 새들의 깃털을 받은 것이 마치 에인테세나 여신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여겨서 그녀가 개인 우승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례적으로 긴 시간의 토의 끝에 개인 우승은 결국 서편의 시리오네에게 돌아갔다.

아레시아는 내심 마음을 놓았다. 루리가 새들을 데리고 왔던 게 오히려 심적 부담이 컸었다.

중간에 안정을 잃는 바람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우승했다면 오히려 떳떳지 못했을 거였다.

‘내년도 있고 그 다음 해도 있지. 더 열심히 노력해서 꼭 내 실력으로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보고 말 거야.’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주는 것은 영주의 부인인 리사 데상티오 백작부인이었는데, 그녀가 카나와 시리오네, 아레시아를 따로 불렀다.

“세 분의 작품은 모두 너무 훌륭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한 분을 뽑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본인도 뛰어난 직조인인 백작부인은 미소를 띠며 세 사람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올해는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지요. 마치 옛 전설의 재현과 같은 신비로운 일이 있었으니, 에테노리움에 여신의 축복이 내렸다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레시아를 향했다.

“올해의 축제, 그 시작을 그대가 열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세테니아의 물레를 이십 년 만에 꺼내 보려고 합니다. 한번 해보시겠어요?”

망설이는 아레시아에게 백작부인이 힘을 주듯 말했다.

“깃털에서 실을 뽑아낼 수 있다면 아레시아 양에게 피니어스의 날개옷 관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번 경연에서 억울한 부분도 있으셨을 테니.”

카나 웨일스가 아레시아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설마했는데, 실에 손을 댄 것이 북쪽 모둠의 사람인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속한 마을로 연락이 가겠지만, 다시는 경연에 참여하지 못할 거예요.”

아레시아는 저절로 갈색 머리의 여자를 떠올렸지만 의외로 실을 가져간 것은 그녀가 아니었고 거의 존재감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

“동기는…… 하, 제 우승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였다고 하더군요.”

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치 않는 추종자 때문에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합당한 조치를 받게 될 겁니다. 아레시아 양, 물레를 써 보시겠어요?”

잠깐 머뭇거리던 아레시아가 백작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새의 깃털에서 실을 뽑아낼 수 있다는 세테니아의 물레가 보관소에서 경연장으로 날라져 왔다.

세테니아의 물레는 오랫동안 보관소에 잠들어 있던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작동이 잘 되었다.

루리와 다른 새들의 깃털은 어느 색실보다도 아름다운 자연의 색감을 지닌 색실을 뽑아내었고 아레시아는 그 실을 이용해 리본을 짜는 것까지 성공했다.

“고맙습니다. 아레시아 양. 덕분에 이번 경연이 정말 뜻깊은 행사가 되었어요.”

데상티오 백작부인은 직접 아레시아를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원래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관람하는 것은 개인 우승자에게만 허용된 특전이지요. 하지만 아레시아 양은 새들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니 백조군을 보실 자격이 있습니다.”

아레시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박물관 앞 계단을 올라갈 때 루리가 날아와 아레시아의 어깨에 앉았다.

“같이 들어가도 될까요?”

백작부인은 루리를 신기한 눈으로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렌키아 여신의 전령을 보는 것은 처음이군요.”

“삐루루!”

루리가 인사하듯 한쪽 날개를 살짝 들어 새벽 해처럼 붉은 속깃을 보여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새입니다. 그럼 들어갈까요?”

피니어스의 날개옷은 아레시아가 오랫동안 상상해 오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푸른 매 피니어스를 중심으로 옷 전체에 퍼져 있는 백 마리의 크고 작은 새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부리 끝부터 꼬리 끝까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전체적인 조화도 더할나위 없었다.

“하아, 진짜 이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 어렵네요.”

아레시아는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나도 이걸 처음 봤을 때 며칠이나 잠을 자지 못했답니다.”

“저도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계속 눈앞에 어른거릴 듯해요.”

“이 백조군은 직조인들의 꿈과 같은 존재죠. 이와 같은 옷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다시 없으리라고들 했지만.”

백작부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새들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나왔으니, 어쩌면 아레시아 양이 또 다른 날개옷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 *

경연 이후 새들의 축복을 받은 소녀, 아레시아의 이름은 점점 높아졌지만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레시아 양, 돈이라면 부르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루리는 자유로운 새예요. 원할 때 저를 찾아올 뿐 제 소유가 아니에요.”

“아니, 루시나를 이런 초라한 청동 새장에 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여신의 전령은 신전에 있어야지요.”

황금 새장과 값진 먹이를 든 부자들, 루스렌키아 여신의 사제까지 찾아와서 루리를 팔라고 권하거나 양도하기를 요청했다.

지친 아레시아는 데상티오 백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루리 역시 아레시아와 함께 사라졌고 마을은 겨우 잠잠해졌다.

그녀가 다시 마을에 돌아온 것은 몇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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