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62화 (162/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2화

44. 백 가지 새(7)

“우승하는 편 마을에는 실과 비단, 물레와 베틀, 곡물과 은전까지 상품이 정말 푸짐하다면서요?”

점심 식사를 끝내고 경연장에 돌아가는 길에 나이르 마을의 대표가 물었다.

“맞아요. 풍년이 든 해에는 상품이 더 후하지. 올해는 송아지도 한 마리씩 준다고 하던데.”

“마을에 큰 도움이 되겠어요.”

나이르 마을은 비교적 규모가 작고 마을의 살림도 그리 풍족하지 않아서인지 젊은 대표가 눈을 빛냈다.

“개인 우승자는 금전도 받고…….”

리디아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아레시아를 보았다.

“아레시아 정도면 우승을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어때? 아레시아, 금전도 받고 에인테세나 여신의 축복도 받고!”

“에이, 솜씨 좋고 경험 많은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손을 내젓던 아레시아가 수줍게 웃었다.

“우승하고 싶긴 해요. 다른 상품은 다 됐고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보는 게 어릴 때부터 소원이었거든요.”

“아아, 그 백조군, 정말 궁금하긴 하지.”

“새의 깃털로 어떻게 실을 뽑아 천을 짰는지, 옛날엔 마법이라고 했다면서요? 불가능한 기법이라고.”

“세테니아의 물레가 나오기 전에는 그랬지.”

에테노리움 박물관에 있는 피니어스의 날개옷 ‘백조군’은 백 마리 새의 깃털을 섞어 지었다는 옷이다. 그런데 옷은 남아 있지만 그 깃털에서 실을 어떻게 뽑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백조군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깃털 고운 새를 잡아 깃털을 직물에 섞어 보는 바람에 에테노리움과 카이에른 근교의 깃 고운 새가 씨가 마를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아무리 새의 깃털을 섞어도 다른 사람들은 피니어스의 날개옷 같은 질감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새의 깃털을 섞은 옷들이 여러 벌 있었으나 오직 백조군만이 피니어스의 날개옷이라는 이름하에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 사냥이 어찌나 심했던지, 마침내 황제가 직접 옷을 만들기 위해 새를 잡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고, 에트루리움은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박물관에 보관하면서 매와 다른 새들을 에트루리움의 상징으로 삼아 사냥하지 못하게 했다.

후세 사람들은 새의 깃털에서 명주실 같은 실을 뽑아내는 기법을 알지 못해서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지은 기법에 대해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마법이라는 설부터 새의 깃털이라는 건 전설일 뿐이고 사실은 새의 깃털을 닮게 염색한 명주실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백조군을 조사한 결과 백조군에 백 마리의 새를 직조해 넣은 실은 정말 새의 깃털 성분이 맞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새의 깃털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법을 연구했지만 백조군에 쓰인 것처럼 곱고 색이 고운 실을 뽑아내지 못해 잊혀진 기법으로 치부된 지 오래였다.

오십여 년 전, 에테노리움의 직조 명인 세테니아는 포기하지 않고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재현할 수 있는 기법을 연구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깃털에서 실을 뽑을 수 있는 물레를 재현해 냈다.

하지만 당시 에테노리움의 영주는 그 물레로 인해 옛날의 새 살상 돌풍 같은 일이 또 벌어질까 봐 세테니아의 물레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일반인은 세테니아의 물레를 소유할 수 없었고 특별한 경우에 허락받은 직인만이 관리관의 감독하에 물레를 사용할 수 있었다.

직인들로서는 굳이 그렇게 어려운 재료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세테니아의 물레는 결국 유물 비슷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레시아의 새 정도면 세테니아의 물레를 한 번 돌려 보고 싶은 충동이 들겠던데.”

리디아가 아레시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그 새 정말 아름답던데. 어때? 그 새의 깃털을 뽑아서 천을 짜보고 싶은 생각 든 적 없어?”

“루리 말이에요? 아니, 루리의 깃털을 뽑다니요. 천만에요.”

아레시아는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루리는 깃털이 잘 빠지지도 않아요. 그리고 실을 뽑는다면 양이 꽤 많이 필요할 텐데, 그렇게 깃털을 뽑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어요.”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좋아한다면서?”

“날개옷 보는 게 소원이지만 우리 루리 털 몽땅 뽑아서 짜 보고 싶은 건 아니라고요!”

“미안, 미안, 아레시아의 명주가 깃털 문양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아레시아는 그렇게 고운 색실을 어디서 구한 거야? 특히 그 보라색, 티리언 퍼플 맞지? 굉장히 비쌌을 텐데.”

“맞아요. 너무 비쌌어요. 그래도 꼭 쓰고 싶었거든요.”

아레시아의 시대에 가장 귀한 안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진한 청색 천연 안료로 그 이름과 같은 청금석(靑金石)에서 추출되는 안료였다.

또 하나는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 보랏빛 안료로 특정 지역의 바다에 사는 뿔고둥의 점액에서 추출되는 안료였다.

식물 등 다른 재료에서 추출된 청색이나 보라색도 있었지만 라피스 라줄리나 티리언 퍼플만의 독특한 색감을 흉내 낼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안료는 추출이 어려운 만큼 다른 색상의 안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티리언 퍼플은 1g의 보라색 안료를 얻기 위해 1만 마리의 고둥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아레시아는 이번 경연에서 쓰기 위한 실 염색을 직접 했다.

루리의 깃에서 영감을 얻은 깃털 무늬라서 그런 색감을 내고 싶었는데 시판되는 색실은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안료를 직접 조색했다.

큰맘 먹고 티리언 퍼플도 소량 구매해서 혹시라도 망칠까 손을 덜덜 떨며 색실을 염색했다.

직접 조색했기 때문에 색상은 마음에 들게 뽑을 수 있었지만 은사나 금사보다도 훨씬 고가의 색실이라, 꼭 필요한 부분에만 사용하는데도 얼마나 조심되는지 몰랐다.

“내가 보니까 네 새의 날개가 티리언 퍼플 못지않게 예쁜 보라색이더라. 그거 실로 뽑을 수만 있으면…….”

“안 뽑는다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리디아는 아레시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몰래 네 새를 훔쳐 가거나 그러진 않는다고. 그냥 세테니아 이름이 나오니까 물레 생각이 나서 그랬지.”

“어차피 그 물레는 일반인은 못 써요. 베틀로 만족하세요.”

세테니아는 물레뿐 아니라 베틀 제작의 역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현재 에테노리움 경연에서 쓰는 베틀도 세테니아가 개발해 낸 세테니아식 베틀이었다.

전통적인 베틀은 도투마리에서 풀려 나오는 날실을 잉아로 윗날과 아랫날로 나누면서 그 사이에 북으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조인다.

이 과정을 반복해가면서 베를 짜는데, 세테니아가 새로운 형식의 베틀을 개발해 냈다.

기본적인 형식은 같지만 세테니아의 베틀은 기능적으로 더 우수했고 무엇보다도 문양을 넣기가 훨씬 쉬웠다.

400~1,200개의 실을 자유롭게 끌어 올리고 원하는 대로 분할이 가능해서 무늬에 맞춰 날실을 끌어 올리고 그 사이에 씨실을 넣어 다채로운 무늬를 만들 수 있었다.

솜씨가 좋은 장인은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문양 외에도 마치 화폭에 그림을 그린 듯한 무늬를 직조해 내기도 했다.

원래 명주는 문양을 넣지 않고 짠 평직 견직물을 말하지만, 세테니아의 베틀이 나온 이후로 카이엔에서는 명주실로 짠 직물에도 다양한 문양을 넣기 시작하면서 단어의 의미가 다소 달라져서 문양이 있건 없건 다 명주라 부르게 되었다.

문양을 짜는 베틀이라 ‘문직기紋織機’라고도 부르는 세테니아식 베틀은 가격대가 좀 비싸서 초기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다가 차차 기능적 우수함이 돋보이면서 대부분의 직조인들이 베틀을 세테니아식 신형 직조기로 바꾸었다.

에테노리움 경연에서도 처음에는 전통적 베틀과 세테니아식 베틀을 병행해 쓰다가 차차 세테니아식 베틀로 모두 바꾸었고, 십여 년 전부터는 특별히 구형 베틀을 요청하는 참여자에게만 구형 베틀을 제공할 뿐 모두 세테니아식으로 쓰고 있었다.

예전에 실 잣기부터 경연이 시작되었을 때는 물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실 잣기가 경연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물레는 경연장에 나오지 않았다.

* * *

이미 짜 놓은 명주 4분의 1필 정도가 걸려 있는 베틀에 앉으려던 아레시아가 당황했다.

일어서서 베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레시아를 본 리디아가 물었다.

“왜 그래, 아레시아?”

“……실이 없어졌어요.”

“실이 없다고?”

리디아도 네리아도 당황하면서 아레시아 주변으로 모였다.

베틀에 감겨 있는 것 외에 옆의 실패에 따로 감아 둔 색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없어진 것 중 하나는 보라색이었고.

“아니, 경연장에 경비원과 관리관이 있는데 어떻게 실이 없어질 수가 있지?”

리디아가 바로 경비원에게 달려갔는데 관계자 외의 사람이 들어온 적은 없다고 했다.

실내를 지키고 있던 관리관 역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했고.

“하지만…….”

남쪽 구역을 지키고 있던 관리관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이 베틀은 통로 바로 옆에 있어서 혹시 누군가 잠깐 손을 댔어도 제가 놓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레시아의 베틀은 경연장에서 외부로 나가는 통로 바로 옆에 있어서 식사 시간이나 입, 퇴장 때 사람들이 그 옆을 지나다니는 자리였다.

“우리가 잘못했어. 다 같이 나갈 게 아니라 사람을 남겨 놨어야 했는데.”

경비원이나 관리관이 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개인 재료는 관리도 본인 책임인데.

몇 년 동안 한 번도 경연장 안에서 도난 등 사고가 난 일이 없어서 참여자도 주최 측도 안일했던 것이다.

“어머, 실을 잃어버렸다고?”

식사를 끝내고 경연장으로 들어오던 다른 마을 사람들도 수군거렸다.

“누가 가져갔다는 것 같은데.”

“간도 크다. 관리관들이 구역마다 있는데 어떻게 손을 댔지?”

“통로 옆자리잖아. 식사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고. 눈에 안 띄게 건드리려면 건드릴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소식을 들은 수석 관리관이 왔고 경비원과 관리관이 수색 및 조사를 시작하자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조사한다고 시간 빼면 일정 늦춰 줄 거예요? 큰 사고도 아니고 재료 분실인데.”

카나의 뒤를 따라다니던 갈색 머리 여자가 눈꼬리를 세우며 따졌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진짜 도난당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준비가 미흡했던 건지, 자기가 다른 데 두고 잊은 건지도 모르잖아요.”

“뭐라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리디아가 버럭 화를 냈지만 갈색 머리 여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잖아요. 원래 개인 재료는 본인 관리인 거 몰라요? 도난이라고 해도 따로 조사해야지, 지금 다 분초를 다투면서 베 짜는 사람들인데 시간 빼앗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분, 아까 베틀 옆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요.”

갈색 머리 여자를 손가락질한 사람은 첫날 앓아누웠다던 동편 마을의 대표였다.

그녀는 전날 베를 짜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하려고 점심도 먹지 않고 베를 짜는 중이었다고 했다.

“아까 남쪽 분들 아무도 안 계실 때, 그 베틀 옆에 서 계시지 않았어요?”

“잠깐 구경했을 뿐이에요. 카나 씨가 칭찬하셔서 궁금해서 그랬어요. 보기만 했다고요!”

갈색 머리 여자는 입을 삐죽 올렸다.

“뭐 괜찮긴 했지만 카나 씨 작품에는 따라올 수도 없던걸. 그리고 나만 구경한 것도 아니라고요.”

그녀는 다른 여자를 가리켰다.

“서편에서 온 사람이죠? 저 사람도 그 명주를 구경하는 걸 봤어요.”

경연장이 어수선해지자 수석 관리관이 아레시아에게 왔다.

“의논해 봤는데 일정을 늦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사는 따로 하겠습니다만 일단은 경연을 진행해야 할 듯하고요. 갖고 계신 다른 실이 없다면 준비된 실을 쓰시면 어떻겠습니까?”

경연장에는 주최 측에서 준비한 다양한 색실이 갖춰져 있지만 아레시아가 준비한 것과 비슷한 색실은 없었다.

티리언 퍼플은 너무 고가의 색실이라 갖춰놓지 않았고, 청색 역시 아레시아가 직접 조색해 염색한 색실과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저 때문에 피해를 보시면 안 되니까 다들 일단 시작하죠. 저도 있는 것으로 이어 짜 볼게요.”

시간 내에 정해진 수량을 다 짜야 했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다들 베틀에 앉았고 아레시아도 경연장에 준비된 색실 중 최대한 비슷한 것을 골라서 베틀에 걸었다.

두어 시간 열심히 짠 뒤 아레시아는 실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양을 낼 수는 있었지만 원래 생각했던 색감이 나오지 않아서 너무 아쉬웠다. 게다가 앞에 짠 명주와 실이 달라지는 바람에 통일감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도 신경이 쓰여서 아무래도 손놀림이 둔해지고 심리적으로 의욕도 떨어졌고.

‘새로운 문양이라 관심은 받겠지만 아무래도 올해 피니어스의 날개옷을 보는 건 어렵겠네.’

한숨을 쉬며 맞은편 북쪽 구역을 보는데 첫 줄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여자의 표정이 마치 고소해하는 듯 보여서 울컥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지.

아레시아가 다시 베틀에 손을 올렸을 때 ‘삐루루루’, 루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 말

작중 세테니아의 문직기(紋織機)는 프랑스의 재카드(Jacquard)가 발명한 재카드 문직기를 모델로 생각했습니다.

수천 년 전 페니키아 사람들이 티리언 퍼플 안료를 뽑아내었던 뿔고둥은 Murex brandaris 라는 고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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