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1화
44. 백 가지 새(6)
오전 9시, 주신 슈라의 사제와 직조의 여신 에인테세나의 여사제가 축복을 내린 후 에테노리움 영지의 관리관이 경연 시작의 횃불에 점화했다.
거대한 모래시계 위의 횃불에 불이 붙고 그 아래 모래시계에서 금빛 모래가 아래로 흐르기 시작하자 즉시 경연장 가득 베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모래시계의 모래는 48시간 동안 흐른다. 그 이후 심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64명의 참여자가 베틀 앞에 앉아 일사불란하게 베틀을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찰카닥 차륵! 찰카닥 차륵!
박자를 맞춰 울리는 베틀 소리와 직조인들의 움직임이 마치 거대한 공연을 보는 듯했다.
멀리서 사람들의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경연장 안에는 외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지만 기둥으로 구분된 경연장 바깥쪽, 일정한 거리 밖에서는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경연 모습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레시아도 부지런히 발판을 밟고 바디를 밀고 북을 움직였다.
그녀는 첫날 세마포 1필(18m)을 짜기로 했다.
세마포에는 특별한 문양을 넣지 않고 가는 삼실로 촘촘하고 곱게 짜는 것만 목표로 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조금씩 보거나 주변을 살피기도 했지만 금방 베틀에 몰입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집에서 쓰던 베틀이 아닌데도 손에 착 붙는 느낌이 좋았다.
찰카닥 차륵! 찰카닥 차륵!
베틀 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몰입한 아레시아의 손끝에서 고운 세마포가 매끄럽게 완성되어 갔다.
“어머나, 아레시아! 벌써 이만큼이나 짰어? 정말 손이 빠르구나!”
점심때가 되어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는데도 베 짜기에 몰입해 있는 아레시아를 일깨우러 왔던 리디아가 감탄했다.
“정말이네. 게다가 세마포 고운 것 좀 봐. 역시 조세피나 씨의 딸이 다르네.”
“자, 일단 점심을 먹고 몸도 좀 풀고 오는 게 좋겠어요. 일어납시다.”
식당은 경연장 바로 옆 숙소 일 층에 있었다.
경연장 안에는 물 외의 음식을 반입할 수 없기 때문에 식사는 꼭 식당에서 해야 했다.
“배고프지 않은데, 식사 안 하고 그냥 일하면 안 될까요?”
다른 마을에서 온 대표 하나가 네리아 부인에게 묻고 있었다.
아레시아처럼 이번에 처음 경연에 나온 사람으로 아레시아보다는 몇 살 많았다.
“조금이라도 먹어 두는 게 좋아요. 이틀 내내 베를 짜야 하는데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리아 부인이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면서 식당으로 이끌었다.
“처음 참여했을 때는 마음이 초조해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계속 일하고 싶고 그렇죠.”
수니도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보면 아레시아 양은 처음 나왔고 나이도 어린데 참 침착해요.”
식당 한쪽에 쭉 늘어놓은 긴 탁자 위에 준비된 음식은 훌륭했다.
주방에서 조리사들이 계속 음식을 조리해 내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식당에 와 있으면 경연장은 비어 있나요?”
아까 식사를 거르면 안 되냐고 물었던 나이르 마을의 젊은 대표가 물었다.
“경연장은 외부인 출입 금지고, 바깥쪽은 경비원들이, 안쪽은 관리관들이 지키고 있어요.”
수니의 대답을 들은 여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수프를 뜨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요. 빨리 경연장에 돌아가고 싶다고 급히 먹다가 탈 나면 그게 더 큰 일이야.”
네리아의 말은 바로 그날 저녁때 증명되었다.
동편 쪽에서 점심 먹은 게 탈이 나서 쓰러진 사람이 나왔던 것이다.
“역시 처음 나온 사람이래요. 어제 올 때부터 마차 멀미가 심했었대요. 에구. 얼마나 힘들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편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그쪽 모둠에 다녀온 리디아가 딱한 듯 혀를 찼다.
“나도 그 기분을 알거든. 나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한잠도 못 자고, 첫날 점심 먹자마자 체했지 뭐야. 그래서 내 몫을 다 못할까 봐 내 정신이 아니었어.”
그녀는 아레시아에게 따뜻한 눈길을 던졌다.
“그때 너무 아파서 결국 내가 맡은 몫을 다 못 짰는데 아레시아 양 어머니, 그러니까 조세피나 씨랑 여기 네리아 아주머니가 밤에 잠도 못 주무시고 내 몫까지 다 짜 주셔서 결국 우리가 우승했지.”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우승 못 했으면 다 내 책임이라서, 나 다시는 경연에 못 나왔을 거야.”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 아레시아 양이 왔길래 내가 꼭 힘이 되어 주려고 했는데…….”
리디아는 주먹을 풀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우는 시늉을 했다.
“나보다 더 손도 빠르고 일도 잘해서 내가 도와줄 게 없네. 흑흑.”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레시아 양은 벌써 세마포 한 필 다 짰더라고요. 게다가 그렇게 빨리 짠 베가 곱기는 또 얼마나 고운지.”
수니가 감탄하면서 아레시아에게 물었다.
“식후에 쉬고 내일 일찍부터 명주를 짤 건가요? 아니면 오늘 저녁에 바로 명주를 시작할 건지?”
“오늘 명주 시작하려고요. 저도 명주엔 문양을 넣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한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손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으면 일을 도와줄까 했는데 다들 제 몫을 충분히 하고 있어서 딱히 세마포나 면포를 더 짤 필요는 없을 듯했다.
식사 후 경연장에 가서 보니 과연 동편 쪽 베틀 하나가 비어 있었다.
“저쪽은 오늘 잠 못 자겠네.”
리디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아레시아는 베틀에 앉아서 집에서 가져온 색실을 꺼냈다.
자, 이제 명주다! 아레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혼자 기합을 넣은 뒤 베틀에 손을 얹었다.
“카, 카나 씨!”
리디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아레시아는 베틀에서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사람들이 주섬주섬 베틀에서 일어나는 걸 보니 취침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는데 명주에 몰입해 있느라 못 들은 모양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는지 카나가 아레시아의 베틀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아레시아가 짜고 있던 명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훌륭하네!”
카나가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서자 그녀 뒤에 서 있던 갈색 머리 여자가 입을 삐죽이면서 따라갔다.
“쟨 또 왜 저래?”
리디아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레시아의 등을 콩콩 때렸다.
“와! 카나 씨가 훌륭하다고 했어, 아레시아. 저 사람 다른 사람 작품에 입 대는 일이 정말 없는데!”
“아야야, 리디아 언니, 힘 너무 세요!”
“미안, 미안, 내가 좀 흥분했네!”
리디아는 아레시아의 등을 두들기던 주먹을 거둬들이면서 신이 나서 말했다.
“저 카나 웨일스가 인정하다니, 아레시아, 진짜 대단해. 하긴 이런 명주를 보면 누구라도 감탄하겠지. 어떻게 이런 문양을 생각했어? 이거 새 깃털을 형상화한 거야?”
“예. 피니어스의 날개옷처럼 진짜 깃털을 쓰진 못했지만 날개옷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진짜 아름답다! 수니 씨, 네리아 씨, 이것 좀 보세요. 이 정도면 우리 이번에 아레시아 덕분에 우승할 수 있겠는데요?”
“또, 또, 그 입 좀!”
네리아가 리디아의 입을 손으로 막았고 수니도 혀를 찼다.
취침을 위해 숙소로 돌아가던 다른 편 대표들 중 리디아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심할게요.”
리디아도 눈치를 채고 어깨를 움츠리더니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그치만 정말 멋지잖아요. 제 생각엔 조세피나 씨의 은록 명주나 카나 씨의 팔각 비늘 문양에 못지않아요. 이번 경연 끝나면 아레시아의 깃털 문양이 꽤 유명해질 거예요.”
조세피나의 은록 명주는 은사와 녹색 실을 사용해 명주에 은빛 순록의 문양을 넣은 것으로 그해 개인 우승이 거의 확실시될 만큼 아름다운 비단이었다.
그해 조세피나와 우승을 다투었던 것은 서쪽의 시리오네와 북쪽의 카나였는데 단체 우승은 남쪽에, 개인 우승은 시리오네에게 돌아갔었다.
아레시아는 은사와 옅은 보랏빛과 청색 실을 섞어서 명주에 깃털 문양을 넣었다.
피니어스의 날개옷은 백 마리 새가 준 백 가지 깃털을 썼다고 했는데, 보지 못해서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레시아 나름대로 날개옷을 상상해 가며 만들었던 문양이었다.
베를 짤 때마다 베틀 위에서 참견하며 날개를 퍼덕이던 루리의 깃털도 참고했고.
“동편 사람들은 자러 가지 않네요?”
“저기는 사람이 하나 빠졌잖아. 수량을 채워야 하니까.”
취침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어서 남아서 일할 사람들은 남을 수 있었다.
동편에서는 여러 명이 남아 있었고 다른 모둠에서도 한두 명씩 남은 사람이 있었다.
“저도 남고 싶어요.”
아까부터 불안해하던 나이르 마을의 대표였다.
“오늘 몫을 다 하긴 했지만 조금만 더 하고 갈게요.”
“그래요.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 하고 와요. 잠을 충분히 자야 내일 또 길쌈을 하지.”
한 명이 더 남겠다고 해서 두 명을 남기고 열네 명은 숙소로 돌아왔다.
“카나 웨일스가 조세피나 씨의 딸이 궁금했나 봐.”
같은 방을 쓰는 리디아가 아레시아에게 말했다.
“원래 경연 중에 다른 사람 거 보러 가거나 하진 않거든. 예의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숙소로 돌아가거나 숙소에서 경연장 들어올 때 경로에 있으면 살짝살짝 보긴 한단 말야. 근데 오늘 카나는 확실히 네 거 보러 왔던 거 같아.”
“제 베틀이 지나가는 길에 있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카나가 그렇게 다른 사람 거 보고 있는 거 나 처음 봤어. 항상 코를 이렇게 높이 들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듯이 지나갔는데. 여왕님이나 되는 것처럼!”
리디아는 침대에서 한 번 뒹굴었다.
“칭찬하는 것도 처음 봤고!”
아레시아는 어깨를 톡톡 두드린 뒤에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매일 하는 일인데도 왠지 어깨가 뻐근했다. 역시 경연이라 몸이 많이 긴장했었나 보다.
* * *
“삐루루.”
아레시아는 잠에 취한 채로 눈을 떴다.
어디선가 루리 같은 새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삐루루루.”
새 울음소리가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아레시아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루리?”
아니야, 루리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다른 새의 울음소리겠지.
“삐루루루.”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려는 그녀의 귀에 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
토도도독, 창문에서 뭔가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레시아는 일어나서 창문의 나무 덧창을 열었다.
이제 막 동이 트는 듯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삐루루!”
새벽 노을을 닮은 날개가 파닥거리면서 아레시아의 얼굴을 덮쳤다.
“루리!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루리는 보고 싶었다는 듯 아레시아의 얼굴에 머리와 부리를 비벼대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왜 혼자 떼어놓고 갔냐는 듯이 화를 내면서.
“루리, 진정해. 어떻게 찾아왔어? 여기 마차 타고 사흘이나 걸렸는데, 길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삐루, 삐루, 삐루루!”
루리는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펴고 가슴털을 부풀린 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염려는 할 필요 없다는 듯이.
몸도 통통하고 깃털도 반짝이는 게 배를 곯지도 않은 듯했다.
“뭐야, 아레시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엉? 그 새는 뭐야?”
리디아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가 루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집에서 키우는 새가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대단해. 명조(名鳥)다 명조! 정말 예쁘네!”
명견은 들어봤지만 명조라는 말도 있나? 뭐, 우리 루리라면 명조라고 할 만도 하지.
아레시아는 괜히 으쓱해져서 루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아레시아의 깃털 문양이 아름답더니 이렇게 예쁜 새를 키워서 그랬구나. 맨날 이런 깃털을 보니까.”
리디아는 홀딱 반한 듯 루리를 만져 보려고 했지만 루리는 살짝 몸을 피하고 날아올랐다.
“미안해요. 얘는 다른 사람한테 몸을 만지게 하지 않아서.”
“응, 뭐, 우리 집 고양이도 낯선 사람이 만지려고 하면 앞발을 날려!”
경연장에는 루리를 데려갈 수 없었지만 루리는 알아서 기다리겠다는 듯이 침대 기둥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레시아는 루리가 없어져서 걱정하고 계실 어머니 때문에 우편국부터 갔다.
어머니에게 비둘기를 보낸 후 리디아와 함께 경연장에 도착해 명주를 짜기 시작했다.
루리가 여기까지 찾아와 준 게 마치 행운의 상징 같아서 더 힘이 났고 베틀도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원래 목표했던 명주 반 필보다 더 짤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점심 식사 후 다시 경연장에 돌아왔을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