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60화 (16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60화

44. 백 가지 새(5)

에테노리움 직조 경연에 참여하는 마을 대표는 64명이지만 그 대표가 되기 위해 또 치열한 경쟁이 있다. 말하자면 예선이랄까.

에테노리움 지역은 원래 직물로 유명한 만큼 직조인이 많다.

아레시아가 사는 마을은 비교적 작은 마을이라 경쟁이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지만, 거의 소도시에 가까운 큰 마을이 많은 동쪽 지역이나 마을 수가 많아서 두세 곳을 통합해 대표를 뽑은 북쪽 지역 같은 경우 마을 대표가 되는 게 본 경연 못지않게 어려운 지역도 있다고 들었다.

본 경연에는 그런 관문을 뚫고 온 실력자들이 참여하는 만큼 상위 실력자들은 모두 수준이 높아서 다들 실력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다.

아레시아의 어머니만 해도 십여 년 넘게 근동 제일의 직조인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몸이 안 좋아 참여하지 못한 몇 년을 제외하면 계속 만장일치로 마을 대표가 되면서 매해 우승 후보라는 평을 받았는데도 정작 한 번도 우승자가 되지 못했다.

그런 만큼 2년 연속 우승자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들 했는데 카나 웨일스는 작년과 재작년, 두 해를 이어 개인 우승이라는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었다.

카나는 이제 사십 대 초반인데, 북쪽 지역에서는 이미 아레시아 나이 또래부터 길쌈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했다.

스물대여섯 살 때부터 에테노리움 경연에 스키토 마을 대표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중간의 서너 번을 제외하고 대표로 나온 것이 10회가 넘는 것만 해도 실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성격이 타고난 우두머리야. 윗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부려야 성이 풀리거든. 북쪽 편에 스키토보다 큰 마을도 많은데 수장 자리는 으레 카나가 맡는다고.”

카나의 출신 마을인 스키토 마을은 에테노리움 기준으로 봤을 때 북쪽이라 직조 경연 때만 편의상 북쪽 편에 속할 뿐 대륙에서는 동부 지역이다. 실제로 북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카나를 북부의 마녀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의 차갑고 말 붙이기 어려운 인상이 왠지 눈과 얼음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었다.

재작년에 그녀가 우승하게 된 것이 그녀가 고안해 낸 팔각 비늘 문양 덕분인데, 그 문양이 마치 눈송이 같기도 하고.

“길쌈 솜씨야 카나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지. 네 어머니도 유명하고, 서편 마을의 시리오네는 거미줄로도 베를 짤 수 있을 거라는 평을 받을 정도지. 그런데 카나가 두 해나 연속 우승을 한 건 문양 때문이야.”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카나가 팔각 비늘 문양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우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팔각 비늘 문양 본 적 있어?”

“아뇨, 없는데요.”

“그렇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문양이 아니라서 시중에 풀리지도 않았거든. 스키토 마을에서 독점으로 판다는데,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아주 복잡한 문양이라서 제대로 모양을 내기가 정말 어려워. 웬만한 문양은 나도 한두 번만 보면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건 못하겠더라고.”

대단한 사람이구나.

아레시아가 카나 쪽을 계속 쳐다보자 리디아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꾸 쳐다보지 마. 괜히 밉보이면 골치 아프다. 넌 나이도 어리니까 얕보고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

리디아의 말에 따라 아레시아도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네리아 부인이 쯧 혀를 차면서 리디아를 나무랐다.

“쓸데없이 뒷말하고 다니지 마라. 어린 아가씨한테 괜히 선입견 심어 주지 말고. 카나 씨가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 아니야.”

네리아는 아레시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오십 대 후반의 부인으로 남쪽 편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연장자였고 인품도 온화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리디아와는 바로 옆 마을 출신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허물없는 사이였다.

리디아가 어린애처럼 혀를 쏙 내밀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뭐, 없는 말 했나요? 카나 씨 패거리가 다른 사람들 얕보는 거 다 아는데요. 카나 씨도 카나 씨지만 그 시녀들……, 어휴!”

카나 웨일스는 좋은 집안 출신이라 사실 이런 길쌈 일을 안 해도 되는데 본인이 원해서 길쌈을 하는 거였다.

결혼도 부유한 집안과 했는데, 그녀가 원하는 길쌈을 계속할 수 있어야 결혼하겠다고 당당하게 요구한 뒤 혼인했다고 한다.

“예술가지, 예술가야. 우리처럼 베 짜서 먹고사는 처지도 아니면서 길쌈을 한다니까. 그러니까 금전 걱정 없이 여러 가지 작품도 만들어 볼 수 있겠지. 그런 카나 씨가 멋지다고 숭배하는 시녀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쯧! 그만 하라는데도!”

“말이야 바른 말이지, 3년 전에 서편 시리오네 씨가 우승했을 때 카나 패거리가 얼마나 말이 많았어요? 운이네 뭐네 하면서 꼭 맡아 놓은 우승을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저, 저, 조둥아리!”

네리아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리디아는 잘못했다는 듯이 두 손을 모아 보이곤 재빨리 도망쳤다.

네리아 부인은 혀를 차면서 아레시아의 등을 토닥였다.

“저런 말 귀담아듣지 말고 아레시아 양은 자기 것만 열심히 하면 돼요. 시리오네 씨나 카나 씨나 다 우승할 만해서 우승한 거야. 그 해의 운도 중요하긴 하지만 역시 실력이 받쳐 줘야 그런 말도 가능한 거고.”

“예. 감사합니다.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아레시아 양 어머니도 시리오네 씨나 카나 씨 못지않은 직인이지. 어머니에게 잘 배웠을 테니 아레시아 양에게도 기대가 커요.”

네리아 부인은 손녀 대하듯 아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기 베틀을 살피러 갔고 아레시아도 실을 베틀에 걸어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도 이번에 새로운 문양을 준비해 왔는데.’

아레시아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문양으로, 어머니와 루리 외에는 아무에게도 공개한 적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직조에 관한 한 평이 까다로운 편인데도 아레시아의 이번 문양에는 경연에서도 기대해 볼 만하다고 감탄했었다.

아레시아는 다시 한번 카나 쪽을 살짝 보았다.

팔각 비늘 문양을 본 적은 없지만 말만 들어도 굉장한 것 같아.

하지만 내 문양도 충분히 괜찮으니까, 최선을 다해 보자.

아레시아가 속한 남쪽 편의 수장은 케이시엔 마을에서 온 수니라는 여자가 하기로 했다.

아레시아와는 다른 마차를 타고 왔고, 서른 후반쯤 된 사람으로 인상이 온화하고 단정했다.

리디아나 네리아 부인과는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네리아 부인이 수장을 맡아 주길 원했는데 본인이 극구 고사하는 바람에 수니가 수장을 맡게 되었다.

“면포, 세마포, 명주 세 가지를 짜기로 했죠? 아레시아 양과 네리아 부인은 세마포와 명주를 짜겠다고 했고, 리디아 씨는 면포와 명주, 지나이다 양이 면포와 세마포…….”

수니의 지휘하에 열여섯 명의 대표들은 일을 나누고 어떤 식으로 길쌈을 할 것인지 정했다.

대부분 자신이 잘하는 것을 미리 다 생각해서 정해 오지만, 직조 경연은 동서남북 모둠 경연이기 때문에 모둠에 가장 유리한 형태로 일을 잘 배분해야 했다.

이틀간의 경연에서 각 모둠이 제출해야 할 직물은 면포 7필, 세마포 7필, 명주 7필로 합이 21필이었다.

손이 빠른 직조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수량이지만 중간에 사고가 생겨 수량을 못 맞추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고 했다.

제출한 직물의 심사는 우선 품질을 보고, 독창적인 문양이나 직조 방법을 보고, 그리고 비슷한 수준이라면 수량에 가산점이 있다고 했으니 수량이 다른 모둠보다 모자라면 불리했다.

“난 명주에 새로 고안한 구름 문양을 넣고 싶은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려요. 이 문양을 넣으면 하루에 4분의 1필밖에 못 짜거든요.”

시모어 마을의 대표인 제인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음, 한 사람당 면포나 세마포 1필, 그리고 명주 3분의 1필은 짜야 수량을 맞출 수 있을 텐데요.”

“그러면 제가 손이 빠르니까 문양 없는 명주를 좀 더 짜고…….”

모둠마다 신중하게 의논해서 누가 어떤 것을 얼마나 짤지를 정했다.

아레시아가 속한 남쪽 모둠은 순조롭게 의논이 빨리 끝났지만, 다른 쪽에서는 의견이 잘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곳도 있는 것 같았다.

경연이 시작되는 첫날 아침, 숙소에서 경연장으로 향하던 아레시아는 문제의 카나 웨일스와 마주쳤다.

사십 대라고 들었는데 가까이에서 본 카나는 서른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키가 큰 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위압감이 있는 분위기여서 함께 있던 서너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띄었다.

출입구 앞의 복도에서 아레시아와 마주친 카나가 잠깐 멈춰 서더니 아레시아를 돌아보았다.

카나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그녀 옆에서 걸어가던 갈색 머리 여자가 아레시아를 쳐다보았다.

“어디 대표예요?”

“남쪽 편, 헤일리 마을에서 왔어요.”

“아하, 헤일리.”

갈색 머리 여자가 카나의 눈치를 슬쩍 보았고 카나가 아레시아를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조세피나 티소와 친척인가?”

아레시아는 조금 당황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딸이에요. 아레시아 티소입니다.”

“아, 닮았다 했더니. 어머니는 좀 나으셨나?”

“예.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레시아의 어머니는 매해 우승 후보였기에 에테노리움 경연에 여러 번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꽤 얼굴이 알려진 편이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아레시아를 보고 조세피나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카나 역시 아레시아를 보고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인지 아레시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나섰고 아레시아도 그 뒤를 따라 나온 뒤 각자의 모둠을 향해 갈라졌다.

아직 그들과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갈색 머리 여자가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일리에도 사람이 없나 봐요. 저렇게 어린 애를 대표로 내보낸 거 보면.”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데, 조세피나 티소의 딸이라서 나왔겠죠.”

“헤일리는 마을이 작잖아요. 인재가 그렇게 많진 않을 테니까.”

“조세피나 티소도 안 나왔고, 올해도 카나 씨 상대할 만한 사람은 없겠는데요?”

“에이, 그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우리 카나 씨의 상대는 못 되죠.”

“카나 씨,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너무 빨리 가시네요.”

카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뒤를 따라가던 여자들끼리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가 들렸고 아레시아는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어린 애라니, 내가 어려 보여서 그렇지 이십 대 맞다고요. 스무 살 생일을 넘긴 지 석 달이나 됐는데!

사람이 아직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아무렇게나 말을 하다니.

두고 봐라. 내가 머릿수나 채우러 나온 게 아닌 걸 보여줄 거야.

경연장에 도착한 아레시아가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데 리디아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휴, 드디어 시작이다.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아레시아는 떨리지 않아? 나는 처음 경연 나왔을 때는 전날 밤에 한잠도 못 잤는데.”

“저도 많이 두근거리는데 그래도 잠은 잘 잤어요. 그나저나 리디아 씨가 왜 시녀들이라고 했는지 알겠어요.”

“응? 무슨 일 있었어?”

조금 전 숙소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리디아가 입을 삐죽였다.

“누군지 알겠어. 갈색 머리에 키 작고 마른 여자지? 스키토 마을 바로 옆 티미엔 대표일 거야. 이름이 뭐더라. 비비였을 거야. 작년에도 봤는데 카나 옆에 딱 붙어서 쫓아다니면서 무슨 시녀장처럼 굴더라니까.”

“진짜 그렇더라고요.”

“그나저나 그 카나가 말을 걸었다니, 역시 카나 웨일스도 조세피나 씨는 인정하는구나! 엄마 몫까지 열심히 해!”

리디아는 아레시아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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