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9화
44. 백 가지 새(4)
루시나 새는 원래 마을 근처에 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마을 가까운 산기슭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새끼 루시나가 떨어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건강해졌고 날개도 멀리 날아갈 만큼 깃이 자랐으니 산에 풀어 주면 알아서 제 살 곳을 찾아가겠거니 했다.
새장에서 꺼낸 루리를 팔에 올리자 루리는 처음에 날아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아레시아의 팔과 어깨 위를 오갔다.
“루리, 이제 가는 거야. 가서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아야지.”
날개를 몇 번 퍼득여 보던 루리는 마침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낮게, 그리고 점점 더 높고 넓게 선회하는 루리를 보자 아레시아의 마음이 뭉클했다.
저렇게 높게 날 수 있는 새를 새장에서 키우는 건 안 돼. 이제 다 나았으니 풀어주는 게 맞아.
멀리까지 날아갔던 루리가 다시 돌아오더니 아레시아의 머리 위를 인사하듯 몇 번이나 맴돌았다.
마침내 보랏빛 날개를 활짝 편 루리가 산 위쪽으로 날아갔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루리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던 아레시아는 돌아서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서 집에 올 때까지 울며 왔고 집에 와서 빈 새장을 보며 또 울었다.
베갯잇이 축축해질 정도로 울다 잠들어서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는 눈두덩이가 호두만큼 부풀어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창가에 걸어 둔 새장에서 루리가 삐루루루 울며 아침 인사를 했는데.
“삐루루루.”
“!”
창가에 걸린 새장 속에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루리가 횃대 위에 앉아서 부리로 깃을 고르고 있다가 아레시아를 보고 삐루루루 맑은 소리로 노래했다.
“루리! 어떻게 다시 왔어? 혼자 온 거야?”
물론 혼자 왔겠지.
새는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삐루루 부리를 울리고는 열려 있는 새장 문으로 깡충 뛰어나와서 아레시아의 어깨 위에 앉았다.
다정하게 부리로 귓전을 비비는 루리의 몸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싸면서 아레시아가 울먹거렸다.
“바보야, 산에 가서 자유롭게 살라고 풀어줬는데 왜 돌아왔어?”
“삐루루!”
“그래도, 돌아와서 정말 기뻐. 루리.”
그 후 아레시아는 루리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새장 문을 열어 놓았다.
루리는 내키는 대로 산에 날아가기도 하고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서 놀다 오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항상 아레시아의 옆에 머물렀다.
루리는 아레시아가 베를 짜는 베틀 꼭대기에 앉아서 베틀 소리에 맞춰 춤추듯 몸을 까딱이곤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루리는 완전한 성조가 되었고 아레시아도 성년이 되었다.
루시나 새는 다른 새들보다 발육이 늦지만, 다 자란 루리의 화려한 외관을 보면 아기 새 시절의 볼품없는 모습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루리, 너는 너무 눈에 띄니까 따라오지 말고 집에 있어. 나 경연 잘하고 올게.”
드디어 마을 대표로 뽑혀서 에테노리움의 직조 경연에 참여하게 된 아레시아는 따라가려는 루리를 새장에 넣은 채 어머니에게 맡겼다.
“혹시 따라오면 안 되니까 사흘쯤 지난 후에 풀어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너라. 에테노리움에 잘 도착하면 우편국에 가서 비둘기 보내고.”
“예. 바로 보낼게요.”
“올해도 마차는 세린 마을 도리언이 몰겠지?”
“그렇대요. 그 아저씨네 마차가 근동에서 제일 크잖아요.”
이웃 세린 마을의 도리언은 말 두 마리가 끄는 큰 마차를 갖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각 마을의 대표들이 모여서 한 마차로 에테노리움까지 가는데 해마다 도리언이 그 마차 편을 제공했다.
루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출발이 좀 늦어진 아레시아가 집결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웃 마을 세 군데의 대표가 도착해 있었다.
“오, 아레시아 양도 왔군요. 이제 두 명만 더 오면 됩니다.”
도리언의 마차로 함께 출발하게 된 마을 대표는 여섯 명으로 근동 여섯 마을에서 뽑힌 직조인들이었다.
여섯 명이 다 모이고 나니 중년 부인이 둘,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둘, 오십 대 후반의 부인이 하나, 그리고 아레시아가 가장 어렸다.
두 명은 아레시아와도 안면이 있었고 셋은 초면이었다.
“아레시아 양은 이번이 경연 처음이지?”
“예. 어머니가 몇 번 가보셔서 말은 들었는데 제가 가는 건 처음이에요.”
“아레시아 양의 어머니는 솜씨 좋기로 유명하시지요. 저와는 두 번이나 같이 에테노리움에 갔답니다. 4 년 전에 우리 남쪽 편이 우승했는데 그때 아레시아 양 어머니의 은록 명주가 큰 역할을 했어요.”
“아, 저도 기억나요. 그때 개인 우승자로 분명히 아레시아 양 어머니가 뽑힐 줄 알았는데 개인 우승자는 서편에서 나왔지요. 아쉬웠어요.”
“지난 삼 년간은 경연에 나오지 않으셨지요?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좀 어떠신가요?”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요. 감사합니다.”
“아레시아 양도 벌써 몇 년 전부터 어머니 못지않은 솜씨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번 경연 때 기대해 봐도 되겠지?”
“열심히 할게요.”
아레시아는 수줍게 웃으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우리는 그럼 항상 남쪽 편인가요?”
“에테노리움 기준으로 남쪽 마을이니까 남쪽에 소속되지.”
“각 방위마다 열여섯 마을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우리 말고 나머지 열 군데의 마을은 우리 쪽과는 거리가 있는 곳들이니까 에테노리움에서 합류할 거예요. 동서남북 다 합치면 마을 대표가 모두 64명이에요.”
64명의 대표가 참여하는 경연은 사흘에 걸쳐 치러졌다.
첫날은 준비된 베틀과 실 등을 시험해 보는 등 준비를 갖추는 날이고, 나머지 이틀 동안 베와 명주를 짠다. 주최 측에서 다양한 재료를 준비해 놓지만 집에서 가져간 재료도 쓸 수 있다. 마법은 금지다.
“아직도 가끔 마법 재료를 쓰게 해 달라는 요청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러면 진짜 길쌈 솜씨를 볼 수 없잖아.”
“그래, 재미는 있겠지만 직조 경연에 마법을 쓰면 안 되지.”
“옛날에는 살짝 마법이 첨가된 재료를 쓴 경우도 있었는데, 미혹의 마법이 걸린 실로 베를 짰던 사람이 있어서 그 이후 완전히 금지되었다지.”
리디아라는 이름의 세린 마을 대표가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요염하게 몸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 고조할머니가 그때 경연에 나가셨었는데, 심사위원이랑 그 베를 만진 사람들이 막 옷을 벗고 춤을 추고 그랬었대요.”
“악 진짜요?”
“그럼, 진짜지. 뭐 나도 할머니께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마법이 걸린 것만 아니면 재료 제한은 없지요?”
“응, 맞아요.”
“옛날에는 직접 물레로 실을 잣는 것부터 경연을 시작했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해서 요즘은 실은 미리 준비하고 경연에서는 직조만 하지.”
“실과 베틀 등이 다 준비되어 있지만 그래도 집에서 뽑은 실과 재료를 가져가는 사람이 많아요.”
리디아가 아레시아를 보면서 말했다.
“아레시아 양도 실을 따로 준비했죠?”
“네.”
“잘 챙겨요. 경연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거든.”
“맞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손상되는 일도 있으니까.”
“칠 년 전이던가? 그때도 아레시아 양 어머니가 당연히 우승자가 될 줄 알았는데 누가 그 베를…….”
목소리를 높이던 중년 부인이 아레시아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저도 들었어요. 심사 전에 다 짜놓은 베에 무슨 사고가 나서 심사 못 받으셨다고.”
“맞아, 사고라고 결론이 났지만 사실 우린 누가 고의로 그랬다고 의심했어요. 그러니까 주의해야 돼.”
경연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덩달아 아레시아에게 이런저런 주의를 주었다.
“너무 다양한 무늬를 넣으면 손이 좀 느려질 수 있으니까 시간 배분 잘하고.”
“아레시아 양은 베를 짤 건가요? 명주를 짤 건가요?”
“둘 다 짜고 싶은데요. 하루는 베를 짜고 하루는 명주를 짤까 하는데.”
“음, 그러면 베 한 필과 명주는 반 필 좀 못 되는 정도를 낼 수 있겠군요?”
숙련된 직조인은 보통 하루에 베 1필(18m), 명주는 1/3필 정도를 짤 수 있었다.
“명주 반 필 짤 수 있어요.”
“오, 손이 빠르군요. 솜씨는 들은 적이 있으니 남쪽 편에 큰 도움이 되겠어요.”
“우리 남쪽 편이 우승은 몇 번 했는데 개인 우승자는 최근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못 냈잖아요. 이번엔 꼭 우승자를 내 봅시다!”
사흘간의 마차 여행 후 에테노리움의 경연장에 도착해 숙소를 배정받은 아레시아는 우편국에 가서 어머니에게 비둘기부터 보낸 후 경연장 구경을 나갔다.
광장 가운데에 준비된 경연장은 경비대가 지키고 있어서 안쪽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이미 설치되어 있는 64대의 베틀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레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광장 가운데 준비된 경연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간격을 두고 기둥을 세워 놓고 대형 천막을 지붕처럼 덮어 놓았다.
천막은 옅은 비둘기색으로 단조로웠지만 가장자리에 다채로운 색감의 술이 달려 있어서 햇빛을 받을 때마다 곱게 빛나며 흔들렸다.
‘우리 루리의 꼬리 같네.’
도착한 후 이틀간은 남쪽 편의 조원들과 인사를 하고 베와 명주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짤 것인지 등을 조정했다.
경연장 출입이 허용된 이후, 관리관들의 감독하에 사용할 베틀을 정하고 미리 시험도 해 보았다.
모두 경력이 길고 각 마을의 대표로 나온 만큼 실력이 검증된 숙련자들이라 베틀을 시험해 보는 솜씨나 일머리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아레시아도 자리를 정하고 베틀을 시험해 보았는데 손에 익지 않은 베틀이라 낯설기는 했지만 좋은 물건이어서 만족스러웠다.
몇 번 더 써 보면 손에 딱 붙을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불편한 곳은 없나요?”
관리관이 물었고 아레시아는 손을 저었다.
“아주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건너쪽 북쪽 편에서는 누군가 베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는지 관리관이 들어와 베틀을 교체하고 있었다.
“불편하신 게 있으면 오늘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경연이 시작되면 교체나 교정이 어렵습니다.”
“알겠어요.”
관리관이 다른 자리로 옮겨간 후 리디아가 아레시아 옆으로 왔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걸리는 거 있으면 말해, 전문가가 와서 다 손봐 주니까.”
그동안 많이 친해져서 말을 놓고 있었다.
“예. 저쪽은 베틀을 아예 교체하네요?”
리디아가 북쪽 편을 건너보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북부의 마녀네. 또 트집을 잡나 봐.”
“북부의 마녀요?”
“저 사람 별명이야.”
리디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경연을 세 번째 나오는데, 항상 저 사람이 있었어. 내가 처음 나왔을 때 이미 북부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어 있더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한 번도 조용히 넘어가는 걸 못 봤어. 실에 트집을 잡거나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하거나 숙소를 바꿔 달라고 하거나 다른 참가자를 구박하거나……, 올해는 베틀인가 보네.”
아레시아는 살짝 건너편을 보았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은데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서 더 커 보이는 중년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베틀을 교체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지시하고 있었다.
“딱 봐도 기가 센 분 같기는 한데, 북부 대표들이 다 저분 말을 따르는 것 같은데요?”
리디아가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실력은 진짜거든.”
“아하.”
“아레시아도 이름은 들어 봤을걸? 저 여자가 카나 웨일스야.”
“아!”
아레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년, 재작년 우승자…….”
“응, 문양의 달인이지. 팔각 비늘 문양의 창시자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