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6화
44. 백 가지 새(1)
“자, 여기, 최신 유행의 모자입니다. 올해 새로 나온 디자인이에요. 아가씨들, 한번 보고 가세요.”
“남자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단검, 너클, 무릎 보호대, 실용적인 무구 외에 소장 가치가 있는 옛날 투구와 장갑도 팝니다.”
“꽃 사세요. 꽃 사세요. 봄날이 왔어요. 봄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큰 장이 열린다는 바람에 제이든은 일정을 며칠 늦추고 페르비옹에 이틀 더 머물고 있다가 장이 열린 뒤 구경하러 나온 참이었다.
“계절별로 일 년에 네 번 열리는 큰 장이라는데, 감정사가 돼서 이걸 안 보고 지나갈 순 없지.”
-뒤늦게 맥주에 맛 들여서 그런 건 아냐?
아실리가 미야옹 울었고 제이든은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허, 날 뭐로 보고. 어디까지나 감정사로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거라고.”
장터에는 으레 옛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고, 대부분은 평범한 물건이지만 가끔 재미있는 물건이 나타나거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진기한 물건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골동품상들은 그런 물건을 고르기 위해 방방곡곡의 장터를 돌아다니곤 한다.
제자를 둔 감정사들은 제자를 장터에 보내서 평범한 물건들 중 가치 있는 물건을 골라내는 훈련을 시킨다.
아실리도 제이든에게 감정 공부를 시킬 때 실전 훈련을 위해 장터 순회를 몇 번이나 시킨 적이 있었다.
-처음에 장터 내보냈을 때는 엄청 어리바리해서 사기당하기 딱 좋았는데 어느새 유물의 내력까지 보고.
아실리가 목에서 고르릉 소리를 내면서 ‘우리 애가 이렇게 잘 컸어요’ 하는 눈으로 제이든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주인을 참 좋아하나 보네.”
노점을 펴놓고 있던 상인이 웃으면서 말을 붙였다.
“이 지역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여행 중이신가?”
“예.”
“토끼랑 고양이까지 데리고 여행 중이라니, 동물을 정말 좋아하는가 보네. 이봐요, 손님. 내가 손님 같은 사람한테 꼭 맞는 물건을 갖고 있다오.”
그 노점은 언뜻 보아도 체계 없이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섞인 잡화를 팔고 있었는데 상인은 재빨리 노점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새장 하나를 들고나왔다.
“이것 좀 봐요, 진짜 골동품 새장이야. 로시난트 시대의 물건이라고. 어때요? 굉장하지? 오백 년은 됐을 거야. 내가 단돈 200골드에 주겠소.”
새장은 녹슬고 낡은 것이었지만 모양새나 장식이 화려한 게 과연 로시난트 시대에 유행했을 법한 물건이었다.
이웃 노점에 있던 노인이 즉시 끼어들었다.
“아니 그렇게 낡아빠진 물건을 누가 산다고 그래? 200골드라니 어림도 없지. 게다가 저 젊은이는 고양이랑 토끼를 데리고 있는데 새장을 뭐 하러 사겠어? 토끼 넣어서 들고 다니라고?”
“토끼도 충분히 넣을 크긴데 못 넣을 건 없지. 저렇게 그냥 어깨에 태워 다니는 것보다는 새장에 넣어 들고 다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포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젊은이, 그런 말 듣지 말고 이쪽으로 오게, 자네 메고 있는 배낭이 꽤 낡아 보이는데 새 가방을 하나 장만하는 게 좋겠어.”
노인은 판매대에 놓여 있던 튼튼해 보이는 가방을 집어 들고 제이든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봐, 이거, 저런 낡아빠진 물건이랑 비교도 할 수 없지. 이런 건 유행도 타지 않아. 가죽도 아주 좋은 거라네. 한번 사면 평생 쓸 수 있는 거야.”
새장을 팔려던 사내가 노인을 어깨로 밀치면서 나섰다.
“아니 이 영감님이 왜 남의 손님을 가로채고 그래? 손님, 새장이 맘에 안 들면 다른 것도 있다오. 보자, 이 팔찌는 어떤가? 금속 사슬에 커다란 황옥이 박혀 있어서 멋지지 않소?”
“사내자식이 팔찌 같은 거 해서 뭣 하게? 젊은이, 이 가죽조끼 좀 보게. 모름지기 사내의 멋이란 저런 팔찌나 목걸이 주렁주렁 다는 게 아니라 이런 가죽조끼 같은 게 진짜 사내의 멋인 게야. 길이 잘 든 가죽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멋있어진다네.”
“괜찮습니다. 좀 둘러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제이든은 손사래를 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 영감님이 너무 들이대니까 저 손님이 가버렸잖아요.”
“들이대긴 누가 들이대? 자네가 턱도 없이 새장 같은 걸 들이미니까 어이가 없어서 가버린 거잖아. 토끼랑 고양이를 떡하니 보면서 새장을 들이대다니 제정신이야?”
“아 동물 좋아하는 사람 같으니 집에 새도 있을지 알아요? 지금 없어도 새장 사면 새도 사고 싶을 수 있고.”
“그 새장에 새를 넣으면 병나서 죽겠네. 녹부터 닦아내야 하겠구먼.”
제이든이 멀찌감치 떨어질 때까지도 노점상 둘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포이잇!”
포이가 제이든의 귀에다 뺨을 비비면서 살짝 몸을 움츠렸다.
“그래, 걱정하지 마, 우리 포이를 저런 새장에 넣을 리가 있니.”
제이든이 손을 올려 포이를 토닥토닥 두드리자 아실리가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새장, 꽤 괜찮아 보이지 않았어?
“맞아. 실리도 알았구나? 그거 대충 봤지만 로시난트 시대의 물건은 맞는 것 같았어. 그 상인은 아마 진짜 로시난트의 새장인 줄은 모를걸?”
-그래도 보존 상태가 너무 나빠서 별로 좋은 값은 못 받을 거야.
몇백 년 전 옛 왕국 시대에, 희귀한 새를 키우는 것이 부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왕족이나 귀족, 부자들은 먼 곳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귀한 새를 사들였고 손님이 오면 새를 보여주며 진기한 모습과 아름다운 노랫소리 등을 자랑하고 함께 즐겼다.
당연히 그 귀한 새들을 넣을 새장도 허투루 제작되지 않았다.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네모진 것, 높은 것, 낮은 것, 온갖 형태의 새장이 만들어졌고 제작 기술이나 장식 방법도 점점 더 발전했다.
고대에 만들어졌던 단순한 나무 새장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정교하게 세공하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새장 위에 비단과 레이스로 만든 덮개를 씌우는 등 화려하고 값비싼 새장들이 만들어졌다.
장인이 아낌없이 비싼 재료를 써서 만든 새장 하나가 작은 집 한 채만큼 가격이 나가기도 했다.
로시난트는 황금의 로시난트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금이 많이 나는 나라였고, 예술적으로도 일곱 왕국 중 가장 뛰어난 나라였다.
당시 일곱 왕국의 부자들이 왕족이나 귀한 사람에게 선물을 해야 할 경우, 거금을 들여 구해 온 희귀한 새를 로시난트에서 제작된 새장에 넣어 선물하는 것이 가장 세련되고 값진 선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새들이 고생 많았을 거야.”
-그러게.
제이든과 아실리의 말에 포이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포잉 하고 울면서 동의를 표했다.
“손님, 토끼 친구랑 같이 계신 손님, 이쪽 좀 보세요.”
명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제이든을 불렀다. 장터의 시끌벅적한 소음 가운데서도 또렷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였다.
“여깁니다. 여기예요. 손님이 오실 곳은 여기랍니다.”
여자가 방울처럼 웃으면서 제이든을 불렀고 여자의 노점을 본 제이든도 웃음을 터뜨렸다.
“토끼의 집인가요.”
여자의 노점 앞에는 토끼를 그린 입간판이 세워져 있고 ‘바니의 집’이라는 글도 쓰여 있었다.
“예, 토끼의 집이기도 하고 제 가게기도 하지요. 제 이름이 바넷사인데 모두 바니라고 부르거든요.”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고 토끼처럼 눈이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여자가 생글생글 웃었다.
매대 위에는 토끼 인형, 토끼를 수놓은 앞치마, 손수건, 머릿수건 등 생활용품 외에도 토끼를 그린 그림이나 장식품 등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어서 와요. 토끼 친구!”
바니라는 여자는 제이든보다 제이든의 어깨에 있는 포이를 반기면서 눈을 반짝였다.
“정말 귀엽네요. 이름이 뭐죠?”
“포이잇!”
“포이라고 합니다.”
포이가 먼저 대답했고, 제이든이 말을 이었다.
“어머, 특이한 소리로 우네요. 포이, 안녕? 미미, 인사하렴.”
매대 아래에서 옅은 갈색의 귀가 쏙 올라왔다.
포이보다도 더 작은 토끼다!
흰 몸에 연한 갈색 얼룩무늬가 동글동글하게 있는 게 귀여웠다.
“삐이!”
작은 얼룩 토끼가 머리를 갸웃 기울이면서 포이를 올려다봤다.
“얘는 미미라고 해요. 제 토끼랍니다.”
바니는 말하면서 옆에 놓인 바구니에서 토끼풀을 조금 집었다.
“자, 포이, 토끼풀 좀 먹을래?”
“포잇!”
“감사합니다.”
포이가 앞발을 내밀었지만 제이든이 먼저 받았다.
반지에 아무 변화가 없는 걸 확인하고 포이에게 주자 포이가 오물오물 먹어 보더니 눈을 반달처럼 접으면서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맛있지? 이게 보통 토끼풀이 아니거든. 무려 포에니 토끼가 산다는 델로스 산에서 가져온 거란다!”
“포잇?”
포이가 눈을 크게 떴고 제이든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믿지 못하시겠지만 정말이랍니다.”
바니가 손뼉을 딱 치면서 웃었다.
“실은 제 아버지께서 소년 시절부터 토끼를 좋아하셨거든요. 포에니 토끼를 보는 게 소원이셨대요. 젊었을 때는 사느라 바빠서 못 가셨는데 몇 년 전에 드디어 큰맘 먹고 델로스 산에 가셨답니다.”
“포에니 토끼 보려고요?”
“예.”
바니가 생글생글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젓자 기다란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거길 간다고 포에니 토끼를 볼 수는 없을 거라고 모두 말렸지만 끝내 가셨지요.”
“어, 음, 그래서 포에니 토끼를 보셨답니까?”
“아뇨, 못 보셨지요.”
바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포에니 토끼가 그렇게 쉽게 눈에 띄겠어요? 아무튼 길잡이랑 같이 델로스 산을 며칠이나 돌아다니셨지만 일반 토끼는 봤는데 포에니 토끼는 한 마리도 못 봤대요.”
“아, 저런.”
“그래도 아버지는 포에니 토끼가 살았던 곳에 가 봤다는 걸로 만족하셨어요. 델로스 산에서, 아마 포에니 토끼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토끼풀을 많이 캐오셨어요. 그리고 집 뒤에다 심었죠. 다행히 해마다 잘 자라고 있어요.”
“아, 그게 이 토끼풀인가요?”
“그렇답니다. 자세히 보시면 일반 토끼풀과 좀 달라요. 잎새도 더 크고요. 보통 토끼풀은 잎에 하얀 얼룩무늬가 있죠? 이 토끼풀은 하얀 얼룩무늬 옆에 별무리처럼 점이 찍혀 있어요.”
“호, 정말 그러네요.”
“토끼들도 일반 토끼풀보다 이걸 더 잘 먹더라고요. 역시 포에니 토끼가 먹는 토끼풀이라 좀 다른 건지.”
바니는 미미를 어깨에 올려놓았다.
“토끼 친구가 와서 정말 반갑네요. 뭐 하나 골라보시죠?”
“미야옹.”
아실리가 새침하게 울자 바니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고양이 친구도 반가워요. 저쪽에 좀 더 가면 고양이 관련 물품만 파는 가게도 있답니다. 이따 한번 들러 보세요.”
제이든은 신중하게 물건을 골랐다.
단순한 장식품이나 생활용품들이었지만 솜씨가 꽤 좋았다.
토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게 확실히 토끼를 잘 아는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만든 티가 났다.
“댁에서 직접 만드신 건가요?”
“예. 어머니랑 제가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했고, 목각 제품은 아버지와 남동생이 만든 거예요.”
제이든은 토끼 수가 놓인 손수건 두 장과 포이가 안고 자면 딱 맞을 듯한 봉제 인형 하나를 골랐다.
“이렇게 계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 토끼풀도 좀 사고 싶은데요.”
“어머, 토끼풀은 그냥 드릴게요.”
바니는 매대 아래에서 커다란 종이 봉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토끼풀을 듬뿍 담았다.
“자, 포이, 우리 미미도 좋아하는 풀이야. 포이도 맛있게 먹으렴.”
포이가 앞발을 모으고 꾸벅 머리를 숙이자 바니가 깜짝 놀란 듯 감탄했다.
“어머, 인사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토끼는 우리 미미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포이도 할 수 있구나. 정말 영리하고 귀여워요. 우리 집에 가면 미미 말고도 토끼 친구들이 또 있는데, 포이야, 우리 집에 놀러 갈래?”
“하하, 괜찮습니다.”
“포이야, 잘 가. 다음에 장터에 오면 또 찾아오렴.”
바니의 어깨 위에서 미미도 인사하듯 꾸벅 머리를 숙였다.
“우리 포이, 고향의 풀을 얻었구나. 좋겠네.”
“포이잉.”
포이는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그 아가씨는 자기가 아버지의 소원을 대신 이루었다는 걸 모르겠지. 포에니 토끼를 봤는데.”
제이든은 장터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흥미로운 것들은 제법 있었으나 특별히 관심을 끄는 물건은 없었다.
빵과 과자를 조금 사고 여행 중 필요한 물품을 몇 가지 산 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돌려주세요. 20골드 가져왔어요.”
“아니 꼬마야, 이젠 내 거라니까. 장사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거라.”
“아빠가 술 취한 틈에 10골드 주고 빼앗아 가신 거잖아요. 그건 제 건데, 할아버지가 저한테 물려주신 거란 말이에요. 제가 20골드 가져왔으니까 제발 돌려주세요.”
아까 제이든을 붙잡았던 잡화를 파는 노점상이 웬 소녀와 승강이 중이었다.
열두세 살이나 될까 싶은 여자아이는 간절한 눈으로 아까 본 새장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