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3화
43. 세 번째 유물(4)
눈 쌓인 북부의 산길을 썰매로 달렸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카이에른에서 동부로 가는 길은 벌써 봄빛이 완연했다.
“포이, 바람 냄새가 좋아?”
날이 좋아 그런지 아실리도 포이도 마차 안에 있지 않고 둘 다 마부석에 나와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실리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코를 위로 올린 채 봄 내음을 맡았고 포이는 제이든의 어깨 위까지 올라가서 한껏 코를 쳐들고 숨을 들이마셨다.
조그만 가슴이 바람을 잔뜩 삼키고 작은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사르르 꺼졌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에 파릇파릇 새잎이 돋은 것이 싱그러운 풍경 사이, 조그맣고 노란 꽃봉오리가 송이송이 맺힌 나무가 드문드문 보였다.
“산수유꽃이 벌써 피네.”
꽃향기가 달콤한지 포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기분 좋게 제이든의 귀에 얼굴을 비볐다.
“조금만 더 가서 점심 먹자. 꽃향기도 폴폴 풍기고 길도 예쁘고, 날씨도 좋아서 뭘 먹어도 맛있겠다.”
“포이잉.”
에른스트를 떠난 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혹시 의문의 노인과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제이든의 뒤를 쫓지나 않을지 은근히 걱정했는데 지난 일주일은 생각보다 너무 평화로워서 제이든도 차차 마음을 놓았다.
저만치서 마차가 하나 마주 온다.
제이든은 고삐를 당겨서 마차를 길 가장자리 쪽으로 몰았다.
반대편에서 오던 마차가 엇갈려 지나가면서 마부가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를 했다.
이쪽 마부석에 토끼와 고양이가 있는 것을 보고 함박웃음을 머금은 마부가 주머니에서 당근을 하나 꺼내 툭 던져 주었다.
당근을 받은 제이든이 인사를 하기 전에 포이가 먼저 앞발을 모은 채 머리를 까딱 숙였다.
마부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고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당근이나 각설탕은 말이 좋아하니까 마부라면 누구나 가지고 다닌다.
이쪽에도 충분히 있지만 저쪽 마부가 포이를 보고 뭔가 주고 싶었던 거겠지.
“우리 포이, 역시 인기가 많구나. 사람들 인심도 좋고.”
제이든은 당근을 잠깐 손에 쥐고 있다가 손바닥을 펴서 확인해 본 뒤에야 주머니칼로 당근을 얇게 썰어 포이에게 주었다.
포이는 앞발로 당근을 받아들고 앉아서 오독오독 먹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먹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항상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간식을 주거나 선물을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선물한 과자나 과일을 먹는 아실리와 포이를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제이든도 흐뭇해지곤 했었는데 에른스트의 일을 겪은 이후로는 낯선 사람이 주는 것을 먹이지 않게 되었다.
성녀의 반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며칠 전, 에른스트를 출발하고 이틀이 지났을 때, 길에서 조금 빠진 자리에 적당한 빈터가 있어 마차를 세워 놓고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와 토끼라니, 특이한 조합이네요?”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제이든보다 대여섯 살 위로 보이는 남자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그들 옆으로 가까이 오더니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말 등에서 내린 주머니를 폈다.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와 둥근 빵, 말린 과일 등이 나왔다.
“커피 향이 기가 막히는데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제이든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길래 흔쾌히 커피를 한 잔 따라주었다.
남자는 고맙게 커피를 받아 마시고 답례로 빵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제이든도 감사의 인사를 했고 포이가 말린 과일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나중에 준다고 달래서 미뤘다.
“토끼가 좋아할 텐데 주지 그래요. 나 아는 고양이도 말린 고구마 같은 걸 잘 먹던데.”
제이든이 바로 먹이지 않자 남자는 섭섭한 얼굴이었다.
“위장이 좀 예민한 아이라 조심해야 해서 그럽니다. 탈이 난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제이든은 웃는 얼굴로 양해를 구했고 포이는 내 위장이 예민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하긴, 토끼가 먹는 것에 예민하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네요.”
다행히 남자는 순순히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포이는 보통 토끼가 아니어서 먹는 것에 전혀 예민하지 않았지만.
제이든도 에른스트에서의 일을 겪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여행 중 낯선 사람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때로는 등을 맞대고 함께 노숙하기도 하는 게 카이엔 여행의 재미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에른스트에서 의문의 노인과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에게 포이와 포니가 납치된 일이 있었던 이후로는 타인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사 조심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눈치가 빤한 아실리는 제이든이 왜 그러는지 알았지만 어린 포이는 영문을 몰라 눈만 또록또록 굴리곤 했다.
남자는 재미가 없어졌는지 대충 요기를 하고 옷을 툭툭 털고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말을 타고 떠나 버렸다.
“좀 미안하네. 좋은 마음으로 준 걸 텐데.”
남자가 주고 간 말린 과일을 봉지에 넣던 제이든이 문득 손을 펴 보았다.
“어라?”
왼쪽 새끼손가락에 낀 비아트리스의 반지가 옅은 회색빛으로 탁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맑은 흰색이었던 것 같은데?
뭔가 묻었나 싶어 손을 닦으려던 제이든이 다시 놀랐다.
손을 닦기도 전에 반지가 다시 흰색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거 왜 이러지?”
-좀 전에 뭘 만졌어?
아실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아까 그 남자가 줬던 말린 과일.”
제이든이 다시 말린 과일을 집어 들자 반지가 또 회색으로 변했다.
“이거, 검사 한번 해 봐야겠네.”
그 후 제이든은 일부러 길을 조금 돌아서 이틀거리에 있는 이베스라는 도시에 들렀다.
원래 잡았던 경로에도 크고 작은 마을은 많았지만 이베스를 일부러 찾아간 것은 근교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유명한 약제사가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이든, 아실리,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리고 그 약제사는 제이든이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시오나 씨.”
이베스에서도 가장 중심가에 있는 깔끔한 이층집의 문을 열고 나온 여자는 제이든을 보고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베스까지 왔어요? 여기는 처음이죠? 어서 들어와요. 어머, 귀여운 토끼 친구도 왔네.”
연한 주홍빛 곱슬머리를 맵시 있게 땋아 올리고 연두색 눈을 반짝이는 삼십 대 후반의 여자는 시오나 아이리스로, 꽤나 저명한 약제사였다.
시오나는 약초를 다루고 약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일찍부터 일류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유명했고, 또 다른 면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넬리, 차랑 과자 좀 가져다줘. 손님은 커피, 나는 홍차, 그리고 사과랑 당근 좀 썰어오고.”
하녀가 대답하고 물러가자 시오나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우아하게 한 손으로 걷으며 제이든을 고급스럽게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했다.
시오나는 약제사로서의 능력 외에 이런 생활방식 면으로도 유명했다.
카이엔에서 약제사는 기본적으로 약초를 캐고 그 약초로 약을 짓는 사람이다.
산을 타는 일이 많기 때문에 대개 산 가까운 곳에 살고, 옷차림도 검소하고 간단하기 마련이었다.
여자 약제사는 대개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농가의 여인 같은 차림으로 다니는 경우가 흔했다.
사람을 구하는 치유사나 약제사는 검소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기도 했고.
하지만 시오나는 그런 통념을 무시하고 좋은 집, 예쁜 가구, 화려한 옷차림 등을 즐겼다.
“나 많이 버는데, 왜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좋은 데 살고 예쁘게 꾸미면 안 돼? 치유사나 약제사는 꼭 소박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법이 있나?”
시오나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던 초기에 그녀의 생활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면 시오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열흘씩, 한 달씩 산속 헤매고 약초에 묻혀 살다가 집에 와서 또 약 달이고 약 향에 푹 절어 사는데, 일 안 할 때 좀 꾸미고 살면 어때? 좋은 것도 먹고 쓰고.”
사실 약제사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면 그리 큰 부자가 되기 어려운 직종이다.
부자들은 마법을 쓸 수 있는 고급 치유사나 성력을 쓸 수 있는 사제나 신관을 선호했고 약제사는 주로 서민들이 찾기 때문이다.
대개 마을마다 약제사가 있고 약값 역시 그리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나는 자신만의 독특한 약을 여러 가지 개발해 낸 천재였고 그녀가 개발해 낸 약 중 한 가지가 문자 그대로 대박을 치면서 돈방석에 앉았던 것이다.
“시오네틴은 여전히 잘 나가죠?”
“응. 덕분에 이렇게 좋은 것도 먹고 좋은 집에 살고 그럴 수 있지.”
시오나는 섬세하게 장식된 과자를 들어 올리며 눈웃음을 쳤다.
그녀의 이름을 딴 약 시오네틴은 탈모 치료제 겸 발모제다.
시오나는 서른 초반에 시오네틴을 조제해 냈다. 원래는 다른 약을 연구하다가 부작용으로 머리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는데, 그녀가 개발한 수십 가지의 치료약을 다 합친 것보다 시오네틴이 더 잘 팔렸다.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량에 제한이 있어서 가격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시오나가 시오네틴을 독점 판매하고 조제법을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원이 아니라 장사꾼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오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개발한 약 중 질병에 관한 건 다 싸게 팔잖아. T형 기침약도 그렇고 두통약도 위장약도 다른 약제사보다 저렴하다고. 시오네틴은 목숨에 관계되는 약이 아니고 미용 처방인데 뭐. 독점으로 비싸게 팔아도 내 맘이지.”
시오나와 제이든이 알게 된 것은 삼 년 전 시오나가 아스토시엔 산에 약초를 캐러 왔을 때였다.
당시 시오나는 아스토시엔 산에서만 나는 약초 몇 가지를 채집하러 왔었는데 산속에서 오래 헤맨 데다 식량도 다 떨어져서 위험한 상태였다.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제이든이 마을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고집을 부리며 거절했다.
“고맙지만 버틸 수 있어. 괜찮으면 물만 좀 구해다 줄 수 있어?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못 찾을 것 같거든. 리리시나 풀은 일 년 중 이 시기에 아스토시엔에서만 구할 수 있단 말야. 이게 있어야 소아 피부병약을 만들 수 있는데, 겨우 군락지를 찾았는데 자리를 뜰 수 없어.”
그녀가 찾던 약초는 꽃이 피었다가 지기 직전에 채취해야 약효가 좋다고 했다.
가장 약성이 좋은 시기에 채취하기 위해 꼼짝도 않고 산속에서 며칠 밤을 새우는 그녀를 보고 제이든은 감탄하면서 물과 식량을 조달했었다.
원하던 약초를 캔 뒤 제이든이 아룬빌 마을에 데려다주자 그녀는 몸살이 났는지 며칠이나 심하게 병치레를 했다.
“약제사가 아프니까 웃기지?”
그녀는 신열로 달아오른 얼굴로 스스로 조제한 약을 먹으면서 몸조리를 했고 걱정이 되어 드나들던 제이든이나 아실리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아, 그때는 정말 고마웠지. 아룬빌 사람들도 다 좋았고. 그래서 두 달이나 머물렀잖아. 거기 약제사 할머니는 잘 계시지?”
아룬빌에서 약제사를 하던 미리암 할머니는 시오나가 머무는 두 달 동안 그녀와 친해져서 자신의 오두막 약제실을 그녀에게 마음대로 쓰도록 내주었다.
시오나는 답례로 미리암 할머니에게 새로운 약 제조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었고.
“그럼요. 시오나 씨한테 약 배웠다고 꽤 먼 마을에서도 찾아오고 그러는걸요.”
“안 그래도 올여름엔 아룬빌에 가야겠다 싶었는데 제이든이 왔네.”
시오나는 눈웃음을 치면서 찻잔을 들었다.
머리도 옷도 곱게 꾸몄지만 찻잔을 든 손가락 끝이 반들반들하고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게 약제사티가 났다.
오랫동안 약을 다루고 실험을 하는 동안 지문이 다 닳아 버리고 손끝이 푸르게 물든 것이다.
미리암 할머니 같은 경우는 손가락 두 개의 끝이 거의 녹아 버렸다.
“자, 그런데 어쩐 일이야? 그냥 들른 건 아니지?”
“예. 이거 좀 봐주셨으면 해서 가져왔어요.”
제이든은 이틀 전 지나가던 남자에게 얻었던 말린 과일 봉지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