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2화
43. 세 번째 유물(3)
비아트리스의 반지는 에트루리안의 서나 레칸도르의 금척처럼 전설적인 유물은 아니었다.
여신 노스티에라의 축복을 받은 성녀 비아트리스의 유품이라는 가치가 있을 뿐 특별한 보물이 아니어서 수집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고, 성녀 비아트리스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노스티에라의 사원에서 그녀의 다른 유품들과 함께 여신에게 봉헌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아트리스는 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기에 남긴 물건도 별로 없었다.
그녀가 남긴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간주되는 예언서만 노스티에라의 대신전에 보내어 따로 관리했을 뿐 몇 가지 안 되는 소박한 유품은 작은 함에 넣어 여신에게 봉헌하는 절차를 거친 뒤 사원에서 보관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비아트리스의 유품은 언제인지 모르게 분실되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녀가 쓰던 물건 몇 가지만 사라졌을 뿐 예언서는 무사했으므로 크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제이든 역시 처음 네 가지 유물을 찾아야 한다는 임무를 받았을 때, 다른 전설적 유물들 사이에 비아트리스의 반지가 섞여 있는 것이 조금 의아했었는데.
‘그 반지를 여기서 찾네.’
“특별한 반지인가요? 뭔지 아시는 것 같은데.”
레노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이든의 손바닥 위를 바라보았다.
“예. 이게 말이죠.”
제이든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데도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성녀 비아트리스의 반지라고 생각합니다.”
“!”
“다른 사람들에겐 이걸 찾았다는 말은 말아 주세요.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게 없을 듯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니콜레타 님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니콜레타 님이라면 괜찮습니다.”
반지는 광택 없는 백색이었지만 은이나 백금은 아니고 카이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백석 재질이었다.
설백석은 터키석이나 석류석처럼 준보석으로 분류되는 광물인데, 카이엔의 북부 지방에서는 흔한 편이라 준보석 중에서도 대중적이고 가격도 저렴했다.
잘 닦으면 은처럼 반짝이지만 그냥 두면 은처럼 검게 변색하는 게 아니라 광택 없는 백색 또는 옅은 회백색으로 변한다.
“설백석이라, 노스티에라의 사제다운 반지네요.”
노스티에라는 겨울의 여신이고, 설백석은 이름만 보아도 겨울의 광석이라 노스티에라 신전에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노스티에라 여신의 분위기에 다른 보석보다 잘 어울리기도 하고.
‘다른 유물들처럼 전설적인 유물은 아니지만 이 반지에도 분명히 의미가 있겠지. 숨겨진 능력이 있을 수도 있고.’
세시온의 서재에 가져가면 다른 유물들과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면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더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워낙 작아서 잃어버리기 쉽겠다. 주머니에는 불안해서 못 넣겠고, 목에는 이미 아마릴리스의 은화를 걸고 있고.
그렇다고 손가락에 끼기에는 반지가 너무 작은데.
제이든은 반지를 들어 손가락에 대 보았다.
비아트리스 성녀는 손가락이 매우 가늘었는지 반지는 아주 작았다.
제이든의 손가락이 남자 손 치고는 가늘고 긴 편인데 새끼손가락에 껴도 작을 것 같았다.
한번 껴 보기나 할까 싶어 왼손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보았다.
‘어?’
반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든의 손가락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이든이 반지를 낀 것이 아니라 반지가 살아서 움직인 것처럼.
“어머, 작아 보였는데 꼭 맞네요. 스스로 조정을 한 건가.”
레노아도 제이든의 손가락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냥 끼고 계셔도 되겠어요. 아무도 그게 성녀의 반지라고는 모를 거예요.”
“예.”
제이든도 손가락을 몇 번 굽혔다 폈다 해 보면서 대답했다.
반지는 워낙 평범한 모양이고 잘 알려진 유물도 아니어서 누가 알아볼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치 손가락의 일부가 된 것처럼 전혀 이물감 없이 편안한 것이 낀 것 같지도 않아서 계속 끼고 있어도 될 듯했다.
“아스토시엔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동부로 가실 건가요?”
레노아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예. 동부에서 꼭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요.”
제이든은 전처럼 유물을 얻자마자 숨겨진 계곡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부 하이옌 항구로 가던 길을 계속 가서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먼저 확인할 예정이었다.
“니콜레타 님이 지금은 연락이 어려우신 상황인데, 조만간 연락하실 겁니다.”
“예. 영상구 잘 보관하겠습니다.”
“치안국에서 각 지역 치안대에 혹시 제이든 씨가 도움을 청하면 즉시 협조하도록 공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지역 치안대로 연락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드렸던 화로를 제게 주세요. 불을 피우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게 수정이 가능할지 보겠습니다.”
“예, 아 참.”
제이든이 레노아를 돌아보았다.
“전에 마법사 집안은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집안 어른이나 친척 중에 다른 마법사는 없습니까?”
레노아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음, 저도 마법사로는 재능이 무척 늦게 발현된 편이고 집안에 마법사는 없었습니다만…….”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먼 친척 중에 연금술을 익히셨던 분은 한 분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신데 촌수도 멀고 고향을 일찍 떠나셨기 때문에 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제이든은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중에 니콜레타에게 따로 물어볼 셈이었다.
환각 속에서 두건에 가려졌던 마법사의 얼굴을 잠깐 봤을 뿐이지만, 왠지 그 얼굴이 레노아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원래 조각가가 되려고 했었다 그랬지?’
레노아의 고향인 리카노스 섬은 예로부터 조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카리온이나 레안드로처럼 저명한 조각가들이 그곳 출신이었고, 제이든이 처음으로 과거를 들여다본 유물인 회색의 소녀도 리카노스 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레노아와 혈연관계는 없어도 리카노스 섬 출신일 수는 있겠지.
* * *
“3주만 기다리면 우리랑 같이 갈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여정도 안전할 테고.”
“괜찮습니다. 백작님. 제가 빨리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포니의 유괴 사건이 사실 제이든을 노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레노아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치안국의 고위 간부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아카디아 백작은 계속 제이든에게 고마워했다.
백작이 일을 마치고 동부로 돌아갈 때 함께 가자고 했지만 제이든은 따로 하이옌으로 가고 싶었다.
하이옌까지 마차로 두 달 이상 걸릴 텐데, 아카디아 백작이 수도에서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만도 3주 이상 걸린다고 하고, 일행에 섞여 간다면 동부까지 가는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포포즈에게는 미안하지만 따로 가는 게 편했다.
“포잇, 포잇!”
포니와 포이가 두 마리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왔다.
“제이든 아저씨, 하이옌에서 일 끝나면 꼭 아카디아에 들러 주세요. 꼭이요. 별로 안 멀어요.”
포이와 포니는 며칠간 함께 지내며 요리도 만들고,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트라우마를 많이 해소한 듯했다.
포니를 위해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에른스트 관에 머물며 아이들이 즐거워할 만한 마법을 보여주는 레티샤도 도움이 많이 되었고.
레티샤 세이녹의 첫인상은 다소 차갑고 무뚝뚝해 보였는데 의외로 속이 따뜻한 사람 같았다.
포니와도 잘 맞아서 좋은 사제지간이 될 것으로 보였다.
“포이, 잘 가, 곧 또 만나자.”
“포잇, 포이잇!”
포포즈는 안녕, 안녕, 하면서 포옹을 백 번쯤 하는 것 같았다.
“제이든 씨, 주무실 때 이거 꼭 잊지 말고 켜세요.”
마차가 막 출발할 때쯤, 어디론가 사라졌던 레노아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달려왔다.
그녀가 내민 것은 며칠 전 레노아가 받아 갔던 화로였다.
겨울에 노숙할 때 정말 잘 썼던 것인데 열기가 상당해서 날이 풀린 이후에는 쓰기가 어렵겠다 싶었는데.
“이거 여름에도 쓸 수 있게 술식을 수정했습니다. 저 혼자 바꾸기는 어려워서 마탑의 선배님께 부탁했는데 이제야 도착했네요.”
레노아는 드물게 뿌듯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먼 길 가실 때 걱정이 많이 됐는데, 화로를 수정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밤에 꼭 켜세요. 악의를 가진 자가 화로의 간격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건 아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든든한데요?”
제이든도 한결 안심이 되었다.
“전과 같은 주문으로 사용이 가능한가요?”
“아니에요. 그건 화로로 쓸 때 사용하는 주문이고, 불 없이 사용할 주문은 따로 하나 더 외우셔야 합니다. 자, 따라 하세요.”
레노아는 마법사 특유의 높낮이가 있는 어조로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뚝뚝 끊기면 안 됩니다. 주문이 흐르는 물처럼 이어지도록 영창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에…….”
“운율의 폭이 너무 크지 않게, 잔잔하면서 힘있게, 리듬을 잃지 말고.”
랩인가…….
* * *
-몇 소절 된다고 외우는 데 그렇게 버벅거렸어?
마차가 출발한 후, 마부석에 올라온 아실리가 혼자 주문을 되읊어 보는 제이든을 보고 눈웃음을 쳤다.
“아니, 주문이 길기도 하지만 리듬에 맞춰서 이어 읊는 게 좀 힘들었어.”
말고삐를 잡은 제이든이 아실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도구 사용 주문이 원래 이렇게 긴 거야? 전투할 때 이렇게 주문이 길면 영창 끝나기도 전에 맞아 죽겠는데?”
-그럴 리가 있어? 공격형이건 방어형이건 전투용 마법 주문은 대개 짧아. 더 짧게 만들려고 마법사들도 연구 많이 하고.
아실리가 앞발을 낼름 핥았다.
-가끔 멋있는 이름 붙이려고 길게 주문 만드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능력 부족이든지 아니면 멋 부리는 걸 너무 좋아하는 취향이든지 그런 거고.
“흠.”
-효과가 굉장히 좋은데도 시동 주문이 너무 길면 실전에서는 못 써. 그런 마법도 몇 가지 있어서 마법사들이 시동어를 짧게 하려고 연구 중이지.
“전에 보니까 니콜레타 님은 마법 쓸 때 손뼉만 딱 치는 경우도 있던데?”
-시동어가 필요 없는 마법도 있어. 간단한 마법이거나 힐링 계열 마법에 그런 게 많고. 근데 니콜레타 님 정도 되면 웬만한 마법은 시동 주문 없이도 가능해.
“근데 이 화로 주문은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 전에는 짧았는데 지금은 완전 랩이야.”
-랩이 뭐야?
“그런 게 있어.”
-제이든이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렇지.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려니까 주문이 길어졌을 거야. 시간이 좀 있었으면 지난번처럼 더 짧게 다듬어 줬을 텐데 이번엔 시간이 없어서 주문이 긴 것 같네. 외우긴 다 외웠어?
“응. 혹시 잊어버릴까 봐 적어 놓기도 했어.”
-아하, 그 이상한 글자로?
“이상한 글자라니! 얼마나 훌륭한 글자인데! 그 주문을 받아 적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글자라고!”
배낭 속, 간단한 그림도 그리고 메모도 하고 가끔은 일기도 쓰는 스케치북의 뒷면에 주문도 조그맣게 적어 놓았다.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없을 한글로.
발음이 똑같지는 않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적어 놓았으니 보면 기억날 것이다.
-주문 길다고 못 외워서 적어 놓은 거지?
“왜 못 외워? 나도 남의 나라 글자가 아니라 우리 말이면 얼마든지 외운다고.”
-흠, 그럼 제이든네 말로 주문 긴 거 외우는 거 있어?
“있지 왜 없어?”
제이든은 한번 숨을 들이마신 뒤 운율을 붙여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밋디 아니할쎄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할빼이셔도…….”
#작가의 말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