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1화
43. 세 번째 유물(2)
“잠깐 저 혼자서 보겠습니다.”
제이든이 말하자 레노아는 눈치 좋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무너진 출입구 바깥을 지키고 서 있던 치안대원이 궁금한지 안뜰 쪽을 들여다보면서 레노아에게 한눈을 팔다가 눈이라도 마주쳤는지 얼굴을 붉히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이든은 우물의 가장자리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돌 사이에 끼어 있는 블루스톤을 살짝 만져보았다.
마법사들이 이미 블루스톤의 조사를 마쳤는데, 이 블루스톤이 평범한 돌로 보이는 것은 환영 마법의 힘이 아니라고 했다.
“환각 속에서 보신 사람이 마법사라고 했죠?”
“예. 그렇게 말하던데요.”
블루스톤을 조사한 뒤 마법사들이 물었을 때 제이든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수도원장 옆에서 우물에 블루스톤을 설치하고 있던 사람은 분명히 마법사였다.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마법사라면 환영 마법으로 블루스톤을 돌처럼 보이게 하는 건 쉬운 일이죠. 하지만 환영 마법은 영구적인 게 아니거든요.”
“아, 그렇다면서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에 아실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환영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꽤 많지만 한 번에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짧으면 몇 분, 대개는 한 시간쯤, 길어도 이삼일 정도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렇죠. 몇 년씩 시간이 지나도 환영이 풀리지 않는, 반영구적인 환영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역대 마탑주들을 비롯해 몇 명 정도에 불과하고요.”
그런 반영구적 환영 마법을 덮어쓰고 있는 게 우리 포이지.
“그러니까 일반적인 환영 마법을 긴 시간 유지하려면 마탑주에 버금가는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강력한 마도구를 매개체로 사용해야 해요.”
“아, 그럼 블루스톤이?”
“아니, 아니에요.”
레티샤가 청백색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머리를 흔들었고 레노아가 설명했다.
“이 블루스톤은 우물의 입구를 숨기는 매개체로 사용되기는 했는데, 환영 마법의 매개체는 아니에요. 이 블루스톤이 돌로 보이는 건 뭐랄까, 마법이 아니라 연금술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싶네요.”
마법사들의 말에 따르면 블루스톤에 환영 마법을 걸어서 돌로 보이게 한 것이 아니라 화학적 처리를 해서 돌과 똑같이 보일 수 있게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연금술이라면 돌이나 모래, 구리 같은 걸 황금이나 은으로 바꾼다는 기술 아닌가요?”
제이든이 묻자 마법사들이 웃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그렇지요. 하지만 물질의 본질을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한 연금술사는 아직 없습니다. 형태를 바꾸는 기술은 여러 가지 나왔지만요.”
“제가 보기엔 어느 쪽이나 다 마법 같은데요.”
“문외한이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법사와 연금술사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쩌다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는 있지만 사용하는 기술이 뿌리부터 달라요.”
음, 어쨌든 제이든이 이해하기로는 연금술사는 마법이 아니라 화학자에 더 가깝다는 것 같았다.
우물의 가장자리에 사용된 블루스톤은 마법으로 형태를 바꾼 게 아니라 연금술로 바꾼 거고.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비밀 통로를 숨기는 데는 마법이 사용되었다면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블루스톤을 돌로 바꾸는 데 마법이 사용되었든, 아니면 좀 더 아날로그에 가까운 연금술이 사용되었든 왜 구별이 필요한가 싶어 제이든은 눈만 멀뚱거렸다.
“연금술사 중에는, 음,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흑마법과 가까운 사람이 간간 나오거든요.”
마법사는 타고난 마법 재능이 필요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내려오는 마법의 복잡한 술식과 주문 등을 오랜 시간 익히면서 마법 등급을 높여 간다.
매개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법을 보조하는 역할이고, 생명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반면에 흑마법은 효과를 높일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법계에서 금하고 있는 산 생명을 매개체로 사용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시체도 이용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익히는 술식보다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한다.
정도를 걷지 않는 대신 빠른 시일 내에 실력이 오르고, 일반적인 마법에서 나올 수 없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흑마법에 빠질수록 심신이 피폐해지고 인간성을 잃고 몸이 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일단 흑마법의 힘에 취하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되는 면에서 마약과 흑마법이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것이다.
연금술이 흑마법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위험성이 높다는 말은, 연금술이 태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실험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옛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가마솥에 온갖 재료를 넣고 끓이는 마녀의 모습은 어쩌면 연금술사와 더 닮은 형태일 수 있었다.
온갖 재료를 온갖 방법으로 실험해 보는 연금술사들은 가끔 금지된 재료, 금지된 실험 방식의 유혹을 받곤 한다.
“아무튼, 이 블루스톤의 가공 방식이 연금술의 형태여서 마법사들이 좀 예민하게 살피는 거예요.”
리카르도는 블루스톤을 제거해서 치안국이나 마탑에 보내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블루스톤을 현재 위치에서 제거하면 비밀 통로의 입구가 사라지거나 무너져 버릴 확률이 있어 일단 제자리에 둔 채 고위 마법사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제이든은 연금술에 대해 들은 걸 생각하면서 다시 블루스톤을 살짝 만져보았다.
그가 환각 속에서 본 걸 돌이켜보면, 이 비밀 통로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아트리스 성녀가 남긴 글을 보고 이 지하 통로를 비밀리에 정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미하일로 그린코프가 수도원장으로 자원해 왔고, 남몰래 마법사인지 연금술사인지 조력자를 불러 통로를 정비했다.
언젠가 찾아올 인연 있는 자를 위해.
그리고 그 인연 있는 자는 제이든 자신이었다.
이 짧고 허술한 통로가 오랜 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것,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나 의문의 노인처럼 뛰어난 마법사의 눈까지 피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오직 제이든에게만 보인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었다.
무엇인가 자신이 찾아내지 못한 것, 더 봐야 할 것이 있을 것만 같았다.
레노아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고 아실리와 포이는 에른스트 관에 두고 왔으므로 제이든은 지금 혼자였다.
‘혼자 환각에 들어가지 말라고 아실리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줬지만…….’
잠시 망설이던 제이든이 눈을 감았다.
* * *
“삐루루루”
어디선가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깜짝이야!”
회색 수사복을 입고 있던 사람이 놀랐는지 펄쩍 뛰었다.
지난번 환각에 나왔던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어허, 무슨 마법사가 그렇게 간이 작아?”
옆에 있던 수사-미하일로 그린코프로 추정되는 수도원장이 핀잔을 주자 마법사가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두건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의외로 조각처럼 단정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 두건 밑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걷어 올리며 마법사가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섬세한 사람이라 그래요. 마법사는 원래 예민하지만 저는 더 그렇다고요. 말했잖아요. 원래는 예술가가 될 뻔했다고.”
“그래, 그래, 자네 손 섬세한 거 아니까 일부러 불러왔지. 그거나 빨리 묻게.”
“그런데 이거 성물 아닌가요? 이렇게 갖고 나오셔도 됩니까?”
“성물의 주인이 후일 인연 있는 자가 찾으러 올 테니 여기다 묻으라고 한 거라네.”
“흠.”
“아무도 모르게 말이지…….”
원장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지자 마법사가 흠칫하면서 토끼처럼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원장님, 설마 저를?”
“…….”
원장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마법사는 양팔로 과장되게 제 몸을 감쌌다.
“그러지 마세요. 원장님. 살인멸구하실까 봐 무섭습니다.”
잠깐 그를 노려보던 원장이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탄식했다.
“세상에 마법사가 하나둘이 아니건만 내가 왜 하필 저 화상을 불렀을까.”
마법사가 넉살 좋게 원장의 옆으로 다가붙었다.
“그야, 보통 마법사는 이런 식으로 일하지 못하니까 그렇겠죠?”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과 손톱만 한 블루스톤 조각을 꺼내더니 조금 전에 들고 있던 그릇에 뚜껑을 따서 부었다.
“그리고 제가 입도 참 무겁고요.”
그는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똑 꺾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있는 자리는 우물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줄기 아래쪽에 구멍이 뚫린 나무 옆에 서 있었다.
지금과는 모습이 다르긴 했지만 우물의 비밀 통로 출구가 나 있던 뒷산의 나무 옆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마법사는 금방 꺾은 나뭇가지로 그릇에 담긴 용액을 살살 젓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는 점점 짧아지면서 용액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이제 됐습니다. 나무가 자기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걸요?”
마법사는 쭈그리고 앉더니 미리 파 놓은 듯한 구멍에 조심스럽게 용액을 부었다.
잠시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가 일어서면서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보셨죠? 뿌리가 성물을 자연스럽게 흡수했습니다. 이거 말이 쉽지 아무나 절대 못 하는 일…….”
“알았네, 알았어. 얼른 흙이나 덮자고.”
“히잉!”
“자네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소리를 내는가?”
원장이 몸서리를 치자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어때요? 원장님에 비하면 사십이 넘었든 오십이 넘었든 어린애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빨리 흙이나 덮게. 야밤에 이런 비밀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네처럼 말 많은 사람이 어딨나?”
“결계 쳤는데요, 뭐. 아무도 우리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고요.”
원장은 입을 다문 채 큰 숨을 내쉬는 모습이 속으로 ‘참을 인(忍)’ 자라도 몇 번 쓰는 것 같았다. 카이엔에서 쓰는 글자는 물론 다르겠지만.
구시렁거리면서도 흙을 덮고 토닥토닥 두드린 후 발로 콩콩 다지기까지 한 마법사가 뭔가 주문을 외운 뒤 물러서자 원장이 나무 옆에 다가섰다.
원장이 나무를 쓰다듬자 그의 손에서부터 은은한 빛무리가 시작되어 나무 전체를 감싸고 주변의 나무와 땅까지 퍼져 나가서 마치 서리가 내린 것처럼 반짝였다.
마치 뒷산의 그 부분만 가위로 동그랗게 오려낸 것처럼 한동안 반짝거리던 빛무리가 사라지면서 다시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 가지.”
원장이 나무에서 물러서자 마법사가 손뼉을 칠 기세로 말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원장님. 성력이 그냥……, 어휴, 넘쳐흐르시네요.”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자고.”
“예, 그런데 원장님, 후일 그 인연이 있는 자가 온다고 해도 저거 어떻게 찾습니까? 일반인은 당연히 못 볼 테고 마나를 쓰지 않았으니 마법사도 못 느낄 텐데?”
“그러니까 인연이 있는 자라고 하겠지.”
“제가 손댄 물건을 알아보려면 1급 감정사쯤은 되어야……, 그런데 일단 눈앞에 보여야 감정을 할 텐데 저렇게 묻어 놓으면…….”
마치 도망가는 듯 걸음을 빨리해서 사라지는 원장의 뒤를 쫓아가는 마법사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제이든도 환각에서 깨어났다.
“뭔가 보셨습니까?”
제이든이 일어서서 두리번거리자 다가온 레노아가 물었다.
“예. 뒷산 출구에 가 봐야겠습니다. 그쪽도 지키는 사람이 있나요?”
“치안대원이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삽 같은 게 있을까요?”
수도원의 헛간이 있던 자리에서 낡은 삽을 하나 찾아든 제이든은 레노아와 함께 뒷산으로 왔다.
출구가 있던 나무는 환각 속에서 본 것보다는 훨씬 크고 수령도 오래되어 보였지만 분명히 그 나무였다.
땅 위로 나무뿌리가 몇 군데나 드러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수도원장과 마법사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제이든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거기를 파면 됩니까?”
제이든이 땅을 파는 걸 본 레노아가 물었다.
“예, 뿌리가 상하지 않게 파야 하는데요.”
“잠깐 비켜 보시지요.”
제이든을 물러서게 한 레노아가 손을 모은 채 노랫가락 같은 주문을 외웠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노랫소리 같은 주문과 함께 나무뿌리 주변에서 흙이 일어섰다.
눈가루가 일어나듯 흙이 피어오르면서 자리를 옮기더니 제이든이 삽질하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팬 채 나무뿌리가 훤히 드러났다.
“이 정도면 됐을까요?”
“……예.”
제이든은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삽을 훌쩍 던져 버리고 앉아서 나무뿌리를 들여다보았다.
다 똑같은 나무뿌리로 보였지만, 한참 보고 있자니 제이든을 끌어당기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제이든은 손을 내밀어 굵은 뿌리 옆에 난 잔뿌리 하나를 꺾었다.
손바닥 위에 올린 잔뿌리는 햇빛을 받자 색이 조금씩 엷어지더니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반지……, 아닙니까?”
“예. 그러네요.”
제이든의 손바닥 위에는 나무뿌리는 온데간데없고 빛바랜 은빛 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제이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찾아야 하는 네 가지 유물 중 하나, 성녀 비아트리스의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