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50화
43. 세 번째 유물(1)
“제이든 씨, 뭘 하고 계십니까?”
에른스트 관의 주방에 들어선 레노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기분 전환입니다. 기분 전환.”
제이든이 지휘봉처럼 들고 있던 주걱을 흔들었고 앞치마를 두른 채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던 포니가 코끝에 밀가루를 묻힌 채 활기차게 대답했다.
“과자를 만들고 있어요. 제이든 아저씨랑 포이랑!”
“포잇!”
주방 식탁 위에 뒷발로 서 있던 포이도 레노아를 향해 하얀 앞발을 흔들었다.
“그런 앞치마는 어디서 났나요?”
포이의 통통한 배에 두른 손바닥만 한 앞치마를 보며 레노아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물었다.
“이거요? 에이미가 만들어 줬어요. 귀엽죠?”
포니가 빙글 돌면서 하얀 앞치마를 팔락거린 후 포이가 두르고 있는 하늘색 앞치마를 손으로 가리키자 포이가 잘 보이도록 배를 내밀었다.
“어, 음, 포이도 마음에 드나 보네요.”
레노아가 웃자 포니가 한쪽 구석에 비켜 앉은 아실리에게 쫓아가서 손짓을 했다.
“이것 봐요. 아실리 것도 만들어 줬는데 아실리는 부끄러운가 봐요.”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채 앉아 있던 아실리가 포니의 손을 피하며 냐앙 울었다.
-밀가루 튄다.
제이든이 아실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애들이 즐거워하니까 좀 봐줘.”
“미야옹.”
고양이는 체념한 듯한 얼굴로 털에 묻은 밀가루 반죽을 핥았다.
“털에 묻었구나. 미안, 아실리. 대신 맛있는 과자 만들어 줄게!”
씩씩하게 외친 포니가 다시 반죽을 힘차게 주무르기 시작했고 포이가 옆에서 응원하듯이 포잇거렸다.
“제이든 씨가 수고 많으시네요.”
“뭐 별다른 것도 아닌데 아가씨랑 포이가 재미있어하니까 다행이지요.”
제이든은 원래 에른스트 관에서 하루만 묵고 동부로 떠날 예정이었고 아카디아 백작 일행도 다른 일정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포니의 유괴 사건 이후 수습도 필요했고 포니가 안정될 시간도 필요해서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는데, 큰일을 겪은 포니와 포이는 둘 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포이는 하루 푹 자고 나니까 괜찮은 것 같았는데 포니는 악몽을 꾸고 깨기도 하고 낮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나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포이, 우리 인형 가지고 놀까?”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씩씩한 척하려는 게 더 안쓰러웠다.
아카디아 백작이 부른 치유사도 와서 포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힐링도 해주었지만 제이든은 나름대로 포니와 포이가 기운을 내게 해주고 싶었다.
유괴 이후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고 싶어 하지 않아서 에른스트 관의 주방을 빌려 과자 만들기를 해봤더니 둘 다 무척 좋아했다.
제이든은 요리사의 앞치마를 빌렸고, 포니의 보모가 앞치마 세 개를 만들었는데 소녀와 토끼와 고양이가 모두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보는 사람마다 웃음을 자아냈다.
“이거 드셔 보세요. 어제 만든 겁니다.”
제이든이 내민 접시 위의 쿠키는 주먹으로 대충 뭉친 것처럼 모양새가 투박한데 크기도 들쑥날쑥했다.
노릇노릇하지 않고 거무스름한 것이 좀 탄 것 같기도 하고, 반죽이 고르게 되지 않았는지 안에 든 초콜릿 조각도 많이 든 것과 거의 안 든 것까지 중구난방이었다.
레노아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이든과 쿠키 접시를 번갈아 바라보자 제이든이 싱긋 웃었다.
“생긴 건 이래도 맛은 제법이랍니다. 포니 아가씨가 손맛이 있어요.”
안 보는 척하면서 레노아를 곁눈질해 보는 포니의 반짝거리는 눈길을 느낀 레노아가 쿠키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타기 직전까지 구워낸 듯한 색깔로 보면 좀 씁쓸할 것 같았지만 참지 뭐.
“아니, 이거……, 맛있네요?”
기대하지 않았던 맛에 놀란 레노아가 중얼거리자 포니와 포이가 동시에 팔짝거리고 뛰었다.
“포잇!”
“그쵸? 맛있죠? 내가 만든 거예요!”
신이 나서 폴짝거리는 포니를 보며 레노아가 웃었다.
“네, 정말 맛있어요. 아가씨 솜씨가 좋네요.”
“에헤헤, 제이든 아저씨가 잘 가르쳐 줬어요. 우리 포이도 옆에서 응원 많이 해주고.”
포니가 밀가루 묻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은 더 맛있는 걸 만들 거예요!”
“포잇!”
“오늘은 초콜릿 말고 말린 과일을 넣자.”
“포잇포잇!”
둘이 머리를 맞대고 반죽에 말린 과일을 넣는 모습을 보며 레노아가 속삭였다.
“포니 아가씨가 많이 안정되었네요. 그새 밝아졌어요.”
“예. 어제는 악몽도 안 꾸고 편히 잤다더군요.”
레노아는 아실리의 옆으로 비켜서서 제이든이 포이와 포니를 감독하면서 과일 반죽을 쿠키 팬에 한 수저씩 떼어 놓고 화덕에 넣는 것까지 구경했다.
“자, 이제 손 씻고 뒷정리를 하고 과자가 잘 구워질 때까지 기다리자. 어제보다 조금 빨리 꺼내는 게 좋겠지?”
“네엥.”
제이든이 손을 씻고 앞치마를 풀면서 레노아에게 오자 레노아가 빙긋 웃었다.
“그거 잘 어울리시는데요.”
“예? 아, 앞치마요?”
제이든이 멋쩍게 웃자 레노아가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수도원장 말입니다. 누군지 알아냈다고 말씀드리러 왔는데 바쁘셔서요.”
“아,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 드릴게요.”
제이든은 자기 주방이나 되는 것처럼 주전자와 찻잔을 꺼냈고 레노아는 식탁에 앉아서 종이 두루마리를 폈다.
“그 수도원은 원래 주신 슈라와 농사의 여신 세미티나를 모시는 수사들이 수도하는 곳이었답니다.”
다신교를 인정하는 카이엔이라, 특정 신을 모시는 신전이 아니고 수도하는 수사들이 모이는 수도원은 특정 신의 신자만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도원마다 주류는 있게 마련이었다.
“수도원장도 대대로 슈라의 사제나 세미티나의 사제 출신이 맡는 것이 관례였는데, 작은 수도원인 만큼 크게 이름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십 년쯤 전 새로 부임한 원장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수도원마다 기록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 수사들이 꼭 한두 명씩은 있잖습니까?”
레노아가 펼쳐 보이는 두루마리를 보며 제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서도 중세 시대의 성당과 수도원은 문학, 미술, 학문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사관 못지않게 기록을 중요시하는 수도원들도 있어서 역사를 파악하는 데도 수도원들의 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오십 년쯤 전에는 이미 이 수도원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어서 새로 오는 수사도 없을 무렵인데, 생각지 못한 거물이 원장으로 왔던 겁니다. 은퇴 후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고 싶다면서요.”
당시 수도원은 전 원장이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신임 원장을 맡을 사람을 구하지 못해 한동안 원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수사도 많지 않았던 터라 수사 중 경력이 오랜 이가 원장 대리를 맡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미하일로 그린코프라는 거물이 원장으로 왔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북부 출신이죠. 겨울의 여신 노스티에라의 대사제를 지냈던 명망 높은 사람으로 북부 지방에서는 어느 영지에서나 주교급 대우를 받으며 공식 행사 때마다 초빙되어 가던 사람이었대요.”
나이가 꽤 들었음에도 공적 활동을 활발하게 지속해 가던 그가 언젠가부터 노환을 핑계로 공적 활동을 줄이더니, 얼마 되지 않아 공직을 모두 은퇴하고 조용한 수도원에서 요양하겠다면서 이 수도원 원장 자리를 자원했던 것이다.
원래 그가 활동하던 지역도 아니고, 명성에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어서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이 수도원으로 왔고 그 후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십여 년간 조용히 원장 역할을 수행했다.
“제이든 씨가 환각 속에서 보았다는 수도원장이 아무래도 이 사람인 것 같아요. 노스티에라 여신의 신전 대사제 출신이니까 비아트리스 성녀가 남긴 글을 접할 기회도 있었을 테고요. 초상화 한번 보시겠어요?”
레노아는 그의 초상화까지 구해 왔다.
“환각 속에서도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데, 말씀 들어보면 맞을 것 같긴 하네요. 혹시 같이 있었던 마법사에 대해서도 짐작 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미하일로 그린코프 사제가 활동 기간도 길고 명망도 높았던 만큼 친분 있는 마법사는 많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가 원장 재직 중에 수도원을 방문한 마법사도 꽤 여러 명이어서, 제이든 씨가 환각 속에서 보신 마법사가 누구인지는 특정 짓기가 어렵네요.”
제이든은 곰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레노아에게 말했다.
“저, 그 수도원의 지하에 한 번 더 가보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레노아는 영민한 눈으로 제이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제의 수도원 지하는 이미 치안대원들과 마법사들이 함께 샅샅이 조사해 본 뒤였다.
하지만 제이든이 가보고 싶어 한다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몇 번 같이 일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레노아는 제이든이 평범한 감정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레노아는 제이든이 카이엔이라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와중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할 인물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카이엔에서는 ‘인연’에 남다른 의미를 두고 있는데 제이든은 놀라운 ‘인연’을 많이 보여주었다.
인연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으니 수도원의 지하에 제이든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것이 제이든에게는 보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시죠.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 * *
수도원에는 두 군데의 지하 공간이 있었다.
제이든과 포니, 포이가 갇혀 있었던 곳은 원래 수도원에 마련되어 있던 지하 공간으로, 서고, 기록 보관실, 식료품 저장고, 포도주 저장고 등이 있는 곳이었다.
우물 아래의 지하 통로는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토끼굴 같은 통로였다.
대륙전쟁을 겪으면서 부유한 저택이나 신전 등에서 유사시 탈출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는데, 이 통로 역시 아마 수도원이 번창했을 시절에 만들어 둔 탈출로였던 것 같았다.
건물을 빠져나가는 것만 목적으로 한 통로여서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토굴이었는데, 원래는 입구가 우물 아래가 아니라 건물 지하의 기록 보관실이었던 것 같았다.
전쟁 후 세월이 지나면서 쓸 일이 없었던 통로는 무너진 채 잊혀졌던 것 같았는데, 제이든이 환각 속에서 보았던 그때 마법사와 수도원장이 우물 아래에 입구를 새로 만들고 거기서부터 뒷산까지 출입이 가능하도록 통로를 재정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인연’이 있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도록 마법도 걸어두고.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면 건물 지하에 있을 확률이 높을 듯해 제이든은 자신이 갇혀 있었던 기록 보관실이나 포니와 포이가 갇혀 있었던 옛 포도주 저장고 자리 등을 살펴보았지만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우물 밑의 지하 통로도 두 번이나 입구부터 출구까지 걸어 봤지만 이쪽은 더 볼 게 없었다.
흙으로 이루어진 토굴에 딱 두 개 박혀 있는 마정석에서 희미한 빛이 나올 뿐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네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제이든이 말하자 레노아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것도 소득이지요. 그럼 에른스트 관으로 돌아가실까요?”
“예.”
대답을 하고 수도원을 나오려던 제이든이 멈춰 섰다.
“아, 잠깐만요. 하나만 더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