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9화
42. 탈출(2)
장신의 마법사는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듯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그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듯 주변으로 죄어들던 어둠 역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세르지오…….”
수정 영상구 안에서 다시 니콜레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프고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세르지오, 네가 어찌 이런 일을 하느냐?”
“…….”
“거기 있거라. 내가 곧 도착하마. 나와 이야기를 좀…….”
니콜레타의 이야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세르지오는 펄쩍 뛰었다.
도도한 자신감이 넘쳐흐르던 귀족적인 얼굴을 보기 흉하게 찡그리면서 두건을 뒤집어쓰는가 했는데 갑자기 그의 모습이 그림자 속으로 푹 꺼졌다.
다음 순간 일행을 숨 막히게 내리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땅에 가라앉을 것처럼 내려왔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하게 높았고, 흔들리고 있던 주변도 멀쩡하게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레노아가 제이든을 돌아보자 제이든이 맨땅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현기증이 덮쳐와 머리가 핑 돌았다.
“우아아앙!”
그제야 포니가 울음을 터뜨리며 제이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 *
“이거 좀 드세요.”
레노아가 뜨겁고 진한 커피가 든 컵을 제이든에게 밀어주었다.
“고맙습니다. 포니 아가씨는 잠들었나요?”
“예. 아카디아 백작님과 보모가 옆에 있어요.”
“대단한 아가씨예요.”
“그러게요. 다시 봤어요. 포이는 괜찮아요?”
“예. 우리 포이도 잠들었어요. 아실 리가 함께 있어요.”
제이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강렬한 카페인의 맛이 혀와 식도를 자극하자 멍한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른스트 관에 돌아와 목욕하고 요기를 한 후 포이와 포니는 잠이 들었고 제이든은 마법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하러 모인 참이었다.
제이든은 포니를 구한 것은 물론 아카디아의 초승달까지 되찾아온 것으로 아카디아 백작의 열렬한 감사를 받았지만, 사실 목표가 제이든이었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말려든 포니에게 미안한 감이 있었다.
“그냥 포니 양 유괴 사건으로 알려지는 게 더 좋을 것 같으니 다른 분들께는 별말씀 마세요.”
레노아의 귀띔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아카디아의 초승달을 노린 유괴 사건으로 알려지겠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마법사들은 상당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니콜레타 님도 오십니까?”
아까 영상구에서 곧 도착한다고 하던 니콜레타의 말을 기억한 제이든이 묻자 레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장 오실 수는 없는 상황인데, 세르지오 들으라고 그런 거예요.”
“그자가 아직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니콜레타 님이 보이면 도망치겠지 싶었는데, 다행히 먹히긴 했네요.”
“제이든 씨가 니콜레타 님의 직통 영상구를 갖고 계셔서 다행이었어요.”
마법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영상구를 사용할 수 있는 마나가 없는 제이든으로서는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일방형 영상구였는데, 이번에 요긴하게 쓰인 걸 보면 역시 전대 마탑주 정도 되면 선견지명이 있다 싶었다.
“수도원 지하는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치안국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 리카르도가 말했다.
그와 레노아는 제이든 일행을 에른스트 관에 데려다 놓자마자 치안대원들을 이끌고 수도원으로 갔다가 돌아온 길이었다.
“환영 마법이나 진법도 모두 해제되어 있었고요. 아마 세르지오가 돌아가자마자 퇴거한 모양입니다.”
“임시 거처였겠지요?”
에른스트 관에 남아 있던 레티샤가 묻자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려진 지 오래된 건물이고, 제이든 씨의 경로를 살피다가 적당하다 싶어 고른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몇 모금 더 삼킨 제이든이 물었다.
“그런데, 그 수도원이 버려진 게 언제쯤인가요?”
리카르도가 옆에 놓아두었던 두루마리를 뒤적이더니 대답했다.
“시청의 기록을 봐야 정확하겠지만, 일단 치안대와 인근 마을의 노인에게 물어본 결과로는 사십 년 전쯤이랍니다. 크지는 않아도 옛날엔 나름대로 이름이 있었던 수도원이라는데, 백여 년 전 산사태 이후로 물길이 바뀌면서 수도원 근처의 농지가 모두 못쓰게 되면서 점점 사람이 줄었답니다.”
수도원 근처 마을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작해 주변 마을이 없어지자 수도원 역시 살림이 곤궁하게 되었다.
수도원에 딸려 있던 작은 영지도 말라붙어 버렸고,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수도원의 삯일을 해줄 사람도 없어지다 보니 수도원 역시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수사들도 다른 지역의 수도원으로 옮겨가면서 수도원은 차차 폐쇄의 길을 밟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수도원의 마지막 원장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이든이 묻자 마법사들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제가 우물의 비밀 통로를 그냥 발견한 게 아닙니다. 환각을 보았거든요.”
아까는 시간이 없어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던 블루스톤의 환각 내용을 설명하자 마법사들 역시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수도원장과 마법사, 그리고 비아트리스 성녀의 예언이라, 이거 참 마치 옛 전설 속에 들어간 기분입니다.”
일찍이 영웅 에트루리안의 용의 말을 받아쓴 에트루리안의 서가 세상에 나온 이후 그 책을 일부라도 해독한 사람은 단 두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명은 카이엔 대제이고 또 한 명이 비아트리스 성녀였다.
카이엔 대제가 대륙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카이엔 대륙을 일통한 것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고 일컫는 무용(武勇), 탁월한 정치력,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겸비한 덕분이지만 그가 에트루리안의 예언서를 일부나마 해독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비아트리스 성녀는 이백여 년 전의 사람으로, 원래 겨울의 여신 노스티에라를 모시는 여사제였다.
젊을 때부터 성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가끔 예지몽을 꾸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어느 해 북부 지방을 덮치는 눈사태를 예지했었다.
북부 지방의 눈사태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해의 폭설과 눈사태는 유례없는 재앙에 가까웠다.
예견하고 방비한다고 했어도 피해가 속출했고 마을이 통째로 눈에 뒤덮인 곳도 있었다.
당시 피해자들을 구출하고 치료하러 나섰던 사람들 중 아직 성녀 칭호를 받기 전의 비아트리스도 있었는데 그녀는 폭설에 휘말려 실종되고 말았다.
실종 기간이 일주일이 넘어서면서 사망이 거의 확실시되었는데, 열흘이 지난 후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함께 실종되었던 인원 열두 명을 그대로 데리고.
실종되었던 열두 명 중에는 사제와 마법사, 기사, 치료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눈에 파묻힌 동굴에 고립되었던 날 이후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굴 안에 저희를 눕히고 비아트리스 님께서 입구 쪽에서 계속 기도하고 계셨던 것만 기억합니다.”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 동굴 안쪽에서 비아트리스 님이 책을 읽고 계시는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책이라니요. 그 눈더미 속에 무슨 책이 있었겠습니까?”
“저도 확실치 않습니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분분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눈 속의 동굴에 열흘간 고립된 채 모두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상태로 깨어나서 비아트리스의 인도하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정작 그 비아트리스는 돌아오자마자 신전의 기도실에 박혀 있었다.
사흘 뒤에 그녀가 기도실을 나온 뒤에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동굴에 갇힌 비아트리스는 성력으로 그들을 보호하면서 기도하는 동안 신탁을 받았다고 했다.
신탁에 따라 동굴 속에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찾았고 내용 중 일부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그 내용에 따라 사람들을 인도해 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라졌던 에트루리안의 서가 나타났다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비아트리스는 책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기에 물증도 없었다.
하지만 열흘간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로 오로지 비아트리스의 성력에 힘입어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은 추호의 의심 없이 그녀를 믿었고 그녀를 성녀라 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날 이후 비아트리스의 성력과 예지력이 폭발적으로 늘었으므로 차차 그녀는 카이엔 대제 이후 유일하게 에트루리안의 서를 읽은 사람,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 공인되었다.
그녀는 매우 장수했는데, 죽기 전 몇 가지 예언을 담은 글을 남겼다고 했다.
그녀가 남긴 예언서는 노스티에라의 신전에 보관되었고 그것을 읽도록 허용된 사람은 노스티에라의 대사제 외 몇 명뿐이었다.
“그런데 그 예언서에 이 작은 수도원의 지하 통로 이야기가 있었다는 거군요.”
레티샤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밤의 경매에 등장했던 에트루리안의 서를 보관하고 계시는 것도 로스 감정사이고.”
“에트루리안의 서가 나타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보관자가 제이든 로스 감정사라는 건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리카르도 역시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제이든이 에트루리안의 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기에 리카르도와 레티샤 역시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보통 인연이 아니군요. 이것까지 비아트리스 성녀의 안배인 걸까요.”
“아무래도 제이든 로스 감정사가 카이엔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하실 분 같습니다.”
자신을 보는 마법사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제이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에트루리안의 서 해독을 시작한 세 번째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면 더 이상 자유로운 생활은 불가능할 것 같네.
니콜레타 님이 아직 아무에게도 밝히지 말라고 했기 망정이지.
“수도원장과 마법사에 대해서는 좀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좀 쉬고 계시죠.”
“아, 그리고 마르첼로 아르카니오라는 마법사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이든이 말을 꺼내는 순간 세 마법사가 한꺼번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몸을 움찔했다.
젊은 레노아의 경우는 흠칫 몸을 떤 정도였으나 나이가 있는 레티샤는 거의 몸서리를 치는 반응이었다.
“제가 그들이 말하는 걸 들으니,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후손이 있다고…….”
“그, 그 얘기는 나중에 하시죠. 니콜레타 님이나 더 연륜 있는 마법사가 동석했을 때.”
차갑고 침착한 인상의 레티샤가 드물게 흐트러진 얼굴로 제이든의 말을 막았다.
청백색 머리카락의 끝이 곤두선 것이 보였다.
“그래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제이든 씨도 피곤하실 테니 일단 좀 쉬시죠.”
레노아가 살짝 눈치를 주는 바람에 제이든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이름이 금기가 된 것은 단지 그가 흑마법에 몸을 담았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제 왔어?
방에 들어가자 아실리가 잠들어 있는 포이 옆에 앉아 있었다.
“응, 포이는 괜찮아?”
-많이 괜찮아졌어. 그 꼬마 아가씨가 잘 지켜줬나 봐.
“포니 아가씨에게 트라우마가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그 꼬마 아가씨, 심기가 튼튼해서 좋은 마법사가 되겠어.
“레티샤 세이녹이라고 했나? 그 마법사도 흡족해하는 것 같더라. 좋은 제자가 되겠다고.”
그래도 심리 상담 같은 걸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카이엔에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네.
우리 포포즈, 트라우마가 심하게 남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하던 제이든이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이름을 들었을 때 레티샤나 리카르도의 반응이 꼭 트라우마 있는 사람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