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8화
42. 탈출(1)
자, 저기가 생문(生門)은 맞는 것 같은데.
제이든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나갈 수 있으려나.
환영 마법은 보통 형태를 바꿔 눈을 가릴 뿐이니 눈에 보이는 걸 무시하고 그냥 나가면 되지만, 이 수도원의 담벼락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있어야 말이지.
마법사가 보호막도 둘러 줬겠다 혼자 몸이라면 혹시 실패하더라도 그냥 뚫고 나가 보겠는데 포니가 있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덩치 큰 남자와 족제비 남자가 나무토막이 생문을 통과하는 걸 봤는데도 그리 당황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들은 생문 근처로 움직이기는 했으나 제이든 일행이 빠져나갈 거라고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차피 못 빠져나갈 거라고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미심쩍은데, 실리, 잠깐만.”
아실리가 찍은 세 번째 장소는 거의 다 무너져서 형태만 남은 우물이었다.
제이든은 덩치와 족제비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우물 쪽으로 이동했다.
우물의 가장자리에 손을 짚으려던 제이든이 움찔하면서 우물을 다시 보았다.
‘이거 그냥 돌이 아닌데?’
우물의 가장자리를 쌓은 돌은 오래되어 부서지고 이끼가 덮여 있었지만 이렇게 조그만 수도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고급 석재가 섞여 있었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다듬었잖아?’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한눈을 팔아선 안 되겠지만 감정사의 본능이 우물 가장자리를 이룬 돌 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길쭉한 반원형으로 다듬어진 돌은 그냥 보기엔 옆의 다른 돌과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끼워 넣은 거야. 연대가 달라.’
우물의 벽이 부서져서 보수를 했다면 새 돌도 가능한 한 원래의 돌과 비슷한 것을 고르고 눈에 띄지 않도록 손질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돌은…….
‘아네토르 산의 블루스톤이잖아.’
동부 아네토르 산에서 나는 블루스톤은 아름답고 독특한 푸른 광택으로 유명해서 고급 저택을 장식하는 데 쓰인다.
가격대가 높아서, 부유한 신전이라면 모를까 이처럼 작은 수도원, 그것도 우물 가장자리 따위에 쓰일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블루스톤은 일부러 광택을 죽였다. 게다가 겉면에 돌가루와 이끼를 입혀서 평범한 돌처럼 만들어 놓은 게 수상…….
아니, 안 되지. 제이든은 재빨리 블루스톤에서 눈을 떼었다.
이놈의 직업의식, 아무리 내가 성실한 감정사지만 이럴 때 딴짓을 하면 안 되지.
제이든은 눈앞의 블루스톤을 지나 그 너머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바람 소리가 훅 귓전을 스쳐 가더니 제이든의 의식이 어딘가로 쭉 빨려 들어갔다.
아! 이런, 지금 환각이 오면 안 돼! 지금 이런 걸 볼 때가 아닌데.
제이든은 있는 힘을 다해 현실로 돌아오려고 애썼지만 그의 의식은 속절없이 환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제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블루스톤의 과거에 흘러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자그마한 수도원의 앞뜰, 구식 수사복을 입은 수사 두세 명이 잡초를 뽑거나 비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었던 안뜰이었다.
폐허가 되어 있던 수도원은 많이 낡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끔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십 년쯤 전인가? 백 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것 같고. 수사복 형태가 바뀐 게 그 정도 될 테지만 그 후에도 겸용되었으니까…….’
제이든은 재빨리 수사들의 옷차림이나 건물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대충 지금보다 오륙십 년 정도 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앞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 가장자리의 벽을 이룬 돌은 제이든의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 있고 두레박이 걸쳐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다 똑같은 돌처럼 보였지만 쌓아 올린 돌 중 하나가 블루스톤이었다.
제이든이 블루스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또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짙은 회색 수사복을 입은 사람 한 명이 우물 가장자리에 돌을 끼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이 망을 보듯 서 있었다.
“다 됐습니다. 우물에 물이 차면 이제 완전히 가려질 겁니다.”
돌을 끼운 사람이 몸을 펴면서 말하자 망보듯 서 있던 사람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암도는 막힌 건가?”
“암도 자체는 막히지 않았지요. 입구만 완전히 막은 겁니다.”
“신기하군, 블루스톤에 그런 힘이 있나?”
“그럴 리가요. 블루스톤은 매개체로 사용했을 뿐 암도를 막은 건 오로지 제 마법입니다.”
부루퉁한 어조로 말한 마법사가 일어서서 손을 털었다.
뒷짐을 진 사람이 손으로 블루스톤이 박힌 자리를 가볍게 쓸어 보았다.
“이 자리가 맞나? 정말 감쪽같군. 도저히 블루스톤으로 보이지 않아.”
“그야 당연하지요. 제가 누굽니까? 마법사가 되지 않았다면 조각으로 카이엔에 이름을 떨쳤을 사람인데요. 이게 돌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려면 세시온 다미에르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어깨를 으쓱하던 마법사가 말을 덧붙였다.
“세시온 다미에르처럼 마법에도 뛰어난 감정사가 아니라면 알아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죠. 왜 블루스톤이 여기 있는지 궁금해할 뿐.”
그는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암도를 왜 숨기는 겁니까? 애당초 이렇게 작은 수도원에 지하 암도를 왜 판 거예요?”
“낸들 알겠나. 하지만 비아트리스 성녀가 비밀리에 남기신 글에 이 수도원이 언급되어 있었거든. 언젠가 쓰일 일이 있을 테니 꼭 이 암도를 정비해 놓으라 했단 말일세.”
“그래서 은퇴를 핑계로 이 수도원에 원장으로 오신 겁니까?”
“뭐 그렇지.”
“어쩐지, 은퇴하셨다고 해도 이렇게 조그만 수도원에서 수양하실 분이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볼 것도 없는 수도원에 자꾸 놀러 오라고 부르시더니 이런 일을 시키시려고.”
“시끄럽네. 일 끝났으면 빨리 들어가세.”
두 사람이 건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을 때 구름에 가렸던 달이 살짝 드러나면서 마법사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어디서 본 듯한데?
제이든이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할 틈도 없이 눈앞이 흐려졌다.
-제이든?
아실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거의 다 됐어. 이대로라면 금방 우리 모습이 드러날 거야.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 포니를 돌아보았다.
“응, 괜찮아. 통로를 찾은 것 같아.”
물이 마른 우물에는 흙과 나뭇잎이 차 있었지만 블루스톤의 과거를 본 제이든은 확신이 있었다.
“이리 와, 포이, 자, 다 같이 들어가자.”
제이든이 포니의 손을 잡고 한 팔에 포이를 안은 채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아니 기왕 통로를 내는 거 좀 길게 내지. 아니면 공간이동 포탈 같은 걸 설치해 두든지.”
제이든은 투덜거리면서 머리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떼어내고 흙을 털었다.
지하 암도라 해서 레타논의 떠도는 섬 정도로 규모가 큰 걸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옛 수도원의 우물 밑으로 난 지하 통로는 벽과 천장이 금방 무너질 듯 흙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좁은 굴인 데다 거리도 심하다 싶을 만큼 짧았다.
수도원의 담 아래를 통과하면 바로 코앞인 뒷산 나무 구멍에 출구가 있었던 것이다.
일어서서 보면 수도원 마당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뒷산이 보일 텐데 초봄이라 나무가 무성하지도 않았다.
“마법사가 만든 통로가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이 판 굴 같은데. 얘들아, 빨리 나와. 어서 도망쳐야 해.”
-공간이동 포탈은 아르카니오의 마법에 걸렸겠지. 이렇게 손으로 판 굴이라 오히려 감지가 안 됐을 수도 있어.
아실리가 뛰어나오면서 말했고 제이든은 포니의 손을 잡아 구멍 밖으로 끌어냈다.
“아무튼 빨리 여기서 멀리 떨어져야 해.”
몸을 숙인 채 내려다보니 수도원은 어떻게 보아도 버려진 폐허였다. 안마당에도 사람이 있었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세르지오의 환영으로 사람의 눈을 속이는 거겠지.
“어쨌든 밖에 나왔으니 다행이야.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방향을 잡지 못해 제이든이 망설이는 동안 아실리가 하늘도 쳐다보고 코를 들고 이리저리 냄새를 맡고 하더니 방향을 잡았다.
-에른스트 방향은 저 수도원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럴 순 없으니까 멀리 우회해서 돌아가자.
“좋아.”
제이든은 포니를 업었다. 잠옷 바람에 맨발이라 그냥 걷게 할 수가 없었다.
늘 하던 대로 포이를 어깨에 태우려고 했더니 포이가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뛰려고?”
“포잇!”
우리 포이 착하기도 하지. 형이 포니를 등에 업어서 힘들까 싶어 제 무게라도 덜어주려나 보다.
제이든 일행은 재빨리 수도원의 반대쪽으로 뒷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이랄 것도 없는 낮은 언덕이어서 금방 평지에 도착했다.
“자, 서두르자.”
가장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 치안대부터 찾아야지.
-우리가 치안대 찾으러 갈 것도 없어. 누가 보면 바로 신고할걸.
“그러게.”
흙투성이가 된 청년이 역시 흙투성이 잠옷에다 맨발인 소녀를 업고 그 옆에서 고양이랑 토끼가 뛰고 있으면 누가 봐도 수상하긴 하겠다.
수도원은 대개 외진 곳에 짓는 경우가 많지만 이 수도원은 버려진 곳인 만큼 근처에 마을도 없었다.
제이든 일행이 걸음을 재촉한 지 반 시간쯤 되었을 때에야 마을 이름이 적힌 이정표가 나왔다.
“자, 이쪽으로 곧장 가면 되겠어.”
그때, 해가 구름에 가린 것처럼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아실리가 으르렁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실리, 왜?”
앞서가는 아실리의 꼬리만 보고 달리듯 걷던 제이든이 머리를 들었다가 소리를 내어 탄식했다.
길 앞에 키가 큰 남자가 로브의 두건을 뒤집어쓴 채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제이든이 헐떡이면서 멈춰 서자 남자가 나무에서 등을 떼고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대단하군, 제이든 로스. 임시로 잡은 곳이긴 해도 그런 통로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는데.”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두어 번 손뼉을 쳤고 제이든은 절망적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너무 지치기도 했지만 어디로 가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생각을 마친 제이든이 입을 열었다.
“날 원하는 거지? 순순히 따라갈 테니 아가씨와 아이들은 놔 줘.”
세르지오는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우리가 필요한 건 자네뿐이니까.”
“안 돼요. 제이든 아저씨. 같이 가요.”
제이든이 포니를 땅에 내려놓자 포니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아니, 아가씨는 포이랑 같이 돌아가 계세요. 이 길로 쭉 가면 마을이 나올 거예요. 마을에 가면 바로 치안대로 가세요. 실리, 아가씨를 데려가.”
“냐앙!”
아실리가 날카롭게 울더니 오히려 제이든의 다리에 붙었다.
-포이랑 포니만 보내.
포이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 제이든과 포니를 번갈아 보았다.
“삐잇, 삐잇, 삐이익.”
포이가 다시 겁에 질린 소리로 울기 시작하면서 제이든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귀찮군, 꼬마만 보내고 동물들은 처리해 버리면 간단하잖아.”
세르지오가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하나, 둘, 셋!
처음에 떨어진 사람은 에른스트 관에 있던 마법사였고, 두 번째는 청백색 머리의 레티샤, 그리고 세 번째는 레노아였다.
“어휴, 겨우 늦지 않았군요.”
치안국에서 온 마법사가 가죽 재킷-이 사람만 로브가 아니라 형사 같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을 털었고 세르지오가 쏘아 보낸 전격인지 무엇인지를 막아낸 건 레티샤였다.
그리고 레노아는 제이든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을 뿐 세르지오에게 집중했다.
세 명의 마법사가 제이든을 막아선 것을 본 세르지오는 지팡이를 가볍게 한 번 돌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레티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선배.”
세 마법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티샤 세이녹은 세르지오와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사가 셋이라……, 싸움이라면 모르겠다만 내가 저놈 하나 빼가기는 어렵지 않다는 건 알겠지?”
세르지오가 환영 마법을 발동시키기 시작하는지 주위가 온통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바닥에 내려앉는 것처럼 가까워지고 땅의 흙이 솟아오른다. 제이든은 가만히 서 있는데도 멀미가 느껴졌다.
“우리뿐이라면 그렇겠지.”
레노아가 로브 안쪽에서 뭔가를 꺼냈다.
제이든이 에른스트 관의 마법사에게 맡겨 놓았던 수정구였다.
레노아가 수정구를 높이 쳐들자 수정구 안에서 매서운 외침 소리가 들렸다.
“세르지오!”
니콜레타의 얼굴이 수정구 안에 떠오르자 갑자기 세르지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