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6화
41. 유괴(5)
고양이는 조금 비틀거리면서 벽 아래쪽에 딱 붙어 제이든 쪽을 향해 꼬물꼬물 다가왔다.
제이든이 묶여 있는 의자 아래까지 온 고양이는 앞발로 그의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깨어나지 않자 고양이는 그의 무릎 위로 사뿐 뛰어올랐다. 무릎 위에서 자세를 잡은 고양이가 앞발로 빨래하듯 제이든의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꾹꾹 연타에도 그가 깨어나지 않자 고양이는 잠시 앞발을 들고 고민하듯이 발톱을 꺼냈다 뺐다 하다가 결심한 듯 제이든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고양이가 제이든의 귓불을 콕 깨물자 그제야 제이든이 움찔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아야…….”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제이든의 귓전에 낮게 고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제이든.
“실리!”
제이든이 꿀꺽 침을 삼키자 아실 리가 의자 뒤쪽으로 뛰어내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
제이든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확인한 아실리가 지시했다.
-이쪽으로 팔을 힘껏 잡아당겨.
제이든이 아실리가 말한 쪽으로 손목을 힘껏 잡아당겨 공간을 만들자 아실리는 반대쪽을 물고 잡아당겨서 매듭을 느슨하게 늦추었다.
생각보다 꽉 묶여 있지 않았는데도 고양이가 매듭을 늦추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한참이나 매듭을 물고 흔든 후에야 손목이 느슨해졌다.
“실리, 이제 내가 할게.”
제이든이 혼자 손을 비틀고 잡아당기며 묶인 손목을 푸는 동안 아실리는 문 쪽을 경계하면서 앞발로 턱과 입을 살살 문질렀다.
“됐다. 어떻게 왔어? 실리?”
의자에서 일어선 제이든이 다리가 저려서 잠깐 주저앉았다가 기듯이 아실리에게 다가가 끌어안았다.
-제이든 따라왔지 뭐.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제이든을 따라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먼저 그림자 속에 빨려 들어간 제이든도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미친 듯 졸음이 쏟아졌다.
-자면 안 돼!
아실리는 앞발을 들어 발목을 힘껏 깨물었다. 입 안에 피 맛이 돌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후 주변의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발아래에 바닥이 느껴졌다. 아실리는 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천천히 옮겨요.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까짓 감정사가 뭐가 중요하다고.”
“거 참, 나중에 처치하든 말든 일단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으니 조심하라니까.”
덩치가 좋은 남자 두 명이 제이든을 옮기고 있었다. 축 늘어진 게 잠이 들었는지 기절했는지 아무튼 정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먼저 떨어진 제이든을 옮기느라 바빠서 사라지는 그림자에서 나중에 나타난 아실리를 못 본 틈에 아실리는 벽에 달라붙어 자신에게 환영 마법을 썼다.
지속 시간은 길지 않지만 아실리가 쓸 수 있는 몇 가지 마법 중 가장 자주 쓰는 마법이라 숙련도는 상당히 높았다.
환영 마법으로 몸을 가린 아실리는 조심스럽게 제이든을 옮기는 남자들의 뒤를 따라갔다.
어둠침침한 복도의 벽과 천장 사이에 길게 홈이 파여 있고 홈 안에는 간격을 두고 등불이 놓여 있는 걸 보니 오래된 옛날식 건물이었다.
낡은 벽에는 드문드문 장식용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출입구에 문 대신 태피스트리가 길게 걸려 있는 방 안으로 남자들이 제이든을 옮겼을 때, 복도에 있던 아실리는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세르지오 님, 데려왔습니다.”
“여기다 묶어 놔. 깰 때쯤 어르신께 연락드리고.”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라면 제이든을 따라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기관진식과 환영 마법의 대가가 아닌가. 따라 들어갔다간 어쩌면 들킬지도 몰랐다.
아실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핀 뒤 복도에 걸린 태피스트리 중 방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타고 올라갔다.
옛날 수도원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벽과 천장 사이에 길게 파인 홈이 있고 태피스트리가 홈을 가린 채 걸려 있었다. 아실리는 태피스트리 뒤의 홈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귀를 쫑긋 기울여 보니 방 안에서 나는 소리도 잘 들렸다.
사람이라면 말소리까지 분간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난 귀 밝은 고양이니까.
제이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거야.
아실리는 좁은 홈 안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면서 편한 자세를 찾았다.
자, 이제 기다리자. 제이든이 혼자가 될 때까지.
* * *
“계속 밖에서 기다린 거야? 고생 많았어. 실리.”
-아까 복도에서 그놈들 얘기하는 거 보니까 뭔가 다른 일 보러 나가는 것 같았어. 그놈들 돌아오기 전에 빨리 나가자.
“포이랑 포니 찾으러 가야지.”
세르지오와 노인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포니는 그대로 풀어줄 것 같았지만 포이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제이든만 해도 그냥 남아 있다간 목숨에 지장은 없어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고.
-자, 어느 쪽이야, 제이든?
“잠깐만 기다려 봐.”
제이든은 눈을 감은 채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아까 에른스트 관에서 마법사가 가르쳐 준 수인을 맺었다.
“추적 매개체를 가져갈 수 있으면 좋지만 아마 신체검사를 당할 테니까요.”
마법사는 포니가 낮에 입었던 옷의 끝자락을 조금 잘라 태운 뒤 그 재를 물에 개어 환약처럼 만들었다.
지팡이를 든 채 주문을 외자 환약이 반짝거리며 몇 번이나 광채를 발하다가 차차 사라졌다.
“자, 꿀꺽 삼키세요.”
제이든이 약을 삼키자 마법사가 그의 눈에 손을 덮었다.
“이제 24시간 동안 환약의 주인이 제이든 씨를 끌어당길 겁니다. 효과를 좀 더 보강하기 위해 수인도 가르쳐 드릴게요.”
신중하게 여러 번 반복해서 수인을 맺는 법을 배운 뒤 제이든은 아카디아의 초승달이 든 보석함 외에는 몸에 지닌 것을 다 놓고 나왔다.
의심 가는 것은 뭐든 빼앗길 것을 예상해서였고 실제로 제이든이 그림자에서 나오자마자 세르지오의 수하들은 그의 몸부터 뒤졌다.
수인 맺기를 완료한 제이든이 눈을 뜨자 공중에서 아른거리는 희미한 은빛 선이 그의 눈에 보였다.
포니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쪽이야.”
방향을 손짓한 제이든은 방을 나서기 전에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보석함을 집어서 품 안에 넣었다.
세르지오와 노인은 애당초 아카디아의 초승달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은색 안내선에는 약점이 있었는데, 직선으로 방향을 가리킬 뿐 건물 내에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니라서 제이든과 아실리는 요령껏 길을 찾아서 가야 했다.
가다가 길이 막히거나 사람이 있으면 돌아와서 다른 길을 찾아야 했고.
문 없는 방들과 복도가 이어지는 건축 형태로 봐서는 오래된 수도원 같았는데 규모가 크지는 않은 듯했다.
제이든이 있던 방은 지하였고 창문도 없었지만 계단을 몇 개 올라오자 창문이 있는 복도가 있었다. 하지만 창문은 모두 단단히 가려진 채였다.
제이든이 묶여 있기 때문인지, 한참 동안 깨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인원이 별로 없어서인지 건물 안에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끔씩 사람이 있는 모퉁이나 출입구에서는 아실리가 환영 마법을 썼다.
-세르지오나 그 노인만 마주치지 않으면 좋겠는데.
아실리가 나직하게 속삭이면서 복도 모퉁이 너머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몇 번이나 되돌아갔다가 다시 길을 찾아서 오느라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길지 않았는데도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포이와 포니를 데리고 나가야 해.”
-둘이 같이 있어야 할 텐데.
은빛 안내선이 뚜렷해진 걸 보니 포니의 위치가 가까운 듯했다.
-저기인가 봐.
역시 입구에 태피스트리가 드리워진 방이었다.
은빛 안내선이 똑바로 방의 입구를 가리켰다.
입구 앞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 걸 보면 이쪽도 지키는 사람이 있긴 했던 모양인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아실리의 환영 마법에 힘입어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까 이 건물 자체가 작은 건물이고 안에 있는 사람도 너덧 명에 불과한 듯했다.
하긴 노회한 흑마법사가 사람 많이 끌고 다니고 행적 노출시키면서 움직일 리가 없지.
더구나 여기는 본거지도 아닌 것 같으니 심복 몇 명이면 충분할 거였다.
“지금 빨리 들어가자.”
혹시 몰라 환영 마법으로 몸을 숨긴 채 방 안으로 들어가니 침침한 등불 아래 놓인 철제 사각 우리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 자식들이!”
제이든이 입술을 씹었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었던 건 양반이었다. 포이와 포니를 우리에 가둬 놨어!
우리 포이 철장에 트라우마 있는데!
“포니, 포이, 괜찮아?”
갑자기 들려오는 제이든의 말소리에 포이를 안고 있던 포니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들려서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포니의 품속에 머리를 박은 채 엎드려 있던 포이도 꿈틀거리면서 머리를 들었다.
아실리가 얼른 환영 마법을 해제하자 포니가 소리를 지르려다가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이든 아저씨…….”
포니의 품에 얼굴을 박고 있던 포이가 와락 뛰쳐 일어나 철장에 매달렸다.
“끼이익, 삐이, 삐이잉…….”
얼마나 무서웠는지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우는 포이 뒤에서 포니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나 안 울었는데, 나 아직 한 번도 안 울었는데.”
꾹 참고 있다가 제이든과 아실리를 보자 이제야 눈물이 나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이거 열어야 할 텐데.”
어디 가둬 놓았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잠옷 바람의 어린애를 설마 우리에 가둬 놓았을 줄은 몰랐다.
제이든은 화가 나서 떨리는 손으로 우리 문을 살펴보았다.
자물쇠 같은 게 있으면 열쇠를 찾거나 부숴야 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우리 문은 철판 위에 다소 복잡한 형태의 빗장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안쪽에서 손을 내밀 수는 없는 구조여서 빗장만 걸어 놓은 건가.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빗장을 풀었다. 고리가 여러 개라 쉽지는 않았지만 시간만 들이면 풀리는 거였다.
문을 열자 포이와 포니가 와락 쏟아져 나왔다.
“삐이익, 삐잉, 삐이잉.”
포이는 마치 처음 여관 구석에서 만났을 때처럼 털을 세운 채 바들바들 떨면서 제이든의 품을 파고들었다.
“괜찮아, 포이야, 괜찮아, 포니 아가씨도 괜찮아요. 이제 집에 가요.”
“네. 나 괜찮아요.”
“우리 포니, 진짜 용감한 아가씨예요. 자, 잠깐만 기다려요.”
제이든은 포이를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뒤 셔츠의 한쪽 소맷자락을 북 뜯었다.
포니와 포이가 없어진 방식을 볼 때, 어떻게든 제이든에게도 공간이동 같은 게 작용할 거라는 건 짐작했었다. 그림자가 삼켜 버리는 형태일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면 돌아올 방도를 마련해야 했는데, 공간이동 스크롤 같은 걸 주면 빼앗길 확률이 높았기에 치안국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는 제이든의 옷 자체를 스크롤로 만들었다.
단시간에 해내기 쉬운 일은 아니었는지 땀을 뻘뻘 흘리긴 했지만 감쪽같이 제이든의 소매를 스크롤로 만든 걸 보면 실력이 있는 마법사였다.
“자, 잘 잡고 있어.”
포니가 포이를 가슴에 안고 제이든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들었고 아실리가 제이든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제이든은 뜯어낸 소맷자락을 부욱 찢었다.
공간이 흔들리면서 옅은 녹색의 안개가 주변에 피어올랐다.
공간이동 포탈을 쓸 때처럼 몸이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제 에른스트 관으로 돌아가면 되는……, 어라?
제이든은 팔을 벌려 포니와 포이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마치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지는 듯한 급격한 추락감이 밀려왔다.
아, 젠장! 설마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게 건물 자체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걸 믿어서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