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5화
41. 유괴(4)
시간을 좀 돌아가서 같은 날 새벽, 잠들어 있던 포니는 왠지 어깨가 선득선득 쌀쌀해서 재채기를 하며 잠에서 깼다.
이불을 잡아당기면서 포이에게도 이불을 덮어 주려고 했는데 옆에서 함께 잠들었던 포이가 만져지지 않았다.
‘포이 어디 갔지?’
이불 속을 더듬다가 찬기가 느껴지는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던 포니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창문이 열려 있고 검은 바람 같은 것이 방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인가?’
잠이 덜 깬 눈을 깜박거리던 포니는 깜짝 놀라며 눈을 힘껏 비볐다.
바람이 저렇게 눈에 보일 리 없어!
창틀을 타고 넘어와 마치 검은 물이 번지듯 방바닥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는 것은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향해 포이가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포이, 어디 가?”
포이는 대답도 없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포이가 깡충깡충 뛰지 않고 왜 저렇게 미끄러지면서 가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포니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침대 위에 발딱 일어서다가 넘어질 뻔했다.
몸을 가누기도 전에 포니는 얼른 양팔을 포이를 향해 내밀었다.
포이 발이 안 움직여! 자기가 걸어가는 게 아냐! 저 그림자 괴물이 우리 포이를 먹으려고 잡아당기는 거야!
“포이! 가면 안 돼!”
포니는 있는 힘껏 염력을 발휘해 포이를 들어 올렸다.
“아앙! 왜 안 되지?”
포니가 팔에 힘을 줬지만 포이는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포이랑 나랑 같이해야 되는데, 포이가 잠에서 못 깨서 안 되나?
포니가 당황하는 동안 그림자가 포이의 바로 아래까지 스며들었다.
“안 돼!”
그림자가 포이의 발을 낚아채는 순간 포니는 맨발로 달려가서 포이를 꽉 껴안았고 소녀와 토끼는 마치 물에 빠지듯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포이와 포니를 삼킨 그림자는 물이 흘러가듯 재빨리 창문 밖으로 흘러나갔고 바닥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 * *
“왜 여자애까지 같이 온 거야?”
성마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림자가 들어가기 전에 수면향을 넣었으니 잠에서 깰 리가 없었는데.”
“아카디아 백작의 여동생이라면서. 골치 아프게 됐네. 어르신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던 장신의 남자가 결심한 듯 머리를 들었다.
“차라리 잘 됐어. 토끼나 고양이만 데려왔다가 감정사가 말려들지 않으면 헛고생인데.”
“저도 그 생각은 했습니다. 아무리 귀여워한다 해도 동물이잖아요. 인질로 쓸 가치가 있을지……, 어르신 말씀이니 토는 달지 못했지만 사실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 일이 좀 커지긴 하겠지만 차라리 아카디아 꼬마 유괴 사건으로 꾸미는 게 낫겠어. 아카디아 가에 유명한 초승달이 있지? 그걸로 가자. 어르신께는 내가 말씀드리도록 하지.”
“예, 그럼 여자애랑 토끼는?”
“아직 잠들어 있나?”
“예. 그림자에 먹히는 순간 잠들었습니다만 두어 시간 지나면 깰 겁니다.”
“제이든 로스가 올 때까지 잘 보호하도록. 일어나면 먹을 것 좀 주고 얼굴은 잘 숨기고. 여자애는 나중에 풀어주는 편이 뒤탈이 없을 테니까.”
“풀어줍니까?”
“안 그러면? 일 더 커지기 전에 빨리 풀어주고 꼬리를 끊는 편이 좋아.”
남자가 돌아서자 등불에 얼굴이 비쳤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감싸고 있는 적갈색 곱슬머리가 등불 빛에 더 붉게 보였다.
그가 회색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앞에 있는 몸집 작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나야 숙원이 있어서 어르신을 따르지만 자네는 이 일에 왜 이렇게까지 열심이지?”
그 앞에 있던 남자가 입술을 약간 찌그러뜨리면서 웃었다.
“그 감정사 놈에게 원한이 조금 있거든요.”
턱이 뾰족하고 눈이 작은 게 전체적인 인상이 꼭 족제비를 닮은 사내였다.
* * *
“제이든 로스, 정신이 들었나?”
남자의 목소리에 제이든이 머리를 흔들었다.
뭔가 꽉 누르고 있는 것처럼 무겁던 머리가 천천히 맑아지면서 시야에 주변 상황이 들어왔다.
벽에 등불이 몇 개 걸려 있을 뿐 어둠침침한 방이었다.
탁자, 책장, 불이 꺼진 향로, 아무렇게나 쌓인 서적이며 두루마리 등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은 의자에 앉은 채 두 손이 의자 등 뒤로 묶인 채였다. 꺾인 팔 부분이 뻐근했다.
“그림자의 마법에서 깨는 데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 아카디아의 꼬마 아가씨가 더 빨리 깨어났어.”
제이든은 앞에 서서 말을 걸고 있는 키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적갈색 머리, 회색 눈, 뚜렷한 이목구비.
“세르지오 아르카니오…….”
“호! 나를 아나?”
세르지오는 놀란 듯이 두건을 뒤로 젖혔다.
“당신 초상화를 본 적이 있어.”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제이든은 침을 삼키고 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 포이와 포니는?”
“아, 둘 다 무사해. 다친 데도 없고 식사도 줬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르지오는 의자를 끌어당겨서 제이든의 앞에 앉았다.
“자네가 협조만 잘하면 아이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거야. 자네한테 궁금한 게 많은데, 제이든 로스.”
“?”
“자네, 우리 일을 몇 번이나 방해했는데 정말 우연인가?”
역시 이놈들은 아카디아의 초승달 같은 걸 노리는 게 아니었어.
포에니 토끼를 노린 것도 아니고 목표는 나였군.
제이든은 기침을 몇 번 해서 목을 틔운 뒤 대답했다.
“당연하지. 일하는 중에 어쩌다 얽힌 사건에서 당신 이름을 들었을 뿐 사실 난 얼마 전까지 당신이 누군지도 몰랐어. 초상화를 본 것도 그 뒤고.”
“글로비스의 밤의 경매나 세렌토의 단검, 콜레디오바의 상자 일이 모두 우연이라고?”
“알다시피 난 감정사야. 내가 맡은 일은 그 외에도 숱하게 많아. 그중에 당신이 얽힌 일이 몇 번 있었던 거지.”
제이든이 묶인 채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때 어둠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운명이 인도하지 않았다면 네가 그 길목마다 나타날 수는 없었겠지.”
세르지오와 제이든이 동시에 그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의 한쪽 구석에, 여태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노인이 로브를 덮어쓴 채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턱짓을 하자 세르지오가 옆으로 비켰다.
노인은 천천히 제이든 쪽으로 걸어왔다.
로브에 달린 커다란 두건을 깊이 눌러써서 쪼글쪼글한 턱 외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든은 알 수 있었다. 전에 환각 속에서 본 그 노인이었다.
몸은 세르지오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될 만큼 작은데 위압감은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노인이 다가옴에 따라 몸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과 추위가 함께 느껴져서 제이든은 어깨를 떨었다.
“제이든 로스.”
그의 앞에 앉은 노인이 제이든의 이름을 불렀다.
두건 속에서 찌르는 듯한 눈빛이 제이든을 향했다. 어쩐지 마주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길을 피했는데 노인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날 봐라. 제이든 로스.”
제이든은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노인의 얼굴을 향했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다. 분명히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왠지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무 말도 없이 제이든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가장 바라는 게 뭐지?”
“…….”
제이든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잠시 후에 말했다.
“너, 찾는 게 있구나.”
“예.”
제이든은 마치 꿈속에서 질문을 받은 듯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뭘 찾는지 너 자신도 모르는군, 그렇지?”
“예.”
제이든이 몽롱한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좀 도와줄까?”
“…….”
“집에 가고 싶지?”
제이든의 몸이 움찔 떨렸다.
“집에 가고 싶은 게 네 소원이냐?”
“……예.”
“좋다. 나와 함께하면 네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 더 이상 사방팔방을 돌며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몽환적으로 변했고 제이든의 눈에 힘이 없어졌다.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겠다. 네가 찾는 것도 찾을 수 있게 해 주겠다.”
“…….”
“에트루리안의 서를 내게 가져와라.”
제이든의 몸이 다시 한번 움찔 튀었다.
노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에트루리안의 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마법의 책이다. 오직 대마법사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후예만이 그 책을 가질 자격이 있다.”
“…….”
“세상이 열린 뒤 대륙에 존재했던 모든 마법사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뛰어났던 대마법사, 오로지 마법만을 위해 살았던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후예가 잊혀진 마법사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노인은 주름진 손을 들어 올렸다.
“세상에 그보다 더 뛰어난 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마르첼로. 속된 자들의 투기와 허례에 쫓겨 불모의 땅으로 쫓겨가 잊히고 만 그의 후예 두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
세르지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노인의 등 뒤에 섰다.
“우리는 그의 이상을 따르고 그의 복수를 위해 닫힌 문을 열 것이다. 제이든 로스. 너도 그럴 것이고.”
“…….”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노인의 눈이 번들거렸다. 광신도의 눈이었다.
“나를 따른다면 너는 세시온 다미에르를 능가하는 대감정사가 될 것이다. 네가 찾는 것을 찾고, 네가 원하는 것도 이룰 것이고.”
“……예.”
“좋다. 그럼 자거라.”
노인의 말이 끝나자 제이든이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잠시 후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잘 된 것 같습니까?”
세르지오가 묻자 노인이 두건을 뒤로 젖혔다. 눈이 막힌 가면을 쓰고 있던 노인이 가면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피로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을 직접 사용한 것은 오랜만이군.”
가면을 세르지오에게 건넨 노인이 말했다.
“저 녀석은 바다 건너에서 왔다.”
“동방 출신이란 말입니까?”
세르지오가 놀란 눈을 했다.
“아마 그렇겠지? 내면을 보기 어려운 녀석이었다. 고향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카이엔 출신이 아니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있었으니 동방 대륙에서 온 게 맞겠지.”
“원래 생각하셨던 대로 그냥 처리해도 될 텐데 ‘말의 힘’을 쓰셨습니다. 곤하지 않으십니까?”
“저놈이 에트루리안의 서를 지니고 있지 않으냐. 그냥 없애기는 아깝지.”
“‘말의 힘’은 잘 먹혔을까요?”
“생각보다 심력이 단단한 녀석이었다만, 가면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의 힘이 강해지는데 직접 쓰기까지 했으니까 잘 먹혔겠지. 깨어나면 한 번 더 시도해 보고 잘 안 된다 싶으면 그때 없애도 된다.”
노인과 세르지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면서 출입구 쪽을 향했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거리에 버리면 발견하겠지. 아카디아의 초승달을 받았으니 돌려보냈다고 생각할 테고. 음, 토끼는 남겨 두도록 하고. 저 녀석에게 약점이 되는 것 같으니까.”
문 대신 드리워져 있던 두꺼운 태피스트리 휘장을 걷고 방을 나가던 노인이 안쪽을 돌아보았다.
정신을 잃은 제이든을 보면서 그가 광기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위대한 마르첼로,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마법에 흑과 백을 나누어 한없이 높아질 수 있는 마법의 길을 스스로 꺾은 자들, 마르첼로의 이름을 잊은 자들에게 벌을 내릴 날이 머지않았다.”
의자에 묶인 제이든만 남겨 두고 그들이 사라지고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태피스트리 아래쪽에서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회색 줄무늬의 고양이가 몸을 바짝 낮춘 채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