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2화
41. 유괴(1)
“자, 이만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
“잘 가요. 제이든 씨.”
“냐아앙!”
“포잇!”
제이든이 피니어스와 악수를 했고 엘리노어가 제이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민 아실리가 인사하듯 앞발을 흔들자 포이도 깡충깡충 뛰었고 레오가 왕왕 짖으며 귀를 펄럭거렸다.
드디어 경매 일정이 모두 끝나고 제이든 일행이 동부 해안을 향해 떠나는 길이었다.
숙소를 떠나면서 이미 사람들과 모두 인사를 나눴지만 피니어스와 엘리노어는 제이든을 배웅하러 꽤 멀리까지 따라 나왔다.
“가면에 대한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연락을 줄게.”
“감사합니다.”
피니어스가 한동안 카이에른에 머문다고 해서 가면에 대한 소식은 그를 통하기로 했다.
“로시에르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나중에 적당히 타일러 볼게.”
“아휴! 걱정 마세요. 제가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어떻게 사나요.”
제이든이 웃었다. 정말이지 로시에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 살아가면서 그 정도 질시나 견제가 없는 세상이 있나. 한국에 살 때는 아직 학생이라 직장 생활을 경험할 기회는 없었지만 회사 다니는 선배들이 그런 고충을 토로하는 건 여러 번 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이든 자신도 감정사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다른 감정사들에게 시기 질투를 받은 일이 적지 않았다.
2년 넘게 감정사 활동을 하면서 실력으로 찍어 누른 데다 2급 감정사가 된 후로는 오히려 감정사들의 아이돌 같은 존재가 됐지만 초창기에는 별소리가 다 나왔었다.
“로렌스 선생님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었다니까요!”
“아, 맞다. 나도 그 소문 들었던 기억이 나네!”
피니어스가 푸핫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올리버 로렌스는 제이든이 3급 자격증 시험을 볼 때 시험관으로 자원했었다.
“제이든 로스라고? 벌써 3급 시험에 도전하다니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
뚜렷한 스승도 없고 교육기관도 다니지 않은 청년이 독학으로 5급 감정사 자격증을 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특하고 대견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반년 만에 4급 감정사 시험까지 통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시험이 아닌데? 좀 이상하지 않나?
올리버 로렌스 정도의 감정사가 이제 막 4급을 통과한 초짜 감정사, 그것도 이전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감정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별로 없다.
가끔 독학으로 감정사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수재가 없지는 않지만 혼자 힘으로 딸 수 있는 자격증은 대개 5급, 잘되어야 4급이 한계였다.
스승을 모시거나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없는 감정사 지망생을 위해 5급 시험을 통과하면 감정사 협회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저렴한 학비에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제이든은 그런 교육기관에 등록한 적도 없었다.
5급 감정사는 보통 수습 감정사로 취급하기 때문에 3급 감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가 4급 자격증을 딴 뒤에야 독립해서 감정사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제이든은 그런 경력조차 없이 혼자 4급을 따고 바로 감정사 일을 시작했는데 일을 시작하자마자 4급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감정사들 간에 입소문이 돌면서 올리버 로렌스 역시 제이든에게 부쩍 관심이 갔다.
그는 일부러 제이든이 감정한 내역을 구해서 보기도 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좋은 얘기도 있고 안 좋은 얘기도 있었으나 아무리 봐도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가 틀림없었다.
‘대부분은 4급 감정사 일을 2, 3년 정도 한 뒤에 3급 감정사 시험에 도전하지만 이 녀석은 성장 속도로 보아 1년 정도면 3급을 치겠다고 하겠는데? 그때 얼마나 성장했는지 봐서 침을 좀 발라 둬야겠어.’
그런데 1년도 되기 전에 제이든 로스가 3급 감정사 시험을 신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올리버 로렌스는 허겁지겁 감정사 협회를 찾아가 해당 시험에 시험관으로 참여하겠다고 자원했다.
원래 내정된 시험관은 다른 감정사였으나 올리버 로렌스가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시험관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다.
“어디 보자. 혹시 3급 감정사를 우습게 알고 덤빈 거라면 단단히 혼내줘야지.”
잔뜩 벼르고 시험장에 들어갔던 올리버 로렌스는 사흘간 지속된 시험이 끝나자마자 제이든을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올리버 로렌스 때문에 한동안 제이든은 학을 떼었다.
“너 그거 아냐? 내 제자가 되고 싶어서 금화 싸 들고 나 따라다닌 감정사가 줄 세우면 카이에른 성벽을 한 바퀴 돌고도 남아요.”
“감사합니다만 로렌스 선생님, 저는 지금 누구 문하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그러지 말고, 나한테 조금만 배우면 진짜 괜찮은 감정사가 된다니까. 응? 지금 스승님 안 계신다면서.”
“돌아가셨지만 스승님이 남겨주신 자료로 공부하고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스승님 성함이 어떻게 되는데? 이만한 제자를 길러낼 스승님이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밝히지 말라고 하셔서요. 죄송합니다.”
결국 제자로 들이는 것은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제이든을 눈에 띄게 각별히 여기는 데다 누군가 제이든에 대해 안 좋은 말이라도 할라치면 정색을 하고 펄쩍펄쩍 뛰었다.
오죽하면 로렌스의 숨겨진 아들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을까.
나중에 제이든이 세시온 다미에르 이후 최연소 2급 감정사가 되었을 때는 더 허무맹랑한 소리도 나왔었다.
“세시온 다미에르의 숨겨진 제자의 사촌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나? 동방에서 밀항해 온 감정사라는 얘기도 있었어. 난 그게 그럴싸하게 들리더라. 과거가 없는 게 설명되잖아.”
“전생에 뜻을 이루지 못한 감정사가 윤회의 마법을 타고 기억을 가진 채 다시 태어난 게 아니냐는 설도 있었지.”
“아이, 이제 그만하고 얼른 돌아가 보세요. 저도 이제 떠날 겁니다.”
제이든은 피니어스와 엘리노어의 등을 밀어 보내고 다시 마부석에 올랐다.
인사를 마치고 레오와 핀을 양쪽에 거느린 채 말을 타고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참 잘 어울려 보였다.
-부러워?
아실리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제이든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 음, 아냐, 고양이가 별소리를 다 하네. 저기 갈림길 나왔다. 초행길이라 집중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마.”
제이든이 말을 빨리 몰기 시작하자 아실리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저녁엔 에른스트 관에서 묵는다면서. 그렇게 빨리 안 가도 저녁 식사 전에 도착할 거야.
“너는 가봤지만 난 초행길이라니까. 너도 수도에 진짜 오랜만에 오는 거잖아. 길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어떻게 알아?”
-어, 그건 그렇네.
아실리는 순순히 납득하고 콧등을 앞발로 문질렀다.
에른스트 관은 카이에른 외곽 에른스트라는 소도시에 있는 건물인데, 옛날에 도시와 같은 이름의 에른스트 남작이라는 귀족이 소유했던 저택이었다.
본가는 아니고 수도에 소유한 별장 같은 저택이었는데, 수도의 부호 힐튼이 사들여서 고급 여관으로 개조했다.
말이 여관이지 일반인들이 묵기는 어려운 고급 숙소여서 부유한 상인들이나 귀족들이 쉬어가는 곳이고 사업상 만남의 자리로도 자주 이용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5성급 호텔 같은 곳인데, 힐튼은 이 사업으로 부를 쌓은 집안이었다.
특색이 있는 저택이나 고성의 별채 등을 사들여서 소위 힐튼 관이라 불리우는 고급 숙소를 만들었다.
도시마다 옐로우 코우치가 있는 것처럼 힐튼 관도 도시마다 존재했다.
“호텔왕 힐튼이라……, 사업도 이름 따라가는 건가?”
-응?
“아, 내 고향에도 대대로 비슷한 사업을 해온 집안이 있는데 이름이 같아서.”
원래라면 제이든이 힐튼 관 같은 최고급 숙소를 잡을 리가 없지만, 오늘 저녁에 거기 묵게 된 것은 아카디아 백작 덕분이었다.
포니를 테스트해 주기로 한 마법사의 일정 때문에 그 지역으로 약속이 잡혔고 아카디아 백작이 약속 장소를 에른스트 관으로 잡은 것이다.
포니는 이미 하루 전날 에른스트 관으로 떠났는데, 제이든이 동부로 간다고 하니 지나는 길이니까 다른 숙소를 잡지 말고 거기서 묵어가라고 했다.
“동부로 가기 전에 포니 아가씨를 한 번 더 보게 돼서 우리 포이 좋겠네.”
“포잉!”
제이든의 말에 포이가 귀를 까딱거리며 까만 눈을 반달처럼 접고 웃었다.
* * *
에른스트 관은 정면 입구에 ‘에른스트-힐튼’이라고 금박으로 새겨진 커다란 현판이 아니면 그냥 고풍스러운 옛 저택 같은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오래된 느낌을 그대로 살렸지만 안쪽은 저택의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구석구석 꼼꼼히 보수를 하고 머무는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포이야, 포이! 내가 과자 챙겨 놨어. 이따가 밥 먹고 나서 아실리랑 같이 먹자!”
반갑게 뛰어나온 포니 뒤로 아카디아 백작이 설렁설렁 걸어 나왔다.
“어서 오시오. 제이든 씨. 마침 딱 저녁 식사 전에 잘 도착하셨군요. 같이 식사합시다.”
언제 봐도 아카디아 백작은 귀족치고 참 소탈하다. 그는 스스럼없이 제이든을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탁에는 아카디아 백작 외에 청백색의 독특한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 여성이 한 사람 있었다. 언뜻 보아도 마법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레티샤 세이녹입니다. 마법사고요.”
“감정사 제이든 로스입니다.”
레티샤는 제이든보다 포이에게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 토끼인가?”
레티샤가 포니에게 묻자 포니가 얼른 대답했다.
“맞아요. 얘가 포이예요. 얘는 공중에서 춤출 수도 있어요.”
레티샤는 포니의 염력을 시험했고 포니의 염력은 마나에서 나오기 때문에 마법의 영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포니는 생물을 움직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레티샤가 테스트를 할 때 작은 물건들은 쉽게 움직였고 물처럼 유동적인 물질을 움직이는 것도 보여 줬지만 생물은 움직일 수 없었다고 했다.
“저 토끼를 포니 아가씨가 움직일 수 있었다는 건 아마 토끼와 포니 아가씨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토끼가 전혀 거부감 없이 포니 아가씨의 마나가 인도하는 대로 협조했기 때문일 거예요. 식사 후에 한번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포니 아가씨와 포이가 원한다면 전 괜찮습니다.”
제이든의 승낙하에 식사 후 포니와 포이의 공중 부양 시연이 있었다.
“아니, 아니, 토끼는 뛰지 말고, 온전히 포니 아가씨의 힘에만 의지해 보세요.”
포니가 포이를 움직이려는 방향으로 포이가 함께 뛰는 바람에 몇 번 실패가 있었지만 결국 납득한 포이가 힘을 빼고 포니 혼자 포이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생물을 움직이는 건 정말 어려워요. 포니 아가씨도 대단하지만 저 토끼도 보통 아니네요.”
레티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포이를 계속 바라봤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듯한 게 고깔모자 속에 넣어 가고 싶은 눈치여서 제이든은 슬그머니 포이를 몸으로 가렸다.
포니는 무난히 마법사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일단은 아카디아의 본가에서 레티샤의 제자라는 마법사가 수업하고 레티샤는 몇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나중에 아카데미에 들어갈 나이쯤 되어 아카데미로 갈지 마탑으로 갈지를 결정하게 된다고 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티샤는 다른 일정이 있어 머물지 못한다고 했고 포이와 포니는 저녁 내내 실컷 함께 놀았다.
“내일 헤어질 거니까 오늘은 같이 자도 돼요?”
“포이잉?”
둘이 나란히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더니 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나자 신나게 포니의 방으로 뛰어갔다.
방에서도 한참 더 놀다 둘이 같은 베개를 베고 잠든 소녀와 토끼의 모습은 동화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귀여웠다.
우리 포이 요즘 꽤나 무거워져서 자다가 배 위로 올라오면 묵직하던데, 자면서 포니를 걷어차거나 하진 않아야 할 텐데.
제이든은 한쪽 옆구리가 허전해서 괜히 아실리를 집적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 * *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제이든은 문득 잠에서 깨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선득하니 기분이 안 좋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실리?”
옆구리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던 아실리가 왠지 머리를 들고 일어서 있었다.
“실리, 왜 안 자고?”
-나도 지금 막 깼어.
나직하게 고르릉거리는 아실리의 목소리가 왠지 불안했다.
제이든은 몸을 일으켰다.
“뭔가 기분이 좀 안 좋은데.”
-제이든도 그래? 나도 털이 자꾸 일어서는 게 기분이 나빠.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실리가 침대에서 사뿐 뛰어내렸다.
창문이 푸르스름한 것을 보니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인 듯했다.
-나 포이한테 좀 가보고 올게.
아실리가 막 방문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복도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가 없어졌어요. 포니 아가씨, 포니 아가씨가 없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