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41화 (141/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1화

40. 비뚤어진 마음(2)

“맞은편 회의실에 계시는지 몰랐는데 다 들으셨겠네요.”

“예. 어쩌다 보니 제가 얽혀서, 끼어들기 좀 뭣했는데 엘리노어 양이 시원하게 혼내 주셔서 후련하네요.”

엘리노어가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세상 얌전한 아가씨처럼 소곤소곤 말했다.

“제가 참 상냥한 사람인데, 어쩌다, 아주 어쩌다 한번 욱하면 앞뒤 못 가릴 때가 있어요. 늘 그런 건 아니랍니다.”

“그럼, 그럼, 우리 엘리가 얼마나 요조숙녀인데. 아주, 아주 가끔 한 번씩 암사자로 변해서 그렇지.”

엘리노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끼어든 피니어스를 노려보자 피니어스는 무서운 척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엘리노어는 다시 제이든을 보며 입을 열었다.

“로시에르는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옹졸하네요. 제이든 씨, 기분 상하셨죠?”

“아닙니다. 하논 감정사 입장에선 언짢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기에리 감정사에게 그렇게 대해선 안 되지만요.”

카이엔은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있긴 해도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로시에르도 평소 귀족티를 심하게 내는 편도 아니었다.

제이든의 생각에 이번 일은 우선적으로 칼로스라는 의뢰인의 잘못이었다.

개인 의뢰 계약을 맺었다 해도 다른 감정사에게 추가 의뢰를 할 수는 있지만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숙소에 있는 감정사였다.

한 마디쯤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였는데 로시에르로서는 기분이 나쁠 만했다. 차라리 로시에르에게 소개를 해 달라고 했으면 속으로야 어떻게 느끼든 간에 모양새가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가족끼리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하논 부인까지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았겠지만 기에리 감정사에게 함부로 막말을 하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엘리노어가 한숨을 쉬자 피니어스가 또 말을 보탰다.

“제이든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라서 나도 순간 화가 나더라니까.”

“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슨 일 낼까 봐 내가 먼저 나온 거라고.”

엘리노어가 장난스럽게 피니어스를 밀었고 제이든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하논 감정사는 어머니와 무척 가까우신가 보지요? 어머니가 매일 편지를 보내시던데.”

감정사 숙소에서 비둘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로시에르였다.

경매 관련 비둘기 외에 우편국을 거치지 않고 본가에서 매일 오는 비둘기가 따로 있었는데 아침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창으로 날아들어 오는 걸 봤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 오는 것도 본 일이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누나 손에 자랐는데 그 누나마저 차원 너머로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고 있는 제이든으로서는 로시에르가 조금 부러웠다.

저도 모르게 제이든이 그런 기색을 비쳤던지 피니어스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아서라, 부러워할 거 없다. 로시에르가 너한테 그렇게 예민한 것도 어머니 때문일지 몰라.”

엘리노어는 로시에르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지만 귀족이어서 가문 간의 친분이 있었다.

피니어스는 반대로 평민 출신이고 집안끼리 친분은 없으나 로시에르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둘 다 다른 면으로 로시에르를 잘 아는 편이었다.

“나와 로시에르를 아카데미의 쌍룡이라고 하는데, 선후배라 다행이지 같은 기수였으면 좀 힘들었을 거야.”

피니어스가 말을 이었다.

“로시에르는 어릴 적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고 본인도 노력을 많이 했어. 집안도 좋았고. 누구에게 뒤처져 본 적도 없고 실패를 겪어 본 일이 없다 보니 자신이 넘기 힘든 장애물과 마주쳤을 때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

“성격이 문제야. 그렇다고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면 돼? 제힘으로 극복할 생각을 해야지. 그리고 남보다 좀 뒤처지면 어때? 앞설 때도 있고 뒤처질 때도 있고, 이걸 더 잘하는 사람도 있고 저걸 더 잘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어떻게 사람을 획일적으로 줄을 세울 수 있겠어?”

“뭐, 엘리 말이 맞지만 세상엔 정말 조그만 걸로도 무너지는 사람들이 꽤 많으니까.”

후배의 뒷말을 하기 싫어서인지 피니어스는 말을 좀 아끼는 듯했으나 제이든은 피니어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가 권재인이던 시절, 고등학교 선배 중 유명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십 년 가까이 윗 기수여서 직접적인 안면은 없었지만 워낙 유명한 선배여서 한참 후배들도 모두 알았다.

손꼽히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잘생긴 인물에 공부도 탁월하게 잘했다. 집안의 뒷받침이 있는 데다 본인도 성실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까지 순탄한 길만을 걸었기에 다들 부러워했다.

대학 졸업 후 잠깐 다녔던 대기업에서 나와 직접 차린 스타트업 회사도 승승장구하고 젊은 기업인으로 뉴스에도 나오고 인터넷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곤 했는데, 어느 날 재인은 그의 자살 소식을 뉴스에서 보았다.

모르는 새 그의 회사가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투자자들에게 고소당할 위기에까지 처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있는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렸고 그의 죽음은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재인으로선 그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없었다. 오죽하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싶었을 뿐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면서도 머리를 갸웃거리곤 했다.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능력도 있었고 인맥도 있었다. 나이도 젊었는데 다시 재기할 엄두를 낼 수도 없을 정도였을까? 게다가 그에게는 든든한 본가도 건재했는데.

“한 번도 실패를 안 해 봐서 그래. 하다못해 학생 때 시험에라도 실패를 해 보거나 살면서 어려움을 겪어 봤으면 그런 위기에 닥쳤을 때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고 했을 텐데. 작은 실패도 안 겪어 본 사람이 갑자기 바닥에 쿵 떨어지니까 견디질 못한 거지.”

그를 잘 안다는 다른 선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재인은 너무 과한 말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형도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지.

너무 순탄한 경로만 걸어온 사람은 고난에 부딪혔을 때 그 언덕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그 사람도 그 언덕을 어떻게든 넘어갔다면 더 큰 사람이 됐을 텐데 아쉽게 됐다고 했었다.

“로시에르가 저래 봬도 멘탈이 강하질 않아요. 집안……, 그, 어머니 때문에 더 그럴 거야.”

엘리노어도 말을 보탰다.

로시에르는 하논 가의 삼남이다. 귀족 가문의 장남은 보통 가업을 잇고 차남은 군이나 관료 계통의 일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시에르는 셋째 아들이라 원래는 큰 기대 없이 평균치만 하면 될 정도의 위치였다.

그런데 로시에르는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이 나서 학문을 해도 되고 관료의 길로 가도 대성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부모, 특히 모친 쪽이 막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만큼 큰 기대를 걸었고.

로시에르가 감정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모친은 은근히 못마땅해했었지만 어쨌든 로시에르가 감정사를 선택했으니 최고의 감정사가 될 거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로시에르도 상당히 부담을 느낀다고. 그래서 어머니 말이 나오면 금방 예민해지거든. 곁에서 본 사람들은 다 알지. 물론 그런 부모님들이 적지 않지만 하논 부인은 좀 심해.”

“셋째니까 좀 풀어 줘도 될 텐데 하논 부인은 오히려 장남이나 둘째는 그냥 부친에게 맡기고 셋째에게 모든 관심을 다 기울이시는 것 같아요. 기대치도 높고.”

“로시에르가 또 그 기대치를 다 채우며 자라 왔으니까. 또래 중에서는 항상 선두였고.”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제이든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사문도 집안도 알려지지 않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제이든 로스가 툭 튀어나와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건가 보군요.”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고, 평민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등장하자마자 파죽지세로 젊은 감정사들 중 선두로 나서면서 세시온 다미에르 이후 최고의 천재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게다가 나이도 몇 살이나 어렸다.

로시에르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만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께도 꽤나 닦달을 받았을걸? 제이든은 그런 부모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니에요. 저도 안답니다. 제가 겪은 건 아니지만 제 고향에도 그런 분들이 있거든요.”

제이든은 속말을 삼켰다.

그런 부모들이라면 아마 내 고향에서 더 많이 봤을걸요.

어쩐지 로시에르가 아침에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리 반가운 눈치가 아니더라니.

하지만 로시에르도 나이가 서른인데 아직도 그렇게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면 좀 곤란하지 않나?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뭐 로시에르도 좀 더 지나고 현실을 받아들이면 차차 적응하겠지. 아니면 진짜 악착같이 수련해서 제이든을 넘어설지도 모르고.”

“그래요. 그 얘긴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포잇!”

한쪽 옆에서 계속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포이가 드디어 끼어들 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깡충 뛰었다.

“저런, 우리 포이 배고팠구나. 그것도 모르고 안 좋은 이야기만 길게 했지? 어서 밥 먹으러 가자.”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 피니어스가 물었다.

“그런데 그 가면 건은 어떻게 됐어?”

“아, 칼리스타 님이 한 달쯤 후에야 시간을 내실 수 있다고 해서, 제가 혼자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요.”

제이든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글쎄, 그 가면을 분실했다지 뭡니까!”

“뭐라고? 그럴 수가 있어?”

“사무실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창고 구석에 뒀을 때는 오히려 오랫동안 아무도 손을 안 댔는데, 귀한 물건이라고 사무실 금고에 모셔 놨더니 도둑이 들어서 금고를 홀랑 털어갔다네요.”

제이든은 입맛을 다셨다.

“가면 말고도 사업상 중요한 문서도 도난당해서 그 뒤처리하느라 레옹 바레 씨는 정신이 없다더군요. 만나보지도 못했어요. 그 조셉이라는 비서만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지도 궁금해하셨는데 아쉽게 됐네. 신고는 했겠지?”

“물론이죠. 제가 사무실에 찾아간 날도 치안국에서 사람이 나왔던데요. 찾게 되면 연락을 준답니다.”

“레옹 바레의 금고 정도라면 보안이 상당히 튼튼했을 텐데.”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엘리노어가 뜯어 주는 닭고기를 먹고 있던 아실리가 수염을 뾰족하게 세우면서 제이든 쪽을 보았다.

-뭔가 개운하지 않아. 안 좋은 냄새가 나네.

“포잉?”

포이가 얼굴을 들고 이쪽저쪽으로 코를 킁킁거리자 아실리가 포이를 향해 머리를 저었다.

-그런 냄새 말고, 안 좋은 느낌이 든다는 뜻이야.

“포이이.”

* * *

그 무렵, 지하 공방에서는 노인의 어둡고 주름진 손이 가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더니 종지 안에 고인 용액에 피를 섞었다.

용액이 피와 함께 끈적하게 엉겨붙자 그는 가면의 눈구멍 가장자리를 따라 끈적한 용액을 발랐다.

“눈을 다오.”

노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갸름한 타원형 가죽 조각처럼 보이는 것을 건넸고 노인은 그것을 가면의 눈구멍 위에 덮었다.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세심하게 붙이자 가면의 눈구멍이 완전하게 막혔다.

눈구멍을 덮은 가죽 조각은 마치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의 눈처럼 보였다.

양쪽 눈을 다 막은 노인이 가면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가면을 얼굴에 썼다.

가면을 쓴 노인이 뒤에 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막혀 있는 눈 부분 위로 물결이 흔들리듯 움직이는 문양이 떠오르더니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자를 데려와.”

가면 뒤에서 음침한 음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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