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40화
40. 비뚤어진 마음(1)
“포이는 어디 있어?”
카이에른 경매장에는 경매 진행 중에 동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
아실리가 포이를 혼자 둘 리 없는데 어쩐 일인지 방에는 아실리뿐이었다.
-포니가 와서 뒤뜰에서 노는 중이야. 로이드랑 피터도 같이 있고. 나도 같이 있다가 잠깐 올라왔어.
“그래? 내가 내려가 보고 올 테니 실리는 좀 쉬고 있어.”
며칠째 제이든이 일하러 간 동안 아실리가 혼자 포이를 돌보느라 힘들었을 것 같았다. 우리 아실리, 육아 스트레스 생길라.
숙소의 뒷문으로 나오니 벌써 꺄륵꺄륵 웃는 소녀의 목소리와 포잉포잉거리는 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왓, 차가워!”
뭘 하고 노는지 피터가 질색하는 소리도 들리고.
“앗, 제이든 아저씨!”
제이든을 먼저 발견한 포니가 반갑게 외쳤고 포이가 돌아보더니 깡충깡충 뛰어와 매달렸다.
“포잇! 포잇!”
“그래, 그래, 우리 포이 잘 놀았어? 포니 아가씨랑 뭐 하고 놀았어?”
포이를 안은 채 몇 발 더 앞으로 걸어가던 제이든은 저절로 감탄사를 토하며 멈춰 섰다.
“와! 이거 포니 아가씨가 만든 건가요?”
“예. 포이가 분수를 좋아해서요. 예쁘죠?”
눈앞에 있는 것은 어른 허리춤 정도의 높이까지 물을 뿜어 올리고 있는 앙증맞은 분수였다.
제이든의 팔에서 뛰어내린 포이가 분수 옆으로 달려가더니 이것 보라는 듯이 깡충깡충 뛰면서 까만 귀를 깃발처럼 팔락였다.
커다랗고 넓은 함지박에 담긴 물이 포이의 몸짓을 따라 몇 갈래로 갈라져 춤추듯 튀어 오르면서 물방울을 사방으로 튕겼다.
앗, 차가워라. 아실리가 방으로 피신한 이유를 알겠네.
하지만 춤추듯 일렁거리는 꼬마 분수는 아주 예뻤다.
“포니 아가씨,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대단하네!”
전에 나뭇가지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걸 봤는데, 그새 물을 분수처럼 끌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마법 운용이 능숙해진 걸 보고 제이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직 마법을 제대로 배운 일도 없는데 벌써 이 정도면 나중에 상당한 마법사로 자랄 소양이 엿보였다.
“포니 아가씨는 염동력 쪽으로 특화된 재능을 갖고 계신다 하더라고요.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능력이 좀 달라서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하셔야 할지 연구가 필요하대요.”
로이드의 말에 따르면 아카디아 백작령의 마법사가 포니를 테스트해 본 후 일반적인 마법사의 재능과 다른 포니의 능력 때문에 좀 더 노련한 마법사의 의견을 구하려고 수도로 보낸 모양이었다.
“그러네요. 염동력이라…….”
제이든이 카이엔의 마법 체계를 잘 모르긴 하지만 염동력이라면 정신의 힘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초능력의 일종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마법의 재능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아리송했다.
포니가 만나기로 한 마법사는 마탑에서도 꽤 이름이 있는 중견 마법사인데 현재는 다른 일을 보느라 수도 밖에 있고 일주일쯤 뒤에 포니를 봐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 카이에른 경매가 끝난 뒤로군요. 포니 아가씨,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빌게요.”
“예!”
포니가 힘차게 대답하며 두 팔을 만세 부르듯 위로 쳐들자 물이 춤추듯 옆으로 벌어졌고 그 위로 포이가 동동 떠올랐다.
포이가 분수 위를 헤엄치듯 맴돌면서 꺄르륵거리는 걸 보며 제이든과 로이드, 피터는 모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살아 있는 생물을 염력으로 움직이는 건 돌이나 나무 등 무생물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던데.
포이와 포니가 마음이 잘 맞아서 서로 협조적인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물과 포이를 함께 움직이는 걸 보면 포니의 염동력이 보통 자질을 가진 게 아닌 듯했다.
“우리 아가씨, 나중에 대마법사 되는 거 아닐까요? 혹시 마법사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염동력자가 될 건 확실해 보여요.”
피터가 중얼거렸고 제이든과 로이드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거 참, 이런 일은 껄끄러운데.”
제이든은 난처하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카이에른 경매가 무사히 잘 끝나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에 불편한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어쩐지 저 사람과는 얽히고 싶지 않더라니.”
제이든은 입맛을 다시면서 숙소의 회의실 건너편을 넘겨다 보았다.
반쯤 문이 열려 있는 건너편 방에서는 로시에르 하논이 4급 감정사 하나를 쥐 잡듯 잡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보조면 보조답게 맡은 일만 해야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그래?”
“죄송합니다. 하논 감정사님. 하지만 칼로스 씨가 부탁을…….”
“칼로스 씨가 내 의뢰인이지 당신 의뢰인이야? 로스 감정사의 의뢰인이야? 나한테 먼저 말을 해야지.”
로시에르보다 두어 살쯤 어려 보이는 4급 감정사는 할 말이 좀 있어 보였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참고 있었다.
“하논 감정사, 좀 삐딱하긴 해도 예의 바르고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영 아니네.”
계속 4급 감정사를 갈구는 로시에르가 심하다 싶어 좀 말려볼까 하고 제이든이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하여튼 이래서 아카데미 출신도 아닌 감정사를 단체 업무에 넣으면 안 된다니까. 근본이 없으니까 위아래도 모르고 질서도 없고 일의 선후 파악도 못 하고!”
-저 자식 저거,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제이든의 옆에 있던 아실리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고 포이가 불안한 듯 제이든의 옷소매에 매달렸다.
지금 로시에르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는 4급 감정사는 드물게 아카데미도 거치지 않고 따로 스승의 밑에서 공부하지도 않고 오로지 독학으로 감정사 자격을 딴 사람이었다.
이번 경매 기간 중 3급 감정사들을 보조하기 위해 배정된 두 명의 4급 감정사 중 하나였는데, 숙소에서 처음 제이든을 만나자마자 눈을 빛내면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로스 감정사님,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사인이요?”
카이엔에서도 팬들이 유명 음악가나 무대의 배우 등의 사인을 받아 가는 일은 흔하지만 감정사의 사인을 받는다는 건 들어보지 못해서 제이든은 잠시 당황했었다.
“예. 팬입니다.”
4급 감정사는 얼굴을 조금 붉히면서 말했다.
“저는 마르코 기에리라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감정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스승을 모실 기회도 없었고요. 그런데 제이든 로스 감정사님 이야기를 듣고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재작년에 5급 통과하고 작년에 4급이 되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로스 감정사님 같은 분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힘을 냈거든요.”
마르코 기에리는 어부의 아들이라고 했다. 집안에 감정사나 그쪽 계통에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도 혼자 뜻을 세워서 늦게나마 독학으로 감정사 공부를 시작했고 결국 감정사가 된 걸 보면 자질도 있었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제이든은 기꺼이 서명을 해주고 진심에서 우러난 격려의 말도 덧붙였다.
카이엔에서 독학으로 감정사 자격증을 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4급이 최선이었다.
수습 감정사로 취급되는 5급 감정사 시험을 통과해야 감정사 협회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마르코 기에리는 사정상 그 이후에도 독학으로 공부한 모양이니 제이든 자신보다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이든에게는 세시온의 서재라는 보고가 있었고 아실리라는 일타강사도 붙어 있었으니까.
마르코 기에리는 제이든의 사인을 받은 후 너무 기쁜 나머지 주변에 롤 모델의 사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하필 로시에르의 개인 의뢰인이었던 부호 칼로스가 그를 붙잡고 제이든을 소개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제이든이 카이에른 경매 중 로드포드 백작과 마르소 상단의 개인 감정을 맡았던 것처럼 로시에르는 칼로스의 개인 감정을 맡고 있었다.
칼로스는 경매에 나온 유물 중 슈라이베른 왕조의 신전에서 사용했던 보석 성물에 관심이 있었고 로시에르의 조언을 받아 낙찰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낙찰받은 후 제이든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추가 감정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마르코와 동향이었고 마르코의 부모가 칼로스의 아래에서 일한 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르코에게 제이든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말을 전해 들은 제이든은 정중하게 의뢰를 거절했다.
감정사 한 명과 의뢰 계약을 했다고 다른 감정사에게 추가 의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교차 감정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제이든으로서는 추가 의뢰도 받고 싶지 않았고 로시에르 하논의 의뢰인과 얽히고 싶지도 않았기에 좋은 말로 거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단지 마르코가 제이든과 칼로스 사이에서 말을 전했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마르코를 쥐 잡듯 잡을 일인가!
“에잇!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못 참겠네!”
참다못한 제이든이 벌떡 일어났는데, 복도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제이든보다 한 발 먼저 건너편 방문을 걷어차듯 거칠게 밀어젖혔다.
“옆방까지 다 들리는데 작작 좀 하죠?”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화려한 금발 머리의 여자였다.
“엘리노어 양.”
항상 상냥하게 눈웃음을 머금고 있던 엘리노어 유스틴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하논 감정사, 보조 감정사가 당신 종입니까?”
“엘리노어 양이 모르셔서 그럽니다. 이 녀석이 제 의뢰인을 빼돌려서 다른 감정사에게 붙였다고요.”
“나도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말을 전해 줬다는데, 그게 그렇게 죽을죄인가요? 하논 감정사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면 좋기는 했겠지만, 다른 감정사에게 추가 감정을 의뢰하는 게 계약 위반입니까? 혹시 칼로스 씨와 독점 감정 같은 걸 계약했나요?”
“…….”
“아니겠죠, 전속 감정사가 있어도 다른 감정사에게 추가 감정을 의뢰하면 안 된다는 그런 법은 없으니까. 나 같으면 내가 의뢰인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걸 자각하고 보조 감정사 잡을 시간에 내 수련에 더 힘을 기울이겠어요.”
엘리노어는 초록 눈을 매섭게 치켜올렸다.
“독학으로 감정사 자격증 땄다고 무시하던데, 우리처럼 좋은 스승 두고 아카데미 다니지도 못했으면서 자격증 딴 걸 칭찬은 못 할망정……, 기에리 감정사가 평민이라서 그럽니까? 하논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입니다.”
“엘리노어 양, 그런 게 아니고…….”
“하논 부인이 참 자랑스러워하시겠습니다.”
“여기서 어머니 말이 왜 나옵니까?”
로시에르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쿵쿵거리며 방을 나와 이 층으로 올라갔다.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와! 엘리노어 양 그렇게 안 봤는데 혀가 칼끝 같네!”
제이든이 아실리에게 속삭였고 아실리도 미야옹 울었다.
-그러게, 화내게 하면 안 되겠어.
“포이잉.”
제이든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던 포이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귀를 팔락거렸다.
엘리노어가 마르코 기에리에게 몇 마디 다독이는 것 같더니 방을 나와 회의실로 들어왔다.
피니어스도 옆방에서 나타나더니 엘리노어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엘리, 하논 부인 말은 하지 말지 그랬어. 그 녀석 약점이 어머니인 거 알면서.”
“화가 나서 그랬어. 평소엔 엄청 예의 바르고 점잖게 굴면서 기에리 감정사처럼 만만한 사람한테는 그렇게 함부로 굴잖아. 아픈 데 좀 찔려보라고 그랬지.”
“그거 다 제이든한테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런 거야.”
피니어스가 제이든 쪽을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가 말리러 가려던 참인데 우리 엘리가 성질이 좀 급해서, 나를 확 밀치더니 먼저 가시더라고.”
“피니어스가 가면 한 대 때릴까 봐 그랬지.”
엘리노어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말간 얼굴을 하고 생글 웃더니 제이든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