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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36화 (13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6화

38. 가면(3)

제이든은 잠깐 레옹 바레를 주시했다.

어린애처럼 포동포동한 뺨을 가진 중년 남자는 흰 수염을 달고 빨간 옷을 입기만 하면 산타클로스처럼 보일 법했다.

푸근해 보이는 얼굴에는 전혀 악의가 없었고 제이든을 향한 호감과 호기심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를 일이지. 세렌토의 딜런 경도 겉보기에는 얼마나 무해한 사람이었나.

“본명입니다.”

제이든은 딱 잘라서 말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의 본명은 권재인이지만, 이 세계에서 다른 이름을 쓴 적이 없고, 처음 받은 이름이니까 본명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

그리고 원래 진명은 함부로 남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잖아.

“냥!”

-잘했어.

바레 무역의 사무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자 아실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울었다.

-조심성이 생겼네. 가르친 보람이 있다옹.

뿌듯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애교 있게 늘어뜨린 아실리가 앞발로 제이든의 다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 * *

“형님, 아버님께서 많이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아버지도 그 가면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하셨어. 전부터 제이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기도 하셨고.”

제이든은 피니어스를 따라 그의 아버지인 수하르 렌 박사의 연구실에 가는 길이었다.

수하르 렌은 동방 출신 문화인류학자이고 학계 최고의 권위자이니 가면에 대해서 조언을 구할 수 있을 듯했다.

피니어스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아버지에게 연락해 주었고 수하르 렌의 수락을 받아 그의 연구실을 찾아가는 것이다.

숙소에서 마차로 두 시간쯤 가자 카이에른 중심부를 벗어나 외곽을 두른 성벽이 보였다.

“이쪽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요.”

“아, 제이든은 안티퀴타에 와 본 적이 없나?”

“예. 처음입니다.”

카이에른의 서쪽 성벽 아래에는 흔히 ‘안티퀴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지역이 있다.

‘안티퀴타’란 고어로 ‘옛날, 또는 옛것’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처럼 대륙전쟁 이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네였다.

낡고 고풍스러운 집들 사이로 오래된 돌길이 이어져 있었다. 시냇물 위에 걸쳐진 목조 다리는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야, 이거 마차가 조금만 더 컸어도 못 지나갈 뻔했는데요.”

“응. 중간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한쪽이 뒤로 물러나야 해.”

외나무다리 위의 염소 두 마리도 아니고. 후진하는 마차를 생각하며 제이든은 미소를 머금었다.

수하르 렌의 연구실은 안티퀴타에서도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삼 층짜리 석조 건물에 있었다.

말이 석조 건물이지 벽돌도 아니고 큼직큼직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진짜 옛날식 건물이었고 삼 층이라 해도 그리 큰 집은 아니었다.

벽을 쌓은 큼직한 돌 사이는 작은 돌과 흙으로 야무지게 채워져 있었다.

“진짜 오래된 집이네요. 그런데도 엄청 튼튼해 보여요.”

“응. 팔백 년쯤 된 건물이라는데 중간에 보수를 좀 하긴 했지만 아직도 튼튼해. 이 동네에 있는 구조물이 대개 다 오륙백 년은 됐을걸?”

거리는 좁고 길은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건물들은 낡고 예스러웠으나 전체적으로 운치가 있었다.

수하르 렌은 벽과 천장이 모두 책으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그들을 맞았다.

세시온의 서재를 조그맣게 축소한 듯한 느낌의 방이었다.

“자네가 제이든인가? 이야기 많이 들었네.”

아들과 닮은 시원스러운 웃음으로 그들을 반겨 준 수하르 렌은 피니어스와 마찬가지로 장신에 잘생긴 이목구비였지만 확실한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양인 중에서도 무척 한국 사람처럼 생겼네.’

제이든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수하르 렌과 악수를 하고 머리를 꾸벅 숙였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야. 전부터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네.”

렌 박사는 소파 위에 잔뜩 쌓인 책을 한쪽으로 밀고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제이든 감정사는 이쪽으로 앉고, 레오는 고양이 친구랑 토끼 친구에게 바깥을 보여줘라.”

레오가 대답하듯 우왕 짖고 꼬리를 흔들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다시 보니 문 옆의 벽에 정원으로 통하는 아치형의 작은 문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레오는 능숙하게 앞발로 빗장을 밀어 열고는 아실리와 포이를 돌아보며 부르는 듯이 짖었다.

열린 문밖으로 아담한 정원이 보였다.

포이가 깡충 일어섰다가 아실리를 보았고 아실리는 다시 제이든을 보았다.

제이든을 혼자 두고 가도 되나 망설이는 듯해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니 그제야 레오 쪽으로 가면서 야아웅 울었다.

-금방 올게.

가끔 고양이인지 엄마인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니까.

피니어스가 차를 준비해 왔고 렌 박사가 제이든의 맞은편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

“그래, 흥미로운 탈을 봤다고?”

카이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이라고 하는데 렌 박사는 동방 출신답게 대뜸 탈이라고 하는구나.

“예. 우선 이 그림을 봐주세요.”

제이든이 그림을 꺼내놓자 렌 박사도 피니어스도 이채를 띤 눈으로 그를 다시 보았다.

“직접 그린 건가?”

“예.”

“흠, 기록용 영상구가 필요 없겠는데?”

렌 박사는 감탄하면서 가면의 앞모습, 뒷모습, 옆면 등을 상세히 묘사한 제이든의 그림을 살펴보았다.

“시타 말기의 축제용 탈이라고 감정했습니다. 당시 자주 사용되던 맹수 형태의 탈 중 표범 얼굴이고, 만듦새로 보아 일반인들이 사용한 것은 아니고 귀족 가문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이겠지요.”

“그렇지. 그런데 뭔가 더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날 찾아온 거겠지?”

“예. 여기 눈 가장자리를 둘러서 뭔가 덧대었다가 뗀 듯한 흔적이 있습니다.”

“호오!”

렌 박사는 돋보기를 가지고 와서 그림을 한 번 더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실물을 보지 못해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네는 이 눈이 막혀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하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대단한데? 자네 나이로 그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피니어스, 넌 어떠냐?”

옆에 앉아 함께 그림을 들여다보던 피니어스 렌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저도 같은 감정을 했겠지만 눈까지는 생각 못 했을 것 같습니다. 덧댄 자국을 봤어도 그냥 테두리 장식이 떨어져 나간 게 아닌가 생각했을 겁니다.”

제이든이 말을 보탰다.

“보존 상태가 너무 좋은데 그 부분만 손상된 게 좀 이상해서요. 누가 고의적으로 떼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리가 있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가면이 눈을 막았던 가면이라고 확정하긴 어렵습니다. 사실 제 직감에 따른 판단이지 근거를 댈 수는 없어서요.”

제이든이 조금 곤란해하면서 말하자 렌 박사가 말했다.

“피니어스에게 듣자니 자네는 유물의 내력을 보기 시작했다면서?”

“예. 아직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아니고, 유물이 허용해 줄 때만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어딘가. 이미 2급 감정사의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건데, 그런 자네의 직감이라면 허술히 볼 게 아니지.”

제이든은 렌 박사가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두 눈을 막은 제례용 가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물건이라면 제가 뭔가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이 가면에서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거든요.”

수하르 렌 박사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만약 이 탈이 눈을 막은 제사장의 가면이라 해도 자네가 뭔가 느끼지 못한 것은 당연해. 왜냐하면 제사장의 가면의 모든 힘은 그 눈에 있으니까.”

그는 일어서서 책장 쪽으로 가더니 두루마리 한 묶음을 뽑아서 가져왔다.

“핀의 연락을 받고 찾아 두었네.”

그가 펼친 양피지 두루마리에는 눈을 막은 가면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옆에 제이든이 알아볼 수 없는 옛 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가면의 얼굴은 독수리였지만 만든 형태나 양식은 제이든이 보고 온 표범 가면과 거의 유사했다.

“이건 오래전 시타 왕궁에서 사용한 제사장의 탈이라고 하는데, 이 탈을 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하네.”

“예…….”

“옛이야기니까 물론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의 제사장에게 그런 힘이 있었던 건 사실인 것 같네. 그게 이런 가면의 힘이라는 것은 계속 비밀로 감추어졌다고 하고.”

세뇌의 힘인가. 무녀나 제사장들이 하늘이나 신의 힘을 받았다고 대중을 조종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 가면에 정말로 그런 힘이 있었다면 이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주술이나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거겠지.

“카이엔에 이렇게 눈이 막힌 가면이 들어왔다는 기록은 없는 걸로 아는데, 혹시라도 그 표범 가면이 맞다면…….”

제이든이 중얼거리자 렌 박사가 끼어들었다.

“아니, 기록은 없지만 딱 하나 들어왔다는 말을 내가 들은 적이 있네.”

“정말이요?”

“이십 년쯤 전인가.”

렌 박사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말을 이었다.

“아직 동방 대륙과의 뱃길이 끊기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 내가 관심 있는 서화를 보기 위해서 옛 시타 지역의 오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일세.”

당시 렌 박사가 방문했던 곳은 서방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오지였다.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갔던 곳에서 발견한 서화는 정작 렌 박사가 찾던 것은 아니었으나, 서화를 보관하고 있던 마을의 늙은 무녀가 오랜만에 방문한 외지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정신도 좀 오락가락하고 눈도 멀고 귀도 어두운 노인이었는데, 자기가 옛 시타의 대제사장의 후예라고 하더군.”

무녀는 그 증거로 대대로 내려오는 가면이 있었다고 하면서 대제사장만이 쓸 수 있었다는 신비의 힘을 지닌 가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흥미를 느낀 렌 박사가 혹시 그 가면을 볼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횡설수설하던 늙은 무녀는 그 가면은 옛날에 서방에서 온 사람이 가져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무녀가 말도 어눌하고 앞뒤가 안 맞기는 했지만, 말을 잘 맞춰 보니 가면을 가져간 자는 아르카니오의 마법사라고 하는 듯했다네.”

카이엔으로 돌아온 후 렌 박사는 가면에 대해 좀 알아보았으나 그런 가면에 대한 기록이나 소식은 전혀 없었다.

“옛날 일이고, 무녀의 기억도 그리 온전하지 않았고, 그때는 바다에서 사고도 종종 나던 시절이라 어쩌면 그 가면이 카이엔으로 건너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카이엔에 건너온 몇 점의 가면은 모두 눈구멍이 나 있는 전형적인 축제용 가면이었고, 눈이 막힌 가면은 여태까지 한 번도 나타난 일이 없었다.

“만약 자네가 보고 온 가면이 옛날 아르카니오의 마법사가 가져왔던 그 가면이라면 대단한 발견일 텐데. 그게 무역업체의 창고 같은 곳에서 그렇게 쉽게 발견되었다는 게 놀랍기는 하네.”

“심증일 뿐이니까 딱 그런 가면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확신을 가지려면 1급 감정사님께 부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이든은 마음속으로 칼리스타 클론을 떠올렸다.

거의 모든 물건의 내력을 볼 수 있는 1급 감정사라면 눈 부분이 없어도 가면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머리를 들자 창 너머로 정원에서 레오와 포이가 깡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실리는 창턱에 올라앉아 한쪽 눈으로 포이를 보고 한쪽 눈으로는 제이든을 지켜보는 것처럼 양쪽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 * *

지하 공방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이 피워져 있는 청동 향로에 뭔지 알 수 없는 잿빛 가루를 털어 넣던 주름진 손의 주인이 그의 등 뒤에 공손하게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본명이라고 했단 말이지?”

“예.”

“이상하군.”

노인은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가면은 알아보는 것 같더냐?”

“예.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확실히 재주는 있는 놈이군. 그러면 가면은 회수해 오고.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이 없으려나…….”

눈살을 찌푸린 채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비틀어 꼬던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놈 가족은 없나?”

“가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답하던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고양이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항상 데리고 다닙니다.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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