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4화
38. 가면(1)
제이든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사벨라 브렌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도자기 인형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기다란 밤색 속눈썹이 눈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기 어려웠다.
“이젠 옷을 입히지 않으셔도 추위에 떠는 꿈은 꾸지 않으실 겁니다.”
제이든이 말하자 이사벨라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로스 감정사님이 레나의 이야기를 들어줬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레나의 영혼이 이 도자기 인형의 몸을 떠났기 때문에?”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말을 가려서 대답했다.
“글쎄요. 둘 다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내력을 본 게 아니라 영혼이 깃들었다는 말씀을 드려서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요.”
그는 도자기 인형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겉으로 봐선 모르시겠지만, 이 인형은 조금 전에 몸 안쪽 어딘가 살짝 금이 갔어요. 제 느낌이지만 그때 레나의 영혼이 이 몸을 떠난 것 같습니다.”
이사벨라가 계속 말이 없자 제이든은 조금 불안해졌다.
“제 말을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이 인형을 판매할 예정이라고 하셨죠? 만약 감정 중에 인형이 깨진 게 불편하시다면, 제가 레나를 구매하면 어떨까요?”
어쨌든 내가 감정하는 중에 인형이 깨졌으니까.
제이든은 조금 책임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사벨라 브렌트가 그녀의 어머니처럼 인형을 사랑해 줄 것 같지 않았는데, 이제 영혼까지 빠져나간 레나의 도자기 몸체를 그냥 돌려보내기가 왠지 애처로웠다.
“아니, 아니에요.”
이사벨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조금 건조해 보이던 밤색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감정사님 말씀을 믿어요. 사실 저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인형이라 그냥 장식해 두었을 뿐 크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도, 가끔 이 인형이 저를 지켜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요.”
그녀는 머리를 살짝 저었다.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고 따뜻한 시선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냥 기분 탓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옷을 제거했다가 그런 꿈을 꾸고 나서는 마음에 걸려서 팔아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거든요.”
이사벨라는 옆에 두었던 옷을 다시 인형에게 조심스럽게 입히기 시작했다.
“이제 팔 생각이 없어졌어요. 안쪽이 깨졌어도 상관없고 이제 영혼이 떠났다 해도 괜찮아요. 더 손상되지 않게 제가 소중히 잘 보관할게요. 어머니와 레나의 추억이 깃든 인형이니까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레나도 기뻐할 거예요. 일단 제가 감정서를 쓰겠지만 감정서에는 적어넣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알려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관심을 가졌으면 좋았을 걸 그랬죠. 레나에게도 어머니께도 미안하네요.”
옷을 다 입힌 후 인형을 쓰다듬던 이사벨라가 제이든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감정사님, 이것 좀 보세요. 왠지 레나의 몸이 조금 따뜻해진 것 같아요. 한번 만져보세요.”
“?”
제이든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이사벨라를 따라 옷 속에 가려진 레나의 몸을 만져보았다.
매끄럽고 차가운 도자기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별다른 온도 차이는 없는데?
“어때요? 감정사님. 아까보다 조금 따스한 것 같지 않아요?”
제이든은 앞에서 밤색 눈을 반짝이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다가 입매를 포근하게 늘였다.
“예. 브렌트 양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따뜻해진 건 도자기가 아니라 이사벨라의 마음인 것 같지만 뭐 어떤가.
* * *
-인형의 마음을 보고 목소리를 듣다니, 우리 제이든 정말 많이 발전했어!
아실리는 마카롱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크림을 핥으면서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사벨라 브렌트는 감정료를 두둑하게 챙겨준 것은 물론 제이든에게 르 미엘의 과자를 한 상자 선물로 주었다.
게다가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아실리와 포이에게 동물용 간식까지 듬뿍 챙겨주었다.
-반려동물 전용 과자점이 있다니!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
“그러게! 게다가 이 과자 거의 르 미엘 만큼이나 비싸!”
제이든은 과자 상자 안에 들어 있는 홍보용 메뉴표를 보며 놀랐다.
아직 카이엔에서도 대중화가 되어 있는 건 아니고 대도시에만 몇 군데 있을 뿐이라는 반려동물 전용 간식 가게인데 카이에른에 있는 것이 본점이라 규모가 가장 컸다.
일반 사료와 간식도 팔고 있었지만 좋은 재료를 써서 예쁘게 만든 강아지용, 고양이용, 토끼용 등의 간식이 따로 나와 있는 게 신기했다.
“일반 간식은 그렇게 비싸지 않은데 포장이며 모양을 예쁘게 다듬어 놓은 과자들이 비싸네. 역시 수도니까 이런 장사도 되는 거겠지.”
-암만 예쁘고 비싸도 과자는 그냥 과자야. 가끔 기분전환으로 먹는 거지 역시 신선하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이 좋아.
“맞는 말인데 그런 것치곤 아실리 너도 과자 사 달라고 조를 때가 많지 않아?”
제이든이 어이없는 듯 묻자 아실리는 앞발 발등으로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으면서 새침하게 말했다.
-난 나이가 많잖아.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맛있는 거 먹어도 돼.
“야, 이 양심 없는 고양이야. 이 정도 나이라니. 어떤 고양이가 너처럼 오래 사는데?”
제이든과 아실리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포이는 건초와 토끼용 사료에 간식까지 빵빵하게 먹은 뒤 통통해진 배를 안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
-다음 의뢰는 누구지?
아실리가 포이에게 이불을 물어다 덮어주면서 물었고 제이든이 대답했다.
“레옹 바레.”
-동부 사람이지?
“응, 이름은 그렇지만 카이에른 근교에서 오래 살았대.”
-동방 대륙에서 건너온 가면을 봐 달라고 했던 의뢰지?”
“맞아. 그림이나 상세한 설명은 없었는데 혹시 내가 찾고 있는 동방 탈이 아닌가 해서.”
-언제 볼 거야?
“내일 오후에. 오늘은 기운을 많이 써서 좀 쉬어야 해.”
유물의 내력을 보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몸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환각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정신적으로도 회복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보는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제이든은 아직 하루에 하나 이상 유물의 내력을 보는 것은 힘에 겨웠다.
-얼른 자자. 푹 쉬어야 내일 감정도 하지. 경매위원회 측에서도 언제 부를지 모르는데.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맡은 세 점의 유물 감정은 끝났고 다른 유물들은 로시에르를 비롯한 감정사들이 보고 있지만, 제이든도 2급 감정사가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경매 기간 동안 대기하게 되어 있었다.
“로렌스 선생님이 안 계셔서 내가 제일 급수가 높다 보니까 어깨가 무겁네.”
중얼거리며 까무룩 잠이 든 제이든의 꿈속에 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눈이 왔는데 하나도 춥지 않고 오히려 따스한 느낌이었다.
고운 눈밭 위에는 누군가 걸어간 발자국이 두 줄로 나란히 찍혀 있었다.
발자국이 이어지는 끝으로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머리가 길고 어깨에 숄을 두른 여자였고 또 한 명은 키가 작은 소녀였다. 레이스 장식이 있는 청색 비단옷이 눈에 익었다.
소녀가 제이든 쪽을 돌아보면서 생긋 웃었다. 하얀 도자기 같은 피부에 발그스름한 볼,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처럼 맑고 깊은 눈과 분홍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 * *
“신기하네. 인형이 그렇게까지 자아를 가질 수 있다니.”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피니어스가 말했다.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과 오래 같이 지내고 마음을 나눈 물건에 영성이 깃드는 걸 전에도 본 적 있거든요.”
엘리노어 유스틴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이든과 피니어스, 엘리노어는 숙소 주변의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동물 동반이 가능한 곳이라 아실리와 포이, 레오와 핀도 함께였다.
실내와 실외 양쪽에 다 테이블이 있었는데, 겨울 동안에는 실내만 영업하다가 삼월부터 실외 테이블도 가능하다고 해서 정원의 테이블에 앉은 참이었다.
아직 날이 쌀쌀해서 그런지 실외에 앉은 손님은 없었지만 제이든 일행은 개와 고양이, 토끼에 매까지 있다 보니 실내보다는 실외가 편했다.
“엘리는 마법에 익숙하니까 그런 물건을 볼 기회가 좀 있었겠지?”
피니어스의 말에 엘리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번 본 적 있어.”
그러고 보니 엘리노어는 원래 감정사를 하려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감정 관련 마법이 발현하는 바람에 감정사가 되었다고 했지.
“맞아요. 그래서 이론이 좀 부족하죠.”
엘리노어가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에이, 무슨 소리. 늦게 시작했는데도 어찌나 악착같이 공부했는지 먼저 시작한 사람들 다 따라잡았으면서.”
피니어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엘리노어 유스틴에 대해서는 제이든도 들은 말이 있었다.
카이엔의 세 거울 중 피니어스 렌과 로시에르 하논은 일찍부터 감정사로 길을 잡았고 착실하게 이론을 쌓고 막대한 양의 공부를 축적해 감정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감정사가 거치는 경로로, 이론을 쌓아 3급 감정사가 된 후 필요한 감정 마법을 익히는 경우였다.
물론 일반 감정사들보다 습득이 빠르고 실력이 좋아서 일찍 3급을 따고 카이에른 아카데미의 쌍룡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수재들이었고.
반면에 엘리노어는 원래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학문적으로 매우 뛰어나서 동부 아카데미의 천재로 유명했던 엘리노어는 열아홉 살 무렵 마법 문자를 연구하다가 갑자기 마법 발현을 느꼈다.
“처음엔 마법사가 되어야 하나 했었는데, 제게 발현된 마법이 거의 감정 쪽으로 치우쳐 있는 걸 알게 되었죠.”
듣기로 엘리노어는 마법사가 되기에도 충분한 마법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언어학자에 뜻을 두었던 만큼 옛 유물이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엘리노어는 고민 끝에 감정사의 길을 선택했다.
유물과의 교감이 탁월하게 좋았고 3급 감정사들이 익히는 감정 관련 마법은 물론 그 이상의 마법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마법을 제외하고 본다면, 교감이 먼저 이루어지고 공부를 나중에 시작한 면에서는 제이든과 비슷한 경로라고 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공부를 꽤나 열심히 했는데도 이론 면에서는 피니어스나 로시에르보다 부족해요.”
“대신 마법 쪽으로는 우리보다 훨씬 낫지. 핀! 레오 놀리지 마!”
이야기를 하던 피니어스가 옆에서 따로 밥을 먹던 동물들에게 소리쳤다.
핀과 레오가 티격태격하다가 핀이 레오의 접시에 담긴 고기를 물고 나무 위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핀은 고기를 문 채 낮은 나뭇가지 위에서 놀리듯이 오락가락했고 레오는 나무 밑에서 분한 듯이 왕왕 짖었다.
레오야 원래 허당기가 다분하지만 핀은 점잖고 카리스마 넘치는 매인데, 레오와 함께 있을 때면 은근히 장난을 치곤 한다.
아실리는 핀과 레오를 보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포이를 향해 미야옹 울었다.
-밥 먹다가 저러면 안 되지? 우리 포이는 저런 거 배우면 안 돼.
“포이이.”
식사를 끝내고 피니어스와 엘리노어는 숙소로 돌아갔고 제이든은 레옹 바레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소화도 시킬 겸 걸어가면서 제이든이 아실리에게 말했다.
“동방의 가면이라니, 왠지 흥미로운 유물일 것 같아. 좀 기대가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