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3화
37. 인형의 옷(2)
아이들이 방을 빠져나가고 인자하게 생긴 중년 부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약간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를 보기 좋게 틀어 올린 부인이 어깨에 숄을 걸친 채 방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흐트러뜨린 쿠션을 제자리에 놓고 나서 창문 아래 탁자에 놓인 도자기 램프를 살펴본다.
제이든은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램프의 몸체도 도자기 인형이었다. 나무에 기댄 양치기 노인이 램프의 몸체였다.
램프를 살피고 난 부인이 하프시코드 쪽으로 와서 비뚤어진 의자를 바로 놓으면서 하프시코드 위의 인형을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세실리 녀석이 또 만졌구나. 조심하라고 이르는데도.”
옆으로 약간 틀어진 상자를 반듯하게 놓은 부인이 방을 나가면서 불을 껐다.
창문에서 달빛이 들어와 하프시코드 위의 인형을 비췄다.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도자기 인형의 얼굴이 제이든에게는 시무룩해진 것처럼 보였다.
-만져도 되는데.
인형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날 만져준 건 세실리뿐이었어. 같이 놀고, 같이 자고 싶은데.
제이든이 이전에 내력을 봤던 유물들은 그 유물을 둘러싼 과거의 사연을 보여주었는데, 이번엔 유물의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그만큼 눈을 더 뜬 것일까? 아니면 이 인형이 니콜레타의 찻주전자처럼 자아를 가진 물건인 걸까? 그래서 그 마음이 느껴지는 건가?
제이든은 조용히 인형의 기억을 지켜보며 귀를 기울였다.
* * *
인형이 원래부터 자아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살며 그들을 지켜보는 동안 언젠가부터 인형에게 차차 자아가 생겨났다.
조금 전 방에 들어왔다 나간 부인의 이름은 엠마였다. 인형은 엠마의 할머니가 아주 작은 소녀였을 때부터 장식장 위의 유리 상자에 다른 인형과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이고 예술가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라고 사람들은 인형을 소중히 모셔두고 감상만 할 뿐 손대지 않았다.
인형은 엠마의 할머니가 자라고, 아가씨가 되고, 부인이 되어 아들딸을 낳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른이 된 아들이 또 아이들을 낳았고 그들이 자라서 다시 어른이 되는 오랜 시간을 인형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다들 인형을 좋아했고 예쁘다고 칭찬했지만 한 번도 만져주거나 같이 놀아준 적은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안고 다니는 건 헝겊으로 만든 인형이었고 남자아이들이 갖고 노는 건 나무로 된 기사 인형이었다.
도자기 인형은 차차 그 인형들이 부러워졌다.
나도 같이 놀고 싶다. 나도 같이 자고 싶다. 높은 곳에서 공주처럼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사람의 손길을 느끼며 함께 놀고 싶은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램프를 받치고 있는 양치기 노인이 꾸짖었다.
-우린 그런 인형이 아니야. 넌 카티메인 공방에서 온 도자기가 아니냐? 긍지를 가져야지.
-…….
-주위를 둘러봐라. 이 거실에만 해도 많은 골동품이 있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다.
-왜 그런 거죠?
-우릴 만든 사람이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고, 우리와 함께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진심으로 우릴 아꼈기에 이렇게 영혼이 깃든 거야. 우린 아이들이 갖고 노는 인형과는 다른 존재다.
인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난 아이들과 노는 인형이었으면 좋겠어. 할아버지는 램프를 지키는 일이 있지만 난 그냥 예쁘게 차려입고 서 있는 것밖에 못 하는걸.
세실리는 긴 세월 인형의 앞을 지나간 많은 소년과 소녀들 중 처음으로 인형을 만져준 아이였다.
오동통한 손으로 유리 상자를 열고 세실리가 처음 인형을 만진 날 아이는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지만 도자기 인형은 아이의 손길이 좋았다.
세실리가 자신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꾸지람을 들은 뒤 아이는 인형을 유리 상자에서 꺼내지는 않았지만 상자 밖으로 쓰다듬어 주곤 했다.
세실리가 하프시코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인형은 하프시코드 위로 옮겨졌다.
서툰 솜씨로 건반을 누르고 나면 꼭 인형을 올려다보며 생글 웃거나 말을 걸곤 했다.
어느 날 자매들과 놀고 난 후 세실리가 하프시코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언니 인형의 이름은 밀리고, 여동생 인형의 이름은 앤지인데 너는 이름이 없지? 너는……, 응, 레나라고 하자. 레나! 맨날 상자 안에 있어서 답답하지? 내가 그림책 읽어 줄게.”
태어난 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도자기 인형에게 이름이 생겼다. 이름이 생긴 후 레나의 자아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밀리나 앤지처럼 아이들과 놀고 싶어도 자신은 같이 놀 수 없다는 것도 인지할 수 있었다.
내 몸은 차가워. 헝겊 인형이나 나무 인형처럼 따뜻하지 않아. 날 안으면 아이들이 추워할 거야. 그러니까 난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해야 해.
어느 겨울날, 세실리가 하프시코드를 치러 올 시간인데 오지 않았다. 집안은 온통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왜들 그러지? 레나는 불안해졌다.
도자기 인형에겐 심장이 없는데도, 마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듯한 불안감이 레나를 가득 채웠다. 인형은 필사적으로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세실리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 겨울날에.
사람들은 다락방 꼭대기부터 지하실 바닥까지 샅샅이 뒤지는 모양이었지만 세실리를 찾지 못했다.
레나는 하프시코드 위에서 꼼짝할 수 없었지만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세실리는 내게 이름을 줬어. 나와 세실리는 마음이 연결된 사이야. 내가 세실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거실의 풍경이 흐려져 갔다. 레나는 자신이 공중에 둥둥 떠오른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레나를 끌어당기는 기운이 느껴졌다.
세실리야. 세실리가 느껴져.
아이의 기운을 따라간 레나는 저택에서 제법 떨어진 헛간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세실리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여기도 찾아봤을 텐데 왜 세실리를 찾지 못했을까? 구석에서 짚 덤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였을까?
-세실리, 세실리!
레나는 힘껏 세실리를 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기 힘으로 아이를 깨울 수 없었던 도자기 인형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세실리를 찾았어, 세실리를 찾았다고. 저기 헛간 안에 있어.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아무도 레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저대로 두면 죽을 거야.
인형은 다시 세실리에게 돌아갔다.
어떻게든 할 수 없을까? 인형은 세실리의 품에 파고들었다.
양치기 할아버지의 말처럼 내가 영혼을 가진 명품이라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세실리를 깨울 수 있지 않을까?
세실리, 내게 이름을 준 아이야. 제발 일어나.
“……레나?”
추위에 하얗게 질린 채 잠들어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세실리, 내가 보여?
추위에 의식을 잃었던 아이는 레나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레나를 느끼는 것 같았다.
“레나, 나 너무 무서웠어.”
세실리는 헛간에 있는 썰매를 보러 왔었다. 겨울이 되면 썰매를 탈 수 있다고 했는데 올겨울에는 눈이 통 오지 않아서 썰매를 꺼내지 못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렸기에 이제 썰매를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썰매를 보러 왔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다쳤다.
“나 큰 소리로 불렀지만 집에까지 들리지 않았나 봐. 아무도 와주지 않았어.”
헛간은 너무 추웠다. 세실리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헛간 구석으로 기어가 쌓여 있는 짚 덤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나은 것 같았다.
“너무 추웠는데 자꾸 잠이 왔어.”
저체온으로 의식을 잃은 아이는 사람들이 찾으러 왔을 때도 깨어나지 못했고 사람들은 아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가버렸다.
“나 또 졸려. 레나.”
-정신 차려, 세실리. 자면 안 돼!
레나는 애타게 세실리를 불렀지만 아이는 정신을 잘 차리지 못했다.
-따뜻하게 해줘야 하는데. 따뜻하게.
나는 왜 차가운 도자기 인형이지.
안타까워서 속이 타들어 갈 때 세실리가 다시 눈을 떴다.
“레나, 따뜻해.”
-?
“따뜻해.”
세실리는 레나를 껴안았다. 품속의 도자기 인형에게서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온 마음을 다해 세실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던 레나의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 것일까. 아이와 인형은 함께 온기를 나누며 서서히 잠들었다.
* * *
“의사가 기적이라고 했대요.”
“그러게 말이에요. 큰일 날 뻔했어요.”
누군가의 말소리에 레나는 천천히 깨어났다.
하프시코드 위의 상자 속이었다. 다시 인형의 몸으로 돌아온 건가? 세실리는? 세실리는 괜찮을까?
거실에서 사용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라더라. 정말 천만다행이야.”
“정말 괜찮대요? 계속 헛소리를 하던데. 레나가 와서 안아주고 따뜻하게 해줬다고.”
“레나가 누군데?”
“글쎄요?”
“아, 나 알아. 세실리 아가씨는 저 인형을 레나라고 부르던데.”
하녀가 손으로 레나를 가리켰다.
“아마 꿈을 꿨나 보지.”
세실리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며칠이나 지난 후였다.
“엄마, 레나를 한 번만 안아보게 해주세요. 절대 깨뜨리지 않을게요.”
죽다 살아난 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엠마 부인은 레나를 유리 상자에서 꺼내 세실리에게 안겨 주었다.
“차가워, 우리 레나. 나 때문에 차가워졌나 봐.”
“아니야. 세실리. 레나는 도자기 인형이라서 원래 차갑단다.”
“아니에요. 따뜻했어. 나 안아줬을 때 얼마나 따뜻했는데.”
“자, 이제 레나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가서 눕자. 그건 꿈이야.”
사람들은 다들 꿈이라고 했지만 얼마 후 세실리가 뜨개질을 배웠을 때 맨 처음으로 만들었던 것은 레나의 옷이었다.
“레나, 나 때문에 차가워졌지? 내가 옷을 만들었어.”
“세실리, 레나는 옷을 입는 인형이 아니야. 봐라. 벌써 옷을 잘 입고 있잖니.”
“예쁘지만 그림이잖아요. 진짜 옷이 아니야. 그래서 레나는 추울 거예요.”
엠마는 할 수 없다는 듯 레나에게 옷을 입힐 수 있게 해주었고 세실리는 서툴게 뜨개질한 옷을 레나에게 입힌 뒤 생글 웃었다.
“따뜻하지? 아직 잘 못 만들었지만 내가 바느질 연습해서 더 좋은 옷 만들어 줄게.”
“아니 옷 입힐 만한 헝겊 인형도 있고 나무 인형도 있는데 왜 하필 저런 고급 도자기 인형에다 옷을 입히려고 하는지.”
예전 같으면 도자기에 손도 못 대게 했을 할머니나 어머니도 세실리가 워낙 크게 아프고 난 뒤여서 그냥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
세실리는 유모에게 부탁해서 비단과 레이스로 레나의 옷과 모자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세실리에게 꿈을 꾸었다고 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세실리도 자신이 그때 꿈을 꾸었겠거니 생각하게 되었다. 레나에게 말을 걸거나 만지는 일도 없어졌지만 소녀 시절에 만들어 입혔던 옷은 그대로 두었다. 왠지 레나에게서 그 옷을 빼앗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딸들이 결혼할 때 엠마는 수집했던 도자기 인형이며 미술품들을 나눠주었다. 세실리는 레나를 원했다.
세실리가 어린 날의 일을 잊었어도 레나는 슬프지 않았다.
레나는 따뜻한 눈으로 그녀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결혼해서 딸을 낳고 그 딸이 또 자라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삼 년 전, 그녀가 병으로 결국 세상을 떠날 때, 그녀는 남편과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뒤 하프시코드 위의 레나에게 손으로 입맞춤을 보냈다.
“안녕, 레나, 오랫동안 날 지켜줘서 고마웠어.”
* * *
도자기 인형은 제이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옷은 세실리가 내게 준 마음이야.
인형의 눈이 아련하게 깊어졌다.
-아무도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은 누군가 들어줬으면 했나 봐. 나와 세실리의 이야기를.
이제 나도 떠날 때가 왔거든.
따각!
아주 작게, 도자기 인형의 몸속 어딘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돌아가. 나와 세실리의 이야기를 들어 줘서 고마워.
제이든의 눈앞이 서서히 흐려졌다.
어디선가 하프시코드의 음악 소리가 느릿느릿 들려오다가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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