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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32화 (132/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2화

37. 인형의 옷(1)

인형은 원래 이사벨라의 외할머니가 소녀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데 어머니가 물려받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도자기 인형을 모으셨어요. 수집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름 있는 장인이 제작한 작품을 몇 점 갖고 계셨죠. 돌아가시기 전에 다른 미술품이나 골동품과 같이 정리해서 자녀들에게 나눠 주셨어요.”

“그렇군요.”

“우리 어머니가 하프시코드를 하셨는데, 이 인형은 오래전부터 하프시코드 위에 장식되어 있었대요. 이것보다 더 값나가는 인형들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이걸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이 인형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이모들과 어머니에게 인형을 나눠주실 때 이 인형을 받고 싶다고 고르셨다는군요.”

하프시코드는 피아노 이전의 옛 건반악기이다. 지구에서는 피아노가 발달한 이후로는 거의 연주하는 사람이 없어졌지만, 카이엔에서는 피아노 외에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 이 옷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만드신 건가요?”

제이든이 묻자 이사벨라는 남자처럼 어깨를 으쓱 치켜올려 보였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기억하는 한 항상 옷을 입고 있긴 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잘……. 저는 인형이나 바느질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사람들이 여자답지 않다고 말들을 했지만 전 어릴 때부터 공부하고 계산하고 바깥일 배우는 게 더 좋았어요. 아마 제가 외동딸이 아니고 자매가 있었다면 인형은 다른 자매에게 갔을 거예요.”

“그럼 어머니는 지금……?”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삼 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이제 괜찮아요.”

제이든은 얼른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럼,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건 뭐지요?”

이사벨라도 진지한 얼굴을 했다.

“사실 예전에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는데 제가 인형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거든요. 감정사님은 옷 입히는 도자기 인형 보신 적이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그렇죠? 집에 어린애가 있다면 목도리나 리본 정도 둘러주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이렇게 모자부터 신발까지 해 입힌 건 저도 못 봤고요. 사실 어린애한테는 이런 도자기 인형은 못 만지게 하잖아요?”

“예. 그렇죠. 인형이라고는 해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인형과는 전혀 다르니까요.”

“전에 인형 수집가님이 한번 보러 오셨었는데 이렇게 옷을 입히는 건 도자기 인형의 가치를 오히려 가리는 일이라고 언짢아하시더라고요.”

“카티메인 공방의 도자기 인형은 유려한 채색으로 유명한데 그걸 가려 버린 셈이니까요.”

“맞아요. 아시다시피 이런 인형은 옷을 갈아입히면서 인형놀이를 하는 인형이 아니라 장식용 골동품인데 이런 옷을 입힌 것부터가 이상하다면 이상하지만.”

이사벨라는 손가락으로 도자기 인형이 입고 있는 비단옷을 젖혔다. 옷 속에 도자기에 채색된 물감이 보였다.

“잠시 봐도 될까요?”

“예.”

제이든은 도자기 인형의 옷을 조심스럽게 풀어 보았다.

안쪽의 도자기 인형은 역시 처음부터 옷차림이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로 제작된 인형이었다.

그녀는 조금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마음의 충격이 커서 유품 정리를 제대로 못 했어요. 최근에야 마음이 많이 안정되어서 남길 것과 남기지 않을 것 등을 정리하는 중인데요. 이 도자기 인형을 포함해 미술품 몇 점을 정리할 생각이었거든요.”

“예.”

“아까 말씀드린 수집가분이 도자기 인형 전시회를 알려주시면서 거기 이 인형도 출품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당연히 옷 없이요.”

이사벨라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래서 옷을 제거하고 전문 업체에 세척도 맡길 예정이었는데.”

그날 밤에 꿈을 꾸었다고 했다.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눈밭을 헤매는 어린 여자아이의 꿈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너무 추웠어요.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이불에 폭 파묻혀 자고 있는데도 어찌나 춥던지! 아침에 깨어났을 때도 몸이 덜덜 떨려서 금방 얼어 죽을 것 같았어요. 창문도 닫혀 있었는데. 어디 벽에 구멍이라도 난 줄 알았다니까요.”

그때가 정월 말이었다. 한창 추울 때기는 했으나 브렌트 가의 난방이 그리 허술할 리 없었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의사를 불렀지만 원인 모르는 오한은 서서히 괜찮아지더니 의사가 올 때쯤에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혹시 몰라 진찰도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지요. 그런데 같은 꿈을 사흘 연속으로 꾸고 나니 정말 오한으로 몸져눕고 말았답니다.”

그제야 그녀는 도자기 인형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꿈속에서 본 소녀의 얼굴이 도자기 인형과 닮은 것도 같았다.

벗겨 두었던 옷을 찾아다 도자기 인형에 도로 입혀 보았다.

“그랬더니 그 꿈이 사라졌나요?”

“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푹 잘 수 있게 되었어요.”

의사와 가족에게 이야기를 해봤는데 가족은 그냥 기분 탓일 거라고 하며 믿는 눈치가 아니었고, 의사는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꿈을 꾼 것 같으니 영양식과 약으로 몸부터 보하자고 했다.

혹시 저주 마법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어 마법사를 불러 보았는데 저주의 흔적은 없고 깨끗하다고 했다.

“확인하려고 그 후에 한 번 더 옷을 치워 봤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또 그 꿈을 꾸셨군요?”

“예. 정말 얼마나 춥던지. 다음 날 옷을 입히자 다시 그 꿈을 안 꾸게 되었고요.”

이사벨라는 추위를 기억하는 것처럼 양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물건의 내력을 볼 수 있는 1급 감정사님을 찾아가야 할까 싶었는데 아시다시피 1급 감정사님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잖아요.”

“그렇죠.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는 분들이어서. 의뢰를 넣을 수는 있지만 답변받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릴 테고요.”

“맞아요. 그런데 우연히 문관국의 지인에게서 로스 감정사님이 물건의 내력을 보시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카이에른 경매에 오시지 않을까 싶어 얼른 의뢰서를 보냈는데 다행히 의뢰를 받아주셔서 한시름 놓았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이든에게 들어오는 의뢰도 워낙 많다 보니 그중에서 선택받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럼 잠시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자유롭게 물건의 내력을 보는 수준은 아니어서 아무것도 못 보는 때도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제이든은 탁자 위에 놓인 도자기 인형을 주시했다.

비단과 레이스를 벗겨 낸 도자기 인형은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도자기로 유명한 브리엔테 지역에서도 이름 높은 카티메인 공방에서 만든 작품으로 바닥에 새겨진 카티메인의 소인이 진품인 것은 이미 확인했다.

카티메인은 본래 로얄 테이센의 도공이었다.

오레스 아켈리오가 8년간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그 도자기 회사가 아직 대기업화되기 전부터 테이센의 장인이었던 카티메인은 언젠가부터 그릇보다 인형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인형 제작을 위해 테이센에서 독립해 나왔기 때문에 카티메인 공방의 기법은 필연적으로 테이센의 기법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테이센 안료의 비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티메인의 도자기 인형은 다른 도자기 인형과는 그 색감이 달랐다.

옷을 벗긴 도자기 인형은 도자기 특유의 질감과 색감이 살아나서 훨씬 더 아름다웠다.

우유처럼 흰 얼굴에 조각된 섬세한 이목구비는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주름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묘사된 푸른 드레스와 초록 겉옷은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시리즈를 연상하게 했다.

“조각도 정교하지만 채색이 정말 아름답네요.”

비단이나 레이스로 만든 인형 옷은 그 나름대로의 따뜻한 매력이 있지만 도자기는 역시 도자기 특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자기 인형에 손을 대기 전 아실리 쪽을 힐끗 바라보니 아실리와 포이는 이미 제이든의 옆에 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잘 보고 있을게. 시작해.

제이든을 지키듯 옆에 붙어 앉은 아실리가 야웅 우는 것을 시작으로, 제이든은 인형에 손을 댄 채 몰입을 시작했다.

* * *

♬♫♩♪♬♬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건반악기의 소리. 피아노인가?

하프시코드였다. 제이든은 눈 아래에서 하프시코드를 치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복숭아처럼 볼이 발그레한 금발 머리 소녀가 하프시코드를 치고 있었다. 아직 숙련된 솜씨는 아니었지만 오동통한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따뜻한 색감의 양탄자가 깔린 방 건너편에 고풍스러운 안락의자와 차 탁자가 있고 그 아래쪽에서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양탄자 위에 앉아 인형 놀이 중이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유모인 듯한 여자가 한쪽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고.

“밀리 아가씨, 차 드세요.”

“앤지 양도 과자 좀 먹어 봐요.”

소꿉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잠시 후 소파에 엎드려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인형도 아이들과 함께 엎드려 있었다.

“하늘에 달이 커다랗게 떴습니다. 달 가운데로 하얀 날개가 달린 작은 용이 지나갔습니다. 용은 조그만 은빛 마차를 끌고 날아갔습니다. 밀리, 잘 듣고 있지?”

소리내어 그림책을 읽던 아이가 인형을 토닥였다.

‘나도 같이 놀고 싶다.’

제이든은 부러운 눈으로 아이들 쪽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건 그의 감정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돌아보자 의식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금방 자신이 있던 장소가 보였다.

하프시코드 위의 유리 상자에 든 도자기 인형이었다. 조금 전 이사벨라와 함께 보았던 그 인형, 비단과 레이스로 만든 옷은 입지 않았고 원래 만들어진 도자기 옷차림 그대로였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헝겊 인형을 부러워하는 것은 도자기 인형의 감정이었다.

털실로 만든 머리를 아이가 빗겨 주고 낡은 옷을 갈아입히고 그림책을 읽어 주고 밤에는 이불 속에서 팔베개를 하고 함께 자는 헝겊 인형들을 도자기 인형은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어. 세실리랑.’

세실리?

앞에서 하프시코드를 치고 있던 소녀가 연습을 마쳤는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도자기 인형을 올려다보면서 생글 웃었다.

“나 네 군데나 틀렸지? 그래도 이제 끝까지 다 쳤어.”

소녀는 손가락을 조물조물하다가 다시 생긋 웃었다.

“힝, 그래, 다섯 군데 틀렸어. 내일은 안 틀리고 칠 거야.”

아이는 하프시코드 의자 위로 올라와서 팔을 뻗어 유리 상자를 살짝 쓰다듬었다.

“세실리 아가씨,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리고 그 인형은 만지면 안 돼요. 마님이 아끼시는 건데. 얼른 내려오세요.”

그녀를 본 유모가 말리자 아이는 혀를 쏙 내밀고는 하프시코드 아래로 내려가면서 인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또 봐!”

의자에서 내려가 깡충깡충 자매들을 향해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제이든과 도자기 인형이 함께 응시했다.

저 아이가 세실리구나.

제이든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 도자기 인형은 저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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