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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31화 (131/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1화

36. 카이에른 경매(6)

블랑셰가 보여준 것은 놋쇠로 된 오래된 시계 뚜껑 두 개였다.

두 개 모두 가릉빈가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형태는 서로 조금 달랐다.

“시계는 없어요. 할아버지는 시계 제작 외에도 독특한 도안 디자인에도 흥미가 있으셔서, 도안만 새겨 본 뚜껑도 여러 개 있거든요.”

블랑셰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장 한쪽에 쌓아 둔 두루마리며 종이 뭉치를 뒤적거리더니 몇 장의 종이를 빼서 제이든에게 주었다.

“이거예요.”

낡은 종이에는 가릉빈가 무늬가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조금씩 형태와 디자인을 바꿔서 그린 것인데 그중 한 장에 큼직하게 그려진 가릉빈가 무늬가 원형인 것 같고 다른 것들은 그 원형을 이리저리 변형시켜 본 스케치인 듯했다.

원형으로 보이는 가릉빈가 무늬는 놋쇠 뚜껑에 새겨진 것보다도 더 해송박물관의 소장품과 비슷했다.

그림 옆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필기체로 쓴 문장이 있었고 날짜가 위에 적혀 있었는데 군데군데 잉크가 날아가고 더럽혀진 부분이 있었다.

“블랑셰 양, 뭐라고 적혀 있는지 혹시 아시나요?”

“아, 읽기 어려우시죠? 할아버지가 워낙 악필이신 데다 본인만 알아보시는 기호를 써서 암호처럼 적어 놓으셔서. 이리 주세요. 뒤포르 공방 사람들 아니면 못 읽을 거예요.”

블랑셰는 종이를 받아들고 읽어 주었다.

“훼손된 부분이 많긴 하지만 대강 내용은 알아볼 수 있어요. 카이엔력 282년, 9월, 하이옌 항구. 동방에서 온 붉은 기와. 전설 속 동물처럼 보이는 새의 문양이 매우 흥미롭다. 형태는 새와 같지만 날개 돋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지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어떤 새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새가 아닐지도? ***를 갖고 있다. 구상 중인 레메세리온 시계와 어울릴 듯. 음, 여기는 뭘 갖고 있다는 건지 잘 안 보여요.”

“아마 악기일 겁니다.”

제이든이 말하자 블랑셰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아, 정말이네요, 악기라고 생각하면 맞겠어요. 모양도 그렇고 레메세리온 시계와 어울린다고 쓰신 것도.”

“레메세리온 시계는 뭔가요?”

“할아버지가 동방의 왕족에게 의뢰받아서 제작하셨던 시계인데요. 의뢰인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어서 시계에 음악적인 면이 표현되면 좋겠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의뢰인이 정쟁에 휘말려 죽는 바람에 시계 제작은 결국 무산되었다고 했어요.”

그녀는 종이를 다시 제이든에게 보여주었다.

“이 아래쪽은 손상이 심해서 못 읽겠네요. 좀 더 조사해 보신 듯한데.”

블랑셰는 파란 눈으로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악기를 갖고 있다는 걸 금방 아시는 걸 보면 아시는 문양인가요?”

“예…….”

얼마나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제이든은 잠시 망설인 뒤 입을 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제가 아는 문양 같기는 합니다. 동방의 전설 속 신수로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한다고 해요. 주로 여성의 몸에 날개가 있는 형태로 나타나지요.”

“오! 역시! 저는 처음 들어보는데 감정사님은 동방의 전설까지 박식하시군요.”

아닙니다. 저도 카이엔에서 공부한 내용에는 이 새와 비슷한 건 없었어요.

제이든은 속으로 말하면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이쪽 세계의 동방 문화에 대한 건 그리 밝지 못하니까, 여기도 가릉빈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보면 볼수록 이 가릉빈가는 해송박물관에 있던 수막새의 가릉빈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를 살짝 기울여 아실리에게 보여주니 아실리도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실리가 모른다면 정말 이쪽 세상의 물건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

“귀한 유품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걸 좀 기록해도 되겠습니까?”

“예.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제이든은 배낭에서 기록용 영상구를 꺼냈다. 아실리와 포이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갖고 다닌 게 이럴 때 쓸모가 있네.

“영상구가 있으시군요. 그……, 무게가 상당할 텐데 갖고 다니시는 건가요?”

마르틴 경감과 블랑셰가 놀란 얼굴을 했다.

영상구 자체가 고가라서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제이든이 가진 영상구 같은 경우 부피와 무게가 상당했다.

제이든도 니콜레타의 마법 배낭이 아니라면 가지고 다닐 엄두도 못 낼 거였다.

마법사용은 부피도 작고 무게도 가볍지만 마법을 못 쓰면 사용을 못 하니까.

프린트가 안 되는 게 아쉽지만 일단 영상으로 기록한 뒤 따로 스케치북을 꺼내서 재빨리 그림을 그렸다.

“감사합니다. 제가 찾던 유물인데 정말 잘 봤습니다.”

“예.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제이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실리와 포이와 함께 정원에서 놀고 있던 블랑셰가 그들이 떠나려고 하자 아쉬운 얼굴을 했다.

울타리의 나무 문을 통과하자 바로 치안국의 복도가 나왔다.

“이거 진짜 좋네요. 포탈처럼 멀미할 일도 없고. 장거리까지 된다면 그냥 ‘어디로든 문’인데.”

“어디로든 문이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어렸을 때 보던 이야기에 나오는 문이에요.”

공간이동 포탈과 달리 이 공간이동 문은 단거리밖에 안 되고 치안국이나 마탑처럼 특수한 곳 몇 군데에만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이든 씨도 이 문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블랑셰 양은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건가요?”

“음, 사실 주택 침입과 절도에 관해서는 정상 참작이 많이 되었습니다만, 저렇게 철저히 격리하는 이유는 증인 보호를 위해서입니다. 블랑셰 양이 제보했던 조직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어서 여전히 수사가 진행 중이고, 블랑셰 양은 중요한 증인이니까요.”

“예…….”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암습하거나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지.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데 저렇게 사회와 뚝 떨어진 공간에 격리되어 있는 게 안쓰러웠다. 그나마 시계 제작과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치안국을 나와 카이에른 시내를 돌면서 포이에게 구경을 시켜 주고 미리 알아놓은 맛집에서 식사까지 마쳤다.

아실리가 가고 싶어 하던 르 미엘에서 과자도 사고.

“엄청 비싸네!”

과자점이 아니라 동화의 세계처럼 꾸며놓았던 르 미엘의 과자는 굉장히 비쌌다. 그런데도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뭐 그래도 기념으로 한 번쯤 먹어 봐도 괜찮겠지. 이거 봐, 정말 예쁘지?”

가격 때문에 놀라기는 했지만 먹는 거 가지고 아실리나 포이가 눈치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이든은 얼른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얼굴을 펴고 과자를 들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과자는 하나하나가 마치 정교한 세공품처럼 만들어져 있어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포장도 하나하나 어찌나 고급스럽게 되어 있는지 포장 값만 좀 아껴도 가격대를 많이 낮출 수 있을 듯했다.

-뭐 그게 또 마케팅이겠지.

아실리가 종알거리며 과자의 향기를 맡았다.

“진짜 맛있긴 하다.”

제이든은 단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데도 마약이라도 넣은 것처럼 당기는 맛이었다.

과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눈을 감고 잠시 음미하던 아실리가 과자를 꼴깍 삼킨 후 분홍색 혀를 내밀어 입 주변을 살짝 핥았다.

-크림이 정말 맛있어. 단맛도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명성이 아깝지 않은 맛이야.

고양이는 앞발 발등으로 턱을 살짝 훔친 후 말을 이었다.

-그래도, 스타일은 다르지만 플로렌스네 과자도 이것 못지않아.

포이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몫의 과자를 오물거렸다.

“하이옌이라, 거기 아무래도 내 고향과 관련된 열쇠가 있는 것 같아.”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한때는 동방 대륙과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이었던 하이옌 항구.

“카이에른 경매만 끝나면 하이옌으로 가 봐야겠어.”

-내일부터는 개인 의뢰를 볼 거지?

“응, 브렌트, 레옹 바레, 지안 수의 순서로 볼 거야.”

많은 의뢰 중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것으로 세 가지만 골랐는데, 기대를 채워줄 만한 물건이면 좋겠는데.

제이든의 가슴이 어느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르쳤지만, 천직이라니까.

아실리가 미야옹 울면서 과자를 하나 더 집었다.

* * *

“이 인형입니까?”

브렌트 은행의 상속녀 이사벨라 브렌트가 감정을 의뢰한 골동품은 오래된 인형이었다.

인형이라고 해도 어린이들이 안고 다니며 가지고 노는 그런 인형은 아니었다.

인형 제작에도 장인이 있다. 단순한 놀잇감이 아니라 유명한 장인이 만든 인형은 예술품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사벨라 브렌트가 감정을 의뢰한 인형도 고무나 헝겊으로 만든 게 아니라 도자기로 만든 거였다.

‘드레스덴 인형이랑 비슷하면서도 느낌은 꽤 다르네.’

독일의 드레스덴 도자기 인형이 유명하듯 카이엔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인형이 있는데, 브렌트의 인형은 좀 색다른 부분이 있었다.

나무나 헝겊으로 몸을 만들고 옷을 해 입히는 장난감 인형과 달리 도자기 인형은 장식품이라, 옷과 장신구까지 다 핸드페인팅으로 그려 넣는 형태였다.

“이 인형의 옷은 혹시 만들어 입히신 겁니까?”

제이든이 지금 보고 있는 인형은 반투명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맑은 도자기로 제작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흰 피부에 옅은 분홍빛을 띤 뺨,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잘 표현된 명품이었다.

그런데 옷을 입고 있었다. 낡았지만 고급 비단과 레이스로 만든 드레스였고 이백여 년 정도 전에 카이엔 동부, 옛 에테노른 지역의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양식의 옷이었다.

작은 얼굴을 감싸고 있는 곱슬곱슬한 금발도 털실 같은 재질이었고 그 위에 갸우뚱하게 쓴 모자도 직물 재질이었다.

살짝 들어 올린 치맛자락 아래로 하얀 가죽 신발이 보였다.

“아뇨. 제가 어렸을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옷을 입고 있었어요.”

맞은편에 앉아서 부채를 가볍게 흔들고 있던 이사벨라가 말했다.

“신기하죠? 저도 도자기 인형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인형은……, 다른 데선 한 번도 못 봤어요.”

“보관이 아주 잘됐네요.”

도자기야 깨지지만 않는다면 몇백 년이든 잘 유지되겠지만 이 인형은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데 옷 상태가 이렇게 좋다는 건 중간에 만들어 입힌 게 아닐까?

도자기 인형의 명품은 그 자체로 예술품인데 옷을 해 입혔다는 건 오히려 작품을 가리는 일인데. 하지만 그랬다기에는 옷이나 모자가 처음부터 함께 제작된 것처럼 너무 찰떡이었다.

“이미 훌륭한 감정서가 있는데 굳이 저한테 또 의뢰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이미 이십여 년 전에 감정한 감정서가 붙어 있었다.

이백여 년 전의 유명한 인형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감정되어 있는 감정서는 꽤 꼼꼼해서 제이든이 그다지 보탤 말이 없을 정도였다.

“예.”

브렌트 은행의 상속녀는 흑백이 분명한 짙은 밤색의 눈에 힘을 주면서 제이든 쪽으로 몸을 가까이 숙였다.

“실은, 로스 감정사님은 골동품을 감정하실 뿐 아니라 그 이상을 읽어내실 수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의 모양 좋은 입술에서 낮은 말소리가 이어졌다.

“이 인형은 좀 이상한 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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