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30화 (13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30화

36. 카이에른 경매(5)

하지만 제임스 베인의 미술품 증빙 서류 사기 행각이 밝혀지는 것은 카이에른 경매가 끝나고도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현재 시점에서는 증빙 서류가 위조되었다는 것도 아직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중요한 경매품 두 점을 경매에서 제외하는 것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크게 반발한 사람은 당연히 작품의 소유주였다.

‘안개’와 또 한 작품의 소유주는 엘데온 영지 출신의 노먼 소튼이라는 사업가였는데 나름대로 예술품 수집 경력이 오래된 사람으로 카이에른 경매에도 몇 번이나 참여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일찌감치 카이에른에 와서 머물고 있던 그는 연락을 받고 경매위원회에 찾아와 심한 유감을 표시했다.

“서류가 불확실하다니, 그 서류들은 엘데온 박물관에서 작성한 서류고 미술상과의 거래 기록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요. 여태까지 몇 번의 전시회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작품이고. 설마 ‘안개’가 크레투스의 대표작이 아니고 내가 지방 사람이라고 무시해서 트집을 잡는 건 아닐 테지?”

격식 갖춘 정장에 모자를 갖춘 노신사는 지팡이로 응접실 바닥을 두드리며 수염까지 덜덜 떨었고 경매위원은 그를 달래느라 한껏 공손하게 응대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선생님, 단지 저희로서는 감정사가 위작이 의심스럽다는 평가를 한 작품을 경매에 낼 수 없기 때문에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저 젊은이가 그런 감정을 했다는 거잖소?”

노먼 소튼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예. 제이든 로스 감정사는 젊은 분이지만 정말 실력 있는 2급 감정사입니다.”

“뭐, 나도 수집가니까 이름을 들어 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젊은데. 감정사는 사실 자격증보다 경험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소? 올리버 로렌스도 정신머리가 없지, 이 중요한 경매를 젊은것들에게만 맡기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그는 또 바닥이 깨져라 지팡이를 두드렸고 젊은것들-피니어스와 제이든-도 그 부분에선 노먼 소튼과 동감이었다.

“도대체 로렌스 선생님은 이런 시기에 남부인지 동부인지 가서 돌아오지도 않고!”

“그러니까 말이야, 감정사의 실력만으로 통하지 않는 부분도 있는 건데. 카이에른 경매는 로렌스 선생님을 믿고 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렇게 자리를 비운 건 직무 유기야, 직무 유기!”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투덜거리며 올리버 로렌스를 성토하고 있자 토마스가 난처한 얼굴로 스승을 옹호했다.

“그래도 경매위원님들이 모두 경험 많고 관록 있는 분들이라서 믿고 가신 건데요.”

“경매위원회야 그렇다 쳐도 감정사들 쪽에 기둥이 없으니까 곤란하잖아요.”

“마스터 다미에르 이후 최고의 천재라는 제이든 감정사님에다 카이엔의 세 거울까지 모두 모셔다 놓았는데요. 게다가 보조하는 감정사들도 다 실력파고.”

“그래도요!”

사실 이쪽 업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만한 감정단을 꾸리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지만, 일반 수집가 중에는 ‘젊은것들’로만 꾸려진 감정단이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었다.

“소유주 측에선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여태까지 박물관이나 경매, 전시회 등을 다 무사히 통과했으니까. 본인은 큰돈을 내고 구매한 것은 물론 진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고요.”

증빙 서류들이 위조라는 증거를 바로 눈앞에 내놓을 수도 없는 일이니 답답했다.

서류 위조를 증명하려면 박물관과 미술관의 확인, 대질 작업이 필요했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

감정사 중에서도 로시에르 하논 같은 경우는 제이든의 판단에 회의적이었다.

“작품이 위작이라는 분명한 증거도 없고, 증빙 서류의 위조도 당장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제이든 씨도 심증뿐이잖아요? 그렇다면 이런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경매에 그냥 출품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경매위원회 측에서 경매품을 최대한 감정해서 내놓기는 하지만 결국 최종 판단은 낙찰자가 하는 거고 주최 측에서 책임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참여자들이 감정사랑 동반하는 거고.”

맞는 말이긴 했다. 지구의 크리스티 경매나 소더비 경매도 결국 최종 책임은 낙찰자에게 있으며 낙찰 후 작품의 진위 논란이 인다 해도 경매 주최 측에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도 몰랐으면 모를까 2급 감정사가 의심하는 물품을 경매에 내놓을 순 없죠. 노먼 소튼 씨의 항의가 심하기는 하지만 그 부분은 경매위원회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토마스가 말했지만 로시에르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감정사의 소견을 덧붙여서 내놓으면 되죠.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서 입찰할지 안 할지 판단할 텐데.”

“자, 됐어. 물론 그런 방법도 있지만 그래도 찜찜하면 안 내놓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일단 경매위원회의 판단에 맡기고 우린 기분 전환 삼아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오면 어때? 광장이라도 한 바퀴 돌던가.”

엘리노어가 손뼉을 치며 사이에 끼어들자 로시에르도 입을 다물었다.

“좋습니다. 며칠간 감정에 집중하느라 식사도 숙소에서만 하시고 다들 고생하셨으니, 오늘 하루는 자유시간을 갖는 걸로 하죠.”

토마스의 말이 떨어지자 감정사들은 모두 환한 얼굴이 되었다.

다들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이든, 우리랑 같이 밥 먹으러 나갈까?”

“아닙니다요. 오랜만에 만나신 연인 사이에 낄 만큼 제가 그렇게 눈치 없진 않아요.”

피니어스의 말에 손사래를 치는 제이든을 보고 엘리노어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지만 제이든은 숙소 문 앞에서 단호하게 그들과 헤어졌다.

핀을 어깨에 앉히고 레오를 옆에 걷게 하면서 나란히 사라지는 장신의 남녀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좋을 때다.”

-둘 다 제이든보다 나이 많아.

“나도 알아.”

아실리에게 대꾸한 제이든이 마차에 올랐다.

“자, 포이 소원하던 바깥 구경 가자.”

드디어 밖에 나간다는 말에 포이가 좋아서 방방 뛰었다.

“포잇, 포이잇!”

포이는 앞발로 바닥에서 물을 퍼 올려 하늘에 뿌리는 시늉을 하면서 마차에 뛰어올랐다.

“분수 보러 가자는 거지?”

“포잇, 포잇!”

어찌나 열렬히 머리를 끄덕이는지 기다란 귀가 바람개비처럼 흔들렸다.

“사람 많으니까 조심해야 해.”

숙소에서 카이에른 광장까지는 제법 거리가 된다.

수도의 사람들은 역시 지방에 비해서는 옷차림도 화려하고 건물도 높고 다채롭게 꾸며진 것이 보는 맛이 있었다.

“포이이!”

분수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흥분한 포이는 분수 가까이에 마차를 세우자 조그만 가슴이 터지도록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좋아?”

제이든도 웃으면서 분수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눈을 못 뗄 만큼 장관이기는 했다.

높이도 삼 층짜리 건물 정도는 될 만큼 높았고 춤추는 듯 떨어지는 물보라 위에 은은하게 맺힌 무지개 하며……, 밤에는 무지개 대신 마법 등불을 비추어서 일곱 가지 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게 또 볼거리라고 했다.

“포이, 나중에 밤에 와서 또 보고 슬슬 치안국에 가보자. 여기서 멀지 않아.”

-블랑셰 양 만나려고?

“응, 기와 도안 좀 알아봐야지.”

가릉빈가문 수막새에 대해 빨리 알아보고 싶었지만 일이 먼저인지라 몸을 빼지 못했는데, 하루 휴일을 얻은 김에 가볼 참이었다.

“다른 의뢰는 내일부터 보고.”

-수락한 의뢰가 세 개였지?

“응, 경매 동반은 둘, 사전 감정이 셋. 사전 감정을 먼저 해야 경매일에 늦지 않지.”

포이가 분수를 실컷 본 후에야 제이든은 치안국으로 향했다.

“오!. 제이든 씨. 오랜만이오. 여전히 토끼와 고양이 친구와 함께로군.”

“마르틴 경감님, 잘 지내셨지요?”

치안국의 마르틴 경감은 몹시 바빠 보였지만 제이든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카이에른 경매가 얼마 안 남았잖소. 경매를 보려는 수집가들이나 재력가들도 몰리지만 절도범들도 같이 몰리는 시기라서,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에 임하고 있지.”

“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제이든 씨는 블랑셰 양을 만나러 온 걸 테지?”

“맞습니다. 바쁘신데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아니, 아니오. 일전에 도움을 받은 것도 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는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제이든을 데리고 치안국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쪽으로 오시오.”

치안국의 지하실이라면 왠지 감옥이라든지 취조실 같은 게 있을 듯해 죄지은 게 없는데도 계단을 내려가는 다리가 좀 떨렸는데 내려가 보니 환한 복도였다.

복도를 따라 걸어간 마르틴이 문 하나를 열면서 제이든을 불렀다.

“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갑자기 툭 터진 풀밭이 나오는 바람에 제이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포이도 깜짝 놀란 듯 제이든의 어깨에서 깡충 뛰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아실리만 침착하게 제이든의 다리에 몸을 살짝 붙였다.

“고양이는 놀라지 않는군.”

마르틴 경감이 미소하면서 그들을 보았고 아실리는 야옹 울었다.

-사실은 조금 놀랐어. 흠, 이런 거 있다는 말은 들어 봤는데 정말 있었네.

그들의 뒤쪽에는 나지막한 울타리에 나무 문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풀밭이 펼쳐진 가운데 아담한 집이 하나 보였다.

키 작은 나무들이 있는 자그마한 언덕이 집을 감싸듯 서 있고 냇물도 흐르고 있는 아늑한 풍경인데 집이 딱 한 채밖에 없는 게 좀 특이했다.

제이든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치안국의 지하 복도는 어디로 간 거지? 울타리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저 나무 문이 우리가 통과해 나온 문인가? 공간이동 포탈 같은 걸 쓰지도 않았는데.

“이건 포탈과는 좀 다른 겁니다. 공간이동 문이라고나 할까요.”

마르틴 경감이 미소를 지은 채 설명했다.

“이 문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공간이동 문이라니, 이거 포탈보다도 훨씬 편리한 거 아닌가요?”

제이든이 앞뒤를 자꾸 돌아보며 중얼거리자 마르틴이 웃었다.

“아닙니다. 이 문은 포탈처럼 멀리까지 가진 못해요. 물론 미래에는 얼마나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가까운 거리의 특정한 지역에만 설치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치안국의 안가 중 한 곳입니다.”

그는 제이든을 데리고 앞에 보이는 집으로 향했다. 아실리가 살랑살랑 그들 뒤를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제이든 씨.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갈색 곱슬머리에 파란 눈의 소녀가 생글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이에요. 블랑셰 양. 보내주신 시계는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항상 가지고 다니고 있어요.”

블랑셰는 보호 감찰관이라는 중년 여자 한 명과 함께 이곳에서 지낸다고 한다.

감찰관은 낮에 오는 사람과 밤에 오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니까 출퇴근을 하는 모양이지만……, 제이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블랑셰는 그럼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서 감찰관 외에는 아무도 못 만나며 사는 건가?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제이든 씨,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없어요.”

제이든이 안쓰러워하는 걸 눈치챘는지 블랑셰는 명랑하게 웃었다.

“사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텐데 이렇게 편안한 곳에서 보호되고 있는걸요. 감찰관님들도 친절하시고 가끔 밖에 나갈 수도 있어요. 혼자는 안 되지만. 얼마 전엔 앙리 아저씨 면회도 다녀왔어요.”

그녀는 남자애들이 하는 것처럼 주먹으로 제이든의 팔을 툭 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 작업실을 보여드릴게요.”

그녀는 집에서 가장 넓은 방을 침실이 아니라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넓은 탁자 위에 가죽 받침이 깔려 있고 시계 부속이며 톱니바퀴, 마정석 조각 외에도 제이든이 뭔지 알 수 없는 기구며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 쪽에는 책과 자료들이 꽂힌 책장이 있고 선반에는 다양한 시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야, 멋진데요.”

제이든이 작업실을 둘러보며 감탄하자 블랑셰가 눈을 반짝였다.

“이런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셨으니 너무 감사하죠. 마르틴 경감님이 애를 많이 써주셨어요.”

“블랑셰 양도 충분히 반성했고 우리 일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살짝 헛기침을 하면서 말하는 마르틴 경감의 얼굴에 아빠 미소가 어린 것을 보니 블랑셰의 처지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듯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도안을 보러 오셨죠? 제가 잘 챙겨 뒀으니 이쪽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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