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9화
36. 카이에른 경매(4)
“크레투스의 그림치고는 미묘하게 부족한 느낌이 있지?”
피니어스가 물었다.
“예. 그래서 크레투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격이 낮게 잡힌 것 같기도 하고요.”
“미묘하게 부족하긴 한데 진품이 아니라고 하기엔 또 근거가 부족하네. 자료도 충실하고.”
“위작이라면 잘 만든 위작이고, 진작이라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 경우가 가장 감정하기 까다롭다.
감정사들의 안목 감정에서 위작이라는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증빙 자료에 의거해 진작으로 감정할 수밖에 없고, 다만 화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가치가 낮게 평가될 것이다.
제이든은 증빙 자료를 다시금 자세히 읽기 시작했고 피니어스는 혹시라도 뭔가 찾아낼 것이 있는지 돋보기를 들고 그림을 샅샅이 훑었다.
“아?”
한참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중에 제이든이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왜?”
“이름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형님, 혹시 이 사람 아세요?”
제이든이 가리킨 것은 제임스 베인이라는 평범한 이름이었다.
‘안개’의 구매 경로 중 언급되는 여러 사람 중 한 명으로, 눈에 띌 만한 역할은 아니었다.
“미술품 중개상이고 미술연구협회 회원이라, 흠, 내가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체인 걸 보면 잘 알려진 곳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죠? 그런데 제가 이 이름을 어디선가 본 것 같거든요. ”
중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지만 생각이 안 나니까 왠지 찜찜한데?
제이든은 생각에 잠긴 채 자료들을 다시 들춰 보았다.
시온 크레투스는 대륙전쟁 이전 엘데온 출신의 화가인데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전쟁 중에 그려졌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나 폐허가 되어 버린 집터에서 피어나는 꽃 등을 그린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안개’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림으로, 전쟁이 쓸고 간 어느 마을의 새벽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크레투스 사후에 발견된 그림으로,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에 엘데온의 어느 곡물 상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곡물 상인은 예술품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고, ‘안개’를 그가 얻게 된 경로는 확실치 않았으나 가족들이 유품 정리를 하며 불렀던 감정사가 그림에 크레투스의 서명이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크레투스의 알려지지 않은 유작이 발견되었다고 화제가 되었고 당시 미술품 전문가들이 그림을 감정한 결과 진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곡물 상인의 유족은 ‘안개’를 십여 년 정도 소장하고 있다가 엘데온의 미술상에게 판매했고, 미술상은 이 그림을 엘데온 지역의 전시회에 출품했는데 그때 엘데온 박물관이 이 그림을 구매했다.
몇 년 후 엘데온 박물관은 이 그림을 어느 미술상에게 판매했고, 미술상은 다시 개인 수집가에게 판매했다.
몇 년간 ‘안개’를 소장하고 있던 그 수집가가 ‘안개’를 이번 카이에른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손을 꽤 많이 탄 작품이었다.
제임스 베인은 마지막으로 ‘안개’를 소장했던 현 수집가가 엘데온의 미술상에게서 ‘안개’를 구매할 때 중개 역할을 했던 미술품 중개인이었다.
실제로 거래를 주도했던 미술상은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지만, 제임스 베인은 해당 미술상의 직원도 아니고 단지 거래를 도왔던 보조 중개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제이든은 그 이름을 어디에선가 꼭 본 것 같았다.
“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내가 한번 물어보고 올게.”
피니어스는 옆방으로 건너가 다른 경매품 감정 중인 로시에르와 엘리노어에게 제임스 베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왔다.
“다들 처음 듣는다는데?”
아주 평범한 이름이고 활동 반경도 지방에 한하는 모양인데, 왜 자꾸 찜찜한 거지?
좋아, 아무래도 걸어 다니는(네 다리로) 백과사전에게 질문을 해 봐야겠네.
“형님, 저 잠깐 방에 다녀오겠습니다.”
귀한 경매품들을 감정하는 방에 동물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로시에르의 불평 때문에 아실리는 포이와 함께 침실에 있었다.
개인 의뢰라면 그냥 데리고 다닐 텐데 공적 성향이 강하고 여럿이 일하는 것이라 피니어스도 제이든도 순순히 동물들을 방에 두었다.
“포이잇!”
제이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포이가 발딱 일어나서 깡충깡충 뛰어왔다.
다람쥐처럼 뺨이 뾰로통하게 부푼 채 앞발로 밖을 가리킨다.
“미안, 포이야. 카이에른 구경하고 싶지? 일이 좀 바빠서, 일 먼저 하고 나서 바깥 구경하러 가자.”
-분수 보고 싶다고 난리야. 어려서 그런지 아주 힘이 넘쳐.
레오의 폭신한 털을 베고 누워 있던 아실리가 느릿하게 야우웅 울었고 창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핀이 제이든에게 건성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인사를 했다.
“다들 한 방에 모여서 쉬고 있었구나?”
감정할 때 항상 아실리를 옆에 두다가 따로 떼어 놓으니까 좀 서운했는데, 의외로 아실리는 편하게 누워 쉬는 중인가 보다.
포이만 밖에 나가고 싶어서 깡충거리고.
“포이 조금만 참아. 일 끝나면 밖에 가서 맛있는 거 사 줄게.”
-제이든. 카이에른에 르 미엘이라는 과자점이 그렇게 맛있는 과자를 판대.
아실리가 누운 채로 앞발을 들어 올려 핥았다.
-옛날에 세시온이랑 카이에른 왔을 때는 없었던 집인데, 요즘 대세인가 봐.
기억력도 좋다. 제이든은 아실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법사 테오도르가 거울 이송 때문에 레이크빌에 왔을 때 플로렌스 부인의 쿠키를 먹어 보고 르 미엘 못지않다고 칭찬한 적이 있는데 우리 미식가 고양이가 그걸 또 기억해 뒀네.
-일은 잘돼 가? 우리 제이든, 나 없어서 분리불안 느끼는 거 아니야?
“분리불안은 무슨! 그치만 너 없어서 좀 허전하긴 해. 실리, 나 물어볼 게 있어. 제임스 베인이라는 사람인데.”
제이든은 네 발 달린 백과사전-아실리-에게 크레투스의 ‘안개’와 제임스 베인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실리는 기억 속을 검색하는지 진지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면서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제임스 베인, 제임스 베인…….
초록 눈을 가늘게 뜬 채 작은 소리로 가르릉거리고 있던 아실리가 드디어 머리를 들었다.
-칠 년쯤 전에, 슈라이베른의 수도원에서 발견한 루시안의 그림을 전시, 판매했던 단체가 있었는데, 그때 자문위원 중에 무슨 미술협회의 제임스 베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그 그림도 진작 논란이 좀 있었는데 증빙 자료가 확실해서 진품으로 판매되었을걸?
제이든이 손뼉을 딱 쳤다.
그래, 감정 공부할 때 읽은 자료들 중 루시안의 그림 발견 이야기가 있었지. 그때 내가 그 이름을 봤구나.
그런데 슈라이베른이라니, 엘데온과 슈라이베른은 거리가 상당한데.
“고마워, 실리. 역시 우리 실리가 최고야!”
아래층으로 돌아온 제이든은 좀 전에 봤던 증빙 자료를 주섬주섬 뒤져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제이든, 뭔가 짚이는 게 있어?”
피니어스가 물었지만 제이든은 듣지 못하는 것처럼 집중해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럼 그렇지!”
그는 피니어스에게 자신이 보고 있던 자료를 내밀었다.
“형님, 이것 좀 보세요.”
엘데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이었다.
“응? 특별히 이상한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내용 말고, 종이와 잉크를 보세요.”
엘데온 박물관의 기록보관소에서 사용하는 종이로 직인이 찍혀 있고 ‘안개’가 박물관에 들어온 날짜와 경로, 진품으로 감정된 기록, 미술상에게 판매된 날짜 및 경로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엘데온 박물관의 전용 종이인 건 맞는데, ‘안개’의 입수 시기에 사용된 종이와 조금 달라요.”
“그러고 보니, 엘데온에서 12년쯤 전에 기록 체계를 개선하면서 사용하는 문서 형식도 바꿨지?”
“예. 이 기록물은 바뀐 형식에 맞게 기록되어 있지만 종이가 바뀌기 전 종이예요.”
“이거, 증빙 서류를 위조한 거 아냐?”
“이런 박물관 전용 종이는 유출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관리할 텐데. 아무튼 엘데온에 매를 보내 봐야 할 듯해요.”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일단 크레투스의 ‘안개’를 확인 요망 작품으로 제쳐 놓고 다른 작품 감정으로 넘어갔다.
둘이 검토해야 할 작품 세 점 중 도자기는 진품이었다. 하지만 또 한 점의 그림 역시 크레투스의 ‘안개’ 소장자가 내놓은 작품으로 역시 ‘안개’처럼 증빙 서류 쪽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이 두 점의 작품은 카이에른 경매에서 빠지고 문관국에서 수사에 나서게 되었다.
시간을 좀 빠르게 돌려 본다면, 제임스 베인이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카이에른 경매가 끝나고 나서도 한 달쯤 지난 후였다.
제임스 베인을 조사하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고구마 줄기를 캐는 것처럼 그의 미술품 사기 행각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그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암약해 온 미술품 위조 및 사기단이 체포되면서 카이엔의 예술품 출처 및 증빙 서류 체계를 바꾸고 보안을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제임스 베인은 물론 본명이 아니었고, 그는 본래 슈라이베른 변경 지역의 작은 미술관 직원이었다. 그는 작품의 출처 자료들(Provenance)이 진위 판단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인은 우연히 솜씨가 우수한 모작 화가를 한 명 알게 된 이후 위작 판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장들의 작품을 위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훌륭한 위작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감정사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문서 자료들을 위조하면 어떨까, 작품을 위조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쉽고 감정사들의 눈을 피하기도 쉽지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슈라이베른에는 ‘예술연구소’라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영지 전역의 예술품 및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는 기록보관소가 있고 이 기록보관소의 기록들은 작품의 진위를 판별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인은 예술연구소의 행정직원으로 취직하여 성실히 일함으로써 신망을 얻은 후 남몰래 기록보관소의 기록문서를 빼냈다.
보관소의 공식 종이와 보관소의 잉크와 펜을 사용해 문서를 위조하고 직인도 진짜를 찍었으니 문서가 위조된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다.
위조 문서를 기록보관소에 끼워 넣고 갖고 있는 위작을 진작으로 둔갑시켜 판매를 시도했을 때, 구매자는 기록보관소의 기록을 확인하고 작품이 진작이라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한 번 성공한 이후 그는 자신감이 붙었다. 갖고 있는 위작들에 대한 증빙 문서를 만들어 기록보관소에 넣는 형태로 위작의 증빙 자료를 만들었다.
그 후 위조 기술도 점점 더 발전해서 작품 거래 내역 자료를 허위로 만들고, 출처 증명서류를 위조해 가며 수년간 숱한 위작을 팔아넘겼다.
그는 대체로 저명한 작가들의 평작 작품들을 대상으로 위작을 만들고, 거래 과정에서 작품을 바꿔치기도 했다. 서류가 분명하므로 사람들은 작품의 질이 좀 떨어진다 해도 그 진위까지 의심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았다.
카이에른이나 셀레스테처럼 큰 경매나 규모 큰 미술관 등에서는 아무래도 의심을 살 확률이 높으므로 그는 지방의 미술상이나 작은 미술관, 작은 경매 등을 목표로 했다.
일단 한 번 미술관이나 경매를 통과한 작품은 증빙 서류가 붙게 되고 사람들이 그 진위를 의심하지 않는 맹점을 노린 것이다.
“그럼 ‘안개’도 베인이 바꿔친 건가요?”
“그렇다는군. 한동안 엘데온 박물관에 직원으로 취직해 있으면서 위조 서류를 만들어 놓고 작품 거래를 보조하면서 바꿔친 모양이야.”
“미리 박물관 전용 종이를 빼돌렸는데 그 후에 형식이 바뀌었나 보지요?”
“그런데 ‘안개’의 경우 진짜 증빙 서류를 빼내기는 어려워서 가짜 서류를 만들었다지만 더 놀라운 것도 있다니까.”
베인은 진짜 증빙 서류가 잘 갖춰진 진품 그림도 사들였는데, 그 후 위작을 만들어서 진짜 증빙 서류는 위작에 붙여 팔고 진작은 서류 없이 파는 방법도 사용했다.
“허! 진작은 서류가 없어도 감정사들이 진품으로 감정해 줄 걸 믿고 그냥 팔고, 진품에 붙었던 서류는 가짜에 붙여서 팔고……, 같은 걸 두 번 판다는 말이군요.”
천잰데?
#작가의 말
작중 제임스 베인은 실제 영국의 위조범 존 드류(John Drewe)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존 드류는 실제로 미술관에 취직해 증빙 서류를 빼돌리거나 위조해 위작에 첨부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진품은 서류 없이 팔고 위작은 진짜 서류를 붙여 이중으로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1999년 드류가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미술관들은 총체적으로 보안체계를 강화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