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28화 (128/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8화

36. 카이에른 경매(3)

제이든의 어깨 위에서 발돋움을 하며 일어선 포이의 깜장 귀가 뾰족 섰다.

“포이야, 떨어질라.”

제이든이 주의를 주었지만 포이는 잘 들리지 않는지 바깥 풍경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다.

사람처럼 탄성을 내뱉을 수 있었다면 우와! 소리를 내며 감탄했을 것이다.

하얗고 커다란 벽에 군데군데 녹색 돌이 박혀 있는 성벽에 난 커다란 아치형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니 포이가 난생처음 보는 크고 번화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땅에서 하늘로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줄기 위에 은은하게 무지개가 걸려 있다.

아스토시엔 산에 있는 조그만 폭포보다도 훨씬 큰 물줄기가 땅에서 하늘로 거꾸로 솟아오르고 있어서 포이의 눈이 더 커졌다.

“삐, 삐이!”

포이가 앞발로 거꾸로 흐르는 폭포를 가리키며 아실리에게 삐삐거리자 제이든의 옆에 침착하게 앉아 있던 아실리가 상냥하게 야옹거렸다.

-응, 저건 분수야, 카이에른 광장의 명물이지. 포이처럼 카이에른에 처음 오는 아가들은 다 저걸 보고 놀란단다.

아실리의 말처럼 제이든의 앞에서 성문을 통과한 마차의 짐칸에서는 아이들 두 명이 거의 마차에서 떨어질 것처럼 몸을 내밀고 팔짝팔짝 뛰면서 분수를 향해 손짓, 발짓을 하는 중이었다.

아실리는 그윽한 눈으로 분수 쪽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오니까 카이에른도 많이 변했지만 저 분수는 그대로네.

“삐이잉.”

포이가 호오 숨을 내쉬면서 통통한 가슴에 앞발을 가져다 댔다가 금방 다시 또 흥분해서 제이든의 머리를 끌어안고 분홍색 코를 발름거렸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여러 마리의 말이 끄는 큰 마차, 처음 보는 높은 건물들, 빛나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기사, 여기저기의 가게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 포이의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제이든의 토끼는 언제 봐도 꼭 사람 어린애 같단 말이야. 포이, 신기한 게 많지?”

마차 옆에서 말을 탄 채 걷던 피니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레오도 강아지 때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난리난리, 장난 아니었어. 모든 게 다 신기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잡을 수도 없었다니까. 저 분수에 뛰어들어서 빠지는 바람에 내가 겨우 건져 왔지.”

피니어스는 마차 안에 드러누워 있는 레오를 보며 눈꼴 시다는 듯 말했다.

“지금은 많이 봐서 다 안다 이거지? 게으름뱅이 멍멍이 같으니.”

“왕!”

“레오는 카이에른에 많이 와 봤나 봐요?”

“그럼. 핀도 레오도 여러 번 와 봤지.”

“왕!”

핀은 피니어스의 여자 친구에게 돌아가고 없었지만, 레오가 피니어스의 말이 맞다는 듯 자랑스럽게 짖었다.

마부석에 앉은 아실리가 약간 가소롭다는 눈으로 레오를 내려다보고 다시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제이든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실리의 새침한 얼굴에서 ‘저 댕댕이가 수도에 와 봤으면 몇 번이나 와 봤다고 저러나’ 싶은 표정이 읽혔던 것이다.

너랑은 비교할 수 없지, 아실리. 레오랑 너는 살아온 세월이 다른데.

광장을 가로질러 거리로 들어섰지만 포이는 여전히 신기한 눈으로 이쪽저쪽을 둘러보았다.

아스토시엔 촌토끼가 수도에 처음 와 보니 놀라운 게 많지? 건물도 높고.

서울에 한번 데려가서 자동차나 고층 건물들을 보여주면 얼마나 신기해하고 놀랄까.

아니, 공기도 나쁘고 시끄러워서 싫다고 숨어 버리려나?

카이에른 경매장은 평소에 미술품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는 5층 건물로 카이엔 기준으로는 매우 고층이며 현대적으로 건축된 건물이었다.

주최위원회 측에서 마련해 준 숙소는 경매장 건물 바로 옆에 붙은 2층짜리 별관이었다는데, 비둘기 편으로 도착 시간을 미리 알려 두었기 때문에 안내해 줄 사람이 미리 나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제이든 씨, 피니어스 씨, 오랜만입니다.”

숙소 앞에 마중 나와 있던 감정사는 올리버 로렌스의 제자인 3급 감정사 토마스 크레이튼으로 제이든과 피니어스와는 안면이 있었다.

그는 올리버 로렌스와 함께 매해 카이에른 경매품의 감정을 담당하고 초빙된 감정사들의 안내도 맡고 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나오시면 이번에 함께 일해주실 분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아직 한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지만.”

아래층에 회의실 비슷하게 꾸며진 공간이 있었고 탁자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둘 다 이미 구면이었다.

“오, 로시에르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논 공자.”

소네트 경매 때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로시에르 하논이 그들을 보고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피니어스 선배.”

로시에르 하논은 피니어스에게는 제법 깍듯하게 인사를 했지만 제이든에게는 대충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앉아 있던 둥글둥글한 중년 남자가 제이든을 향해 환한 웃음을 보였다.

“우리도 구면이죠? 오랜만입니다. 로스 감정사님.”

레이크빌에서 저주 걸린 거울의 이송을 맡았던 마법사 테오도르였다.

“그때 거울 이송을 맡았던 게 계기가 되어 문관국 마법유물부의 일을 보게 되었거든요. 이번 경매 담당 마법사로 일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아실리와 포이를 향해서도 포동포동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전히 함께 다니는군요. 토끼가 꽤 많이 컸어요.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정말 조막만 한 아기 토끼였는데.”

테오도르가 아실리와 포이에게 아는 척을 하자 로시에르가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고양이와 토끼라니, 일에 방해되지 않게 잘 간수해 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명색이 감정사의 반려동물인데요. 방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이든이 대꾸하자 피니어스가 싱긋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방해된다면 우리 레오가 방해가 되겠지. 제이든네 고양이랑 토끼는 정말 영리하고 점잖던걸. 어때, 제이든, 나랑 바꾸지 않겠어? 레오를 줄 테니 아실리를 내게…….”

“와루룽!”

레오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다리로 일어서서 피니어스의 허리춤을 앞발로 때렸다.

“자, 방금 마지막 감정사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피니어스가 레오와 다투면서 킬킬거리고 있을 때 토마스 크레이튼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고 그 뒤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화려한 금발에 흰 피부, 동부 사람 특유의 섬세한 이목구비와 초록 눈을 지닌 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에는 낯익은 매가 앉아 있었다.

“엘리노어! 어서 와.”

피니어스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껴안았고 레오가 껑충거리면서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토마스가 흐뭇하게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걸로 카이엔의 세 거울에다 떠오르는 거울까지 모두 모였네요.”

* * *

“그 유명한 엘리노어 유스틴 양이 형님 여자 친구인 줄은 몰랐네요.”

제이든이 웃자 피니어스가 머쓱하게 콧등을 긁었다.

“뭐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긴데 굳이 자랑하기는 쑥스러워서.”

“그런 것 치고는 여자 친구 자랑을 솔찬히 하셨잖아요? 이름만 밝히지 않았다 뿐이지.”

제이든이 입을 삐죽거리자 엘리노어가 맑은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저도 제이든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반가워요.”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풍성한 금발을 흔들며 웃는 걸 보니 레오랑 좀 비슷하기도 했다.

서로 닮은 동물을 바꾸어 선물했었군.

제이든과 피니어스, 엘리노어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로시에르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명망 있는 3급 감정사가 네 명이나 있는데 굳이 제이든 로스까지 불렀어야 하는지 원.”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토마스가 대답했다.

“카이에른 경매에는 꼭 2급 감정사가 한 명 참여하게 돼 있는 걸 아시잖습니까?”

“저 사람은 2급이긴 해도 경험은 별로 없잖소? 항상 올리버 로렌스 감정사가 진행했을 텐데.”

“이번에 로렌스 선생님이 다른 일로 지방에 가시면서 제이든 씨를 적극 추천하셨습니다.”

로시에르 하논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먼저 쉰다고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카이에른 경매는 경매일 직전에도 물품을 등록할 수 있는 소네트와는 달라서 경매 일주일 전까지 모든 경매품의 등록 및 감정을 끝내고 도록을 제작한다.

경매일까지 현재 보름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으므로 제이든 일행은 바로 다음 날부터 감정을 시작했다.

토마스의 지휘 아래 일반 감정사들이 이미 1차 감정을 끝내 놓은 상태였고, 추가 감정이 필요한 물품들만 제이든 일행이 확인하면 되었다.

그중 올리버 로렌스가 따로 서신에 명시했던 세 점의 경매품은 제이든과 피니어스가 특별 감정을 맡았다.

“이 그림은 시온 크레투스의 ‘안개’인데 엘데온 박물관의 소장품이었고. 어떻게 생각해, 제이든?”

제이든은 그림에 첨부된 감정서와 박물관의 서류를 보면서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예술품의 경우 흔히 ‘안목 감정’이라 부르는 감정사의 육안 평가 외에 자료 검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의 출처라든지 소장 과정과 거래 경로 등의 자료가 중요한 감정 근거가 된다.

지구에서도 작품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 작가의 검증된 작품 전작 도록 및 상세 기록 모음)와 비슷한 것이 카이엔에도 있었다.

이런 카탈로그 레조네나 출처, 박물관의 전시 기록이나 경매 기록 등이 잘 갖춰진 작품도 있고 자료가 없는 작품도 있는데, 당연히 자료가 잘 갖춰진 쪽이 감정하기 쉽다.

올리버 로렌스가 따로 부탁한 세 점의 경매품 중 두 점은 그림이고 한 점은 도자기였는데 세 점 다 이런 증빙 자료가 잘 갖춰져 있었다.

“소장 경로 기록이나 감정서가 이 정도로 충실하면 진품이 확실할 텐데 왜 재감정을 원했을까?”

피니어스는 엘데온 박물관의 감정사가 크레투스의 ‘안개’에 첨부한 감정서를 제이든에게 넘겨준 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때요?”

제이든이 묻자 한참 만에 고개를 든 피니어스가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었다.

“좀 미묘한데?”

“그렇죠?”

제이든도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에 빠졌다.

사용한 재료, 연대, 기법 등은 모두 크레투스의 다른 그림들과 일치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이 그림에서 진품 명화가 발하는 푸른 아우라를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증빙 자료가 없었다면 위작이라고 감정할 수도 있겠는데 증빙 자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크레투스의 실패작인 걸까?

화가도 사람이니만큼 거장이라 해도 범작이 있을 수 있다. 슬럼프도 있을 수 있고.

자존심이 있는 화가들이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폐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화가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는 자기 자신을 위조한 일이 있다.

‘형이상학적 풍경’의 대가로 불리는 그의 전성기는 1909~1919년 사이였다. 그 후 그의 그림은 전만 못했고 이전 그림들만큼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는 1935~1940년경 그린 작품들에 20여 년 전의 연도와 당시 쓰던 사인을 해서 자신의 전성기에 그린 그림으로 꾸며 판매한 일이 있었다.

크레투스의 ‘안개’도 크레투스의 진품이기는 하지만 그의 명작들에 비해서는 범작이다 보니 올리버 로렌스처럼 예리한 감정사의 의심을 산 걸까? 그래서 아우라도 뜨지 않는 것이려나.

제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다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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