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7화
36. 카이에른 경매(2)
-괜찮아? 제이든?
“안 괜찮아. 우욱.”
“피이잉.”
제이든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형태만 갖춘 조그만 역사를 빠져나왔다.
포이가 어지러운지 제이든의 어깨에 매달리다가 가슴 쪽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는 걸 겨우 받았다.
-저기 좀 앉자.
아실리가 역 출입구에 있는 낡은 벤치를 발견하고 먼저 뛰어갔고 제이든도 포이를 안은 채 따라가서 주저앉았다.
포이가 그의 가슴에서 무릎으로 흘러 내려와서 끼이잉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
-물 좀 마셔, 포이도 물 좀 주고.
“어우, 역시 하루에 장기 이동 포탈 두 번은 너무 힘들어. 델리움에서 바로 환승하지 말고 하루 쉬었다가 내일 출발할걸. 하루 이틀 빨리 가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제이든이 끙끙거리며 배낭에서 물병과 컵을 꺼냈다.
컵에 따른 물을 포이에게 주자 포이가 조금 핥아 먹고는 사람처럼 큰숨을 내쉬었고 아실리가 앞발로 포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물병째로 물을 마신 제이든도 심호흡을 하고 숨을 돌렸다.
“포이 좀 괜찮아? 난 토끼도 포탈 멀미를 하는 줄은 몰랐어.”
“포이잉.”
제이든의 무릎에 엎드린 포이를 토닥거리며 아실리가 야옹 울었다.
-강아지나 고양이도 멀미를 해. 아까 스노우타운 포탈이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이동감이 안 좋았어. 델리움에서 그냥 쉬자고 할걸.
“그래도 델리움 공용 포탈이 신설된 거라 긴급 하차가 가능해서 다행이야. 아후, 이대로 레이든까지 두 시간을 더 갔으면…….”
제이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 공간이동 포탈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도착지까지 갈 수밖에 없는 거였는데, 재작년엔가 마탑에서 긴급 하차가 가능한 기술을 개발했다고 했다.
아직 시범적으로 운영 중이라 설치된 공간이동 포탈이 몇 군데 되지 않는데 용케 델리움 시의 공용 포탈에 긴급하차 장치가 있었다.
긴급하차 장치를 작동시키면 미리 정해진 포인트 몇 군데 중 그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포인트에 하차되는데, 제이든 일행이 떨어진 곳은 관리하는 직원도 없는 낡고 작은 역사였다.
델리움 시와 레이든 시의 중간 어딘가일 테지만, 예전에 간이역으로 사용된 곳인 듯한데 지금은 쓰지 않는 곳으로 보였다.
역의 출입구에는 ‘코노르빌 역’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고 마을을 향하는 이정표도 서 있었다.
“실리, 여기 알아?”
-아니, 나도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이동감이 몹시 안 좋은 포탈을 세 시간이나 타고 델리움에 도착했는데 점심 먹고 바로 또 공간이동 포탈을 타고 레이든으로 출발한 것이 무리였다.
델리움의 포탈은 이동감은 괜찮았지만 역시 장시간 이동이어서, 아실리만 괜찮고 제이든과 포이는 둘 다 멀미를 하느라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질린 채 견디다가 결국 긴급하차 장치에 연결된 줄을 당기고 말았다.
“전에 포탈을 이용했을 때 포이가 아무렇지도 않아서 걱정을 안 했는데 다 이동감이 좋은 포탈이어서 그랬나 봐.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마을을 찾아서 숙소부터 잡자.”
벤치에서 한참 쉰 뒤에야 겨우 일어선 제이든은 터덜터덜 역 앞의 이정표를 따라 마을 쪽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있는 간이역이었고 길에 풀이 자라 있기는 했어도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남아 있으니 길을 따라가면 곧 마을이 나오겠지 싶었다.
“삐이익!”
길이 점점 넓어지는 걸 보니 곧 마을이 나오겠다 싶어 걸음을 빨리하는데 하늘에서 피리 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삐이이익!”
하늘 높이 날고 있던 푸른 매 한 마리가 낮게 내려오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어라? 저 매 핀 아니야?”
매가 한 바퀴 선회하면서 날아내려 오더니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았다.
“정말 핀이네. 핀, 어디 가는 길이야? 날 알아보고 내려온 거야?”
제이든이 반가워서 손을 흔들자 핀도 반갑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핀이 우리 알아본 거 맞네. 피니어스 씨가 이 근처에 있나 봐.
아실리가 말했고 제이든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이 있는 기척은 없었다.
-그렇게 가까운 데 말고, 아마 마을쯤에 있으려나?
“삐익!”
먼저 간다는 듯이 날개를 퍼덕여 보인 핀이 길 아래쪽으로 날아갔다.
“코노르빌로 가나 본데? 우리도 어서 가보자.”
점점 넓어지는 길을 따라가니 의외로 규모가 큰 마을이 나왔다.
마을 초입부터 여관이며 식당이 여러 곳 보여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삐이익, 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법 잘 꾸며진 삼 층 건물의 창문에서 푸른 매가 글라이더처럼 날개를 편 채 제이든을 향해 날아내려 와서 머리 위를 맴돌았다.
“핀, 어디 가는 거야? 오! 제이든 아니야? 어이, 제이든!”
창문으로 불쑥 나왔던 남자의 얼굴이 도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일 층 입구에서 남빛 머리칼의 남자와 금빛 털의 개가 우당탕탕 뛰어나왔다.
“피니어스 씨! 레오!”
“이야! 제이든! 이런 데서 만나다니!”
“우왕! 왕! 왕!”
“레오, 좀 떨어져!”
“포잇, 포잇!”
잠시 요란스러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제이든 일행은 피니어스가 묵고 있는 방에 함께 앉았다.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요. 피니어스 씨.”
“응, 큰 도시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마을까지 왔지?”
“실은 카이에른 가는 길이었는데, 원래는 레이든 시에서 포탈을 환승하려고 했는데 멀미 때문에 긴급하차를 했더니 여기 떨어졌어요.”
“아하, 긴급하차 장치가 생겼다고 말로만 들었지 써 본 적은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였군.”
“웬만하면 참고 가려고 했는데 죽겠더라고요. 포이도 멀미를 심하게 하고요. 피니어스 씨는 공간이동 멀미를 한 적 없으세요?”
“아, 나는 없는데 레오가 멀미를 한 적이 있어. 그때는 긴급하차 같은 게 없을 때라서 아주 고생했지.”
바닥의 양탄자 위에 아실리와 포이를 양쪽에 끼고 누워 있던 레오가 우루룽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레오, 너 흉보는 것도 아닌데 뭔 우루룽이야. 아무튼 레오가 공간이동 포탈을 싫어해서 난 웬만하면 포탈을 안 써. 여행은 역시 말 타고 다니는 게 제맛이지.”
“제피로스를 타고 오셨겠지요?”
“응, 마구간에 있지.”
피니어스도 카이에른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제이든도 회중시계를 받았지?”
피니어스는 블랑셰에게 받은 회중시계를 보여주었다.
제이든이 받은 것과 거의 비슷한 시계였지만 디자인이 조금 달랐고 시계 뚜껑에 매와 개가 새겨져 있었다.
“근사한데요.”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 시계니까 제이든 것도 잘 간수해. 내가 볼 때 이 아가씨는 분명히 할아버지 못지않은 명인이 될 거야.”
피니어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레이든에 갈 예정인데, 제이든은 어떻게 할 건가? 레이든에서 공간이동 포탈을 다시 사용할 거야?”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는데 피니어스 씨를 만났으니…….”
제이든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레오와 아실리, 포이를 바라보았다.
“애들도 다시 만나서 저렇게 좋아하고, 멀미도 지긋지긋하니 마차를 빌릴까 봐요.”
“나야 좋지. 제이든이랑 동행하면 심심하지도 않고. 여기서 마차로 가면 보름 정도 걸릴 테니 경매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
“피니어스 씨도 경매 때문에 가시는 거죠?”
“경매도 있고, 다른 의뢰도 있고, 2급 감정사 시험도 준비하고, 여자 친구도 만나야지. 그런데 제이든, 계속 피니어스 씨라고 부를 건가? 그냥 형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호칭을 바꿔 달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바람에 제이든은 피니어스를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게 영어권에서는 형이라는 호칭이 없을 텐데, 카이엔에서는 자연스럽단 말이지. 예전에 미누엘을 봐도 그렇고. 사실 언어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통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호칭을 정한 제이든이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피니어스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 * *
여관에서 하룻밤 푹 자고 나니 멀미 때문에 울렁거리던 속도 다 가라앉고 포이도 다시 활발해졌기에 제이든 일행은 피니어스와 함께 레이든 시로 출발했다.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옐로우 코우치답게 코노르빌에도 대리점이 있어서 적당한 마차를 한 대 빌렸다.
마차를 빌리자 제일 좋아하는 것은 레오였다.
냉큼 뛰어올라 마차 좌석에 늘어지는 레오를 보고 피니어스가 혀를 찼다.
“저 녀석 좀 봐라. 마차 타고 가는 게 저렇게 좋은가. 저렇게 걷기 싫어하는 개는 처음 봤다니까.”
레오가 못 들은 척 커다란 귀를 아래로 내리는 게 마치 귀를 막는 것처럼 보여 우스웠다.
“놔두세요. 필요할 때는 잘 달리던데요. 뭐.”
마부석의 제이든은 웃으면서 말을 몰았다.
“공간이동 포탈이 빠르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역시 바람도 쐬고 바깥 풍경도 보면서 가는 길이 좋네요.”
아직 쌀쌀하기는 해도 날씨도 좋고, 포이도 마차 여행을 훨씬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레이든 시에 도착한 후 우편국을 들른 제이든과 피니어스는 각자 사서함을 확인했는데 둘에게 같은 의뢰가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이에른 경매 주최위원회장인 슈나이더 백작 이름으로 왔는데요?”
“음, 같은 서신이네.”
카이에른 경매에 출품을 신청한 골동품 중 위작이 의심되는 것이 몇 점 있어 정밀 감정을 했는데 그중 세 점의 진위가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런데 증빙서류가 너무 완벽해서 진품이 아니라는 근거를 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제이든 로스와 피니어스 렌의 교차 검증을 원한다는 서신이었다.
제이든의 서신에는 올리버 로렌스의 서신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제이든, 원래는 내가 맡았어야 하는 일이다만 내가 꼭 봐야 할 유물이 있어 남부에 와 있다. 이번 카이에른 경매에는 날짜를 맞출 수 없겠구나. 그래서 너와 피니어스 렌을 추천했으니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살려 감정에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란다.
“흠. 이 선생님이 또 뭔가에 꽂히셨네.”
제이든은 서신을 돌돌 말아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생각했다.
애당초 감정사란 한 군데 오래 머물지 않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올리버 로렌스는 카이에른 경매 주최위원 중의 한 명이라 카이에른 경매 때는 대개 수도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번엔 남부에 있다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꽂힌 유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올리버 로렌스는 거의 1급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노련한 2급 감정사라서 그가 없는 자리가 크기는 하겠지만, 그가 없더라도 실력 있는 3급 감정사들이 경매 물품을 감정했을 텐데.
그런데 굳이 제이든과 피니어스에게 교차 검증까지 의뢰한다는 건 그만큼 감정하기 까다로운 물품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물품인지 궁금하네요.”
제이든의 말에 피니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물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두 감정사는 길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예정보다 조금 빠른 3월 중순, 흰색과 녹색의 돌이 섞인 카이에른의 성벽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성벽을 처음 보는 포이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앞발로 제이든의 목을 끌어안았다.
“포이잇!”
“그래, 멋지지?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