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26화 (12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6화

36. 카이에른 경매(1)

“아휴, 의뢰가 자꾸 들어오네.”

작성한 답신을 의뢰인들에게 보내려고 우편국에 왔던 제이든은 새로 온 의뢰서 한 뭉치를 들고 나왔다.

더 이상 의뢰를 안 받을 생각이기는 했지만 새로운 의뢰 중 또 흥미로운 것이 있을까 싶어 읽어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집에 가서 잘 읽어 봐야지 생각하면서 빵집에 가서 빵을 샀다.

플로렌스 부인이 특별히 아실리와 포이를 위해 만들어 주는 계란과자와 당근과자까지 산 뒤 채소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어라, 저 아저씨가 계시네.”

채소가게에 딕 노인이 있는 것을 본 제이든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지만 딕 노인이 그를 발견한 것이 더 빨랐다.

“제이, 제이! 나 좀 보게!”

제이든을 부르며 뛰어온 딕 노인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날쌔기도 하시지, 아직도 정정하시네.

“채소 사러 오던 길 아니여? 어딜 또 가려고.”

“아하하, 아니, 다른 일 볼 게 생각나서요.”

“그러지 말고 잠깐만 이리 와 봐.”

제이든은 난처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저씨, 저는 사람 마음 같은 건 못 봐요.”

“나도 알아, 사람 마음속을 누가 들여다보겠는가. 그치만 자네는 눈썰미가 좋잖아. 그 머시여, 관찰력도 좋지만 직감이 좋다고 제프 영감도 플로렌스도 칭찬하던데. 그냥 한번 눈치나 봐줘, 응?”

“하아, 이거 참.”

한숨을 쉬며 채소가게로 끌려 들어간 제이든은 메리앤 부인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서 와요. 제이. 야옹이랑 토끼도 안녕.”

“냐앙.”

“포잇!”

메리앤은 곱게 늙은 육십 대의 부인으로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이거 보리 싹이다. 좀 이른데 벌써 싹이 났길래 제이네 야옹이 생각이 나서 조금 갖다 놨어. 야옹이 이거 좋아하지?”

“냐아옹.”

아실리가 눈을 휘면서 웃자 메리앤은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건초 봉지를 꺼냈다.

“이건 티모시 건초야. 레이크빌 갔을 때 보고 제이네 토끼 생각이 나서 조금 사 왔지.”

“포잇!”

포이가 기뻐서 귀를 쫑긋 세우며 코를 발름거렸다.

새싹은 사람도 잘 먹는 것이라 채소가게에 원래부터 갖춰 놓지만 알팔파나 티모시 등의 건초는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이든이 포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하자 빵집 플로렌스 부인도 그렇고 채소가게 메리앤 부인도 제이든이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오면 줄만 한 것을 준비해 놓곤 했다.

“메리앤이 이렇게 마음씨가 곱다니까. 옛날부터 그랬는데 하나도 안 변했어.”

딕 노인이 제이든을 보며 눈을 꿈쩍거렸지만 제이든은 난처해서 외면을 했다.

메리앤 부인은 누구에게나 상냥한데 딕 노인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난감해하는 제이든을 본 딕 노인이 갑자기 당근과 감자, 무 등을 집어 들더니 바구니에 담았다.

“이거 가져가게. 자네도 알겠지만 메리앤네 채소가 싱싱해.”

“예? 괜찮습니다. 아저씨,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곧 또 출장을 떠날 건데.”

딕 노인은 손사래를 치는 제이든에게 바구니를 쥐여 주며 속삭였다.

“제프가 그러는데 자네 같은 사람한테 일을 부탁하려면 의뢰비를 줘야 한다면서? 이거 내 의뢰비니까 사양하지 말게. 자, 받은 거야, 그렇지?”

“예? 예…….”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바구니를 받아드는 제이든과 딕 노인을 보면서 메리앤이 웃었다.

“무슨 일인데 젊은 친구랑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그래요? 제이, 딕이 뭐 곤란하게 하는 거예요?”

“아니, 별일 아닙…….”

메리앤을 쳐다보던 제이든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 그래요, 제이?”

제이든이 메리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고 아실리도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듯 제이든을 올려다보며 야옹 울었다.

“포잉?”

뒤늦게 포이도 그의 어깨 위에서 몸을 굽혀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제이든의 얼굴을 보려다가 떨어질 뻔한 포이를 붙잡으면서 제이든이 더듬거렸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깐 딴생각을 해서…….”

새싹과 건초 외에 딕 노인이 사준 채소를 건성으로 봉지에 넣고 가게를 나오자 딕 노인이 따라 나왔다.

“어때? 어떤 거 같나?”

“아저씨.”

“엉?”

“두 분이 원래 친하시죠?”

“엉. 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까. 메리앤도 그렇지만 죽은 메리앤 바깥사람이나 제프, 제프 마누라 모두 다 옛날부터 친구였지.”

제이든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저씨, 메리앤 아주머니가 아저씨한테 따로 호감이 있는지까지는 몰라도 친근감을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친구라서 그런지 좋은 감정을 갖고 계시나 봐요.”

“엉, 그래? 제이가 보기에도 그렇지?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게 맞다니까. 고마워.”

꼭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딕 노인은 신이 나서 제이든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채소가게 쪽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야? 제이든?

딕 노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실 리가 물었다.

-제이든이 빈말은 안 하는 성격인데, 그냥 딕 영감님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긴 아닐 거 아냐?

“응.”

제이든은 채소가게 쪽을 보고 섰다가 아실리에게 말했다.

“잠깐 다른 데 좀 둘러보고 집에 가자.”

-마을에서 볼일은 다 봤는데 어디 가려고?

“그냥, 다른 사람들을 좀 봐야겠어.”

제이든은 다시 마을을 빙 돌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았다. 우편국, 빵집, 청과물 상회,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왜 그러는데?

“실은 말이야.”

딕 노인의 등쌀에 메리앤을 보는데 갑자기 메리앤의 몸에서 옅은 분홍색 아우라가 퍼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 가게에 들어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안개처럼 그녀의 몸을 감싼 분홍색 아우라는 딕 노인을 향할 때 조금 더 짙어지고, 제이든을 향할 때 조금 옅어지고 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 분홍색 안개에서 달콤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졌거든.”

-흐음, 그래서 딕 영감님한테 그렇게 말했구나?

“응. 메리앤 아주머니의 감정이 느껴진 것 같았어. 그런데 마을의 다른 사람들에게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 어째서 메리앤 아주머니에게만 그게 보인 걸까?”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지?

“응, 한 번도 없었지.”

-묘하네. 새로운 능력이 개화하는 걸까?

제이든과 아실리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 위의 포이도 그와 아실리를 흉내 내듯 머리를 갸웃갸웃 기울였다.

* * *

“베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레이크빌의 옐로우 코우치에서 삯마차를 빌리면서 베로가 있나 봤는데 베로는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 다닌 말이라 잘 돌아왔나 보고 싶었는데요.”

제이든이 아쉬워하자 옐로우 코우치의 담당이 웃었다.

“삯마차의 말을 함부로 다루는 손님도 많은데 정이 많으시네요. 베로는 잘 돌아왔고 여행하시는 동안 잘 돌봐 주셨는지 건강 상태도 좋았습니다. 장거리 운행을 했기 때문에 한동안 목장에서 푹 쉬게 해줬어요. 다시 일 시작한 지 며칠 안 됩니다.”

베로의 마차는 이미 누군가 대여해 갔기 때문에 제이든은 다른 말이 끄는 마차를 빌렸다.

이번엔 이틀 거리의 스노우타운까지만 갈 단기 대여였다.

“스노우타운에 공용 포탈이 있으니까 거기서 포탈을 타고 델리움 시에서 환승한 다음에 레이든 시에서 한 번만 더 환승하면 카이에른까지 바로 갈 수 있을 거야.”

-경비 좀 들겠네.

공용 포탈은 가격이 워낙 비싸기도 하고 제이든의 경우 포탈 멀미도 있어서 선호하는 이동 수단은 아니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경치를 보면서 마차나 도보로 이동하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었고 포탈은 급할 때 단거리 이동에만 이용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포탈로 카이에른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포이, 포잉?”

포이가 까만 귀를 까딱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동그란 눈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왜 집의 포탈을 쓰지 않느냐는데?

아실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예전에 제이든이 처음 공간이동 포탈을 알게 됐을 때 제이든도 똑같은 질문을 했지.

공용 포탈은 출발할 때뿐 아니라 도착할 때도 당국의 관리를 받는다. 지구의 공항처럼 출발과 도착 시간을 미리 알리고 스케줄에 맞춰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공용 포탈에서 다른 공용 포탈로 이동하는 것은 사용료를 내고 시간 배정을 받기가 어렵지 않다. 공용 포탈에서 사설 포탈로 이동하는 경우 역시 도착지의 포탈 주인의 승인만 있으면 되지만 사설 포탈에서 공용 포탈로 이동하는 경우는 도착 허가를 받는 과정이 좀 까다로웠다.

지금이야 제이든이 꽤 이름이 알려져서 감정사 자격증으로 신원을 증명할 수도 있지만 그전에는 사설 포탈 소유자로서 신원을 증명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을 것이다.

-옛날에 사설 포탈을 이용해 마수를 다른 영지의 공용 포탈에 침투시킨 적도 있고 해서 관리가 강화되었어. 그러다 보니 사설 포탈의 좌표가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는 부작용이 있고.

공용 포탈의 좌표는 모두 공개되어 있지만 사설 포탈의 좌표는 주인이 원하지 않는 한 비공개가 원칙이다. 그런데 공용 포탈과 연계해 사용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가끔 좌표가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마법에도 해킹 같은 게 있다니 신기하단 말이지.’

-에너지 소모도 크고.

공간이동 포탈을 가동할 때는 일정량의 마력 또는 에너지가 소모된다. 공용 포탈의 경우 관에서 나온 담당 공무원이 가동시키기 때문에 승객의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지만 사설 포탈은 작동자의 마력이 소모된다.

니콜레타의 포탈을 가동할 때는 그녀의 마력을 소모하는 형태인 것이다.

-세시온이나 니콜레타 정도쯤 되면 공간이동으로 대륙 일주를 한다고 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제이든에게는 마력이 없다. 대신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숨겨진 계곡에서 아룬빌 마을까지처럼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동 거리가 길어질수록 에너지 소모가 컸다.

만약 세시온의 공간이동 포탈로 카이에른까지 직행하려고 했다간 이동 중에 제이든이 쓰러질 확률이 높았다.

“기를 쪽 빨리는 기분이라니까. 예전에 한번 장거리를 시도해 봤다가 무서워서 그 이후엔 못 하고 있잖아.”

포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알아듣기는 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스노우타운에 도착한 제이든은 마차를 옐로우 코우치에 반납하고 타운 역으로 갔다.

이 근방에는 공간이동 포탈이 있는 역이 여기뿐이었는데 꽤 오래된 역이었다.

“델리움 시까지 성인 1명, 고양이 1마리, 토끼 1마리. 에, 그러니까 요금이…….”

마차가 운행하는 쪽은 말과 사람들로 붐비는데 공간이동 포탈 쪽은 한산했다.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모자를 얼굴에 덮은 채 졸고 있던 포탈 관리원이 아실리와 포이의 요금을 책정하지 못해 당황하면서 허둥지둥 요금표 안내서를 한참 뒤진 후에야 겨우 사용료를 받고 표를 끊어주었다.

“죄송합니다. 공간이동 포탈 사용하시는 손님도 한 달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데, 포탈을 쓰려는 고양이랑 토끼라니, 제가 근무한 이후로는 처음이어서요.”

제이든 또래로 보이는 직원은 얼굴을 붉히고 제이든 일행을 마법진으로 안내했다.

아실리가 우아하게 마법진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하하, 고양이가……, 포탈을 한두 번 타 본 게 아닌가 보네요.”

-물론이지, 웬만한 마법사들보다 훨씬 많이 타 봤고말고.

아실리는 새침하게 고개를 들고 포탈이 움직이기를 기다렸고 제이든도 포이를 안은 채 그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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