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5화
35. 시계 괴도의 선물(2)
블랑셰는 현재 치안국 관할의 안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락은 할 수 없다.
마르틴 경감에게 주선을 부탁하는 서신을 쓴 뒤 우편국을 나오는 제이든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정 의뢰하는 서신이 몇 장 더 있었는데 눈에 안 들어와서 자세히 보지도 못하고 그냥 인쇄만 해서 들고 나왔다.
나중에 집에 가서 천천히 봐야지. 지금은 가릉빈가문 수막새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네.
그래도 너무 기대는 하지 말자.
제이든은 손을 들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스스로 진정시켰다.
여태까지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잖아? 꼭 한국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유물이었지만 사실은 이쪽 세상의 동방 대륙에서 만들어진 물건이었던 적이.
그동안 제이든이 차원을 넘어온 게 아닐까 싶어 찾아가 확인한 물건 중 정말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확신이 드는 유물은 딱 하나였다.
톰슨 골동품상의 향로. 세시온 다미에르의 감정서가 붙어 있던 그 청자사자유개향로만이 차원을 건너온 물건이었고, 그럼에도 그 유물이 제이든을 집에 돌려보내줄 매개체는 아니었다.
그러니 확인은 하더라도 너무 기대하지 말자.
이쪽 세상의 동방 대륙에도 문양이 들어간 와당은 있었다.
렌이나 센, 시타는 물론 그 이전의 기란 왕조의 유물 중에도 용무늬나 화초, 상서로운 동물이나 새, 기사의 문양이 들어간 와당 등이 있었다.
‘하지만 가릉빈가문은 못 본 거 같아. 게다가 그 가릉빈가문은 해송박물관 소장품이랑 비슷했어.’
생각에 잠긴 채 플로렌스 부인의 빵집을 향해 걷고 있던 제이든은 누군가 등을 때리는 바람에 놀라서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 친구,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넋을 놓고 걷고 있어?”
딕 노인이었다.
“내가 저만치서 불렀는데도 못 듣고, 벌써 귀가 어두운 게야?”
“아니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어요. 잘 지내셨어요?”
“거 몸이 허해서 그런 거야,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이 벌써부터 그러면 안 되지. 저기 레이크빌에 새로 문 연 의원이 용하다니까 몸 보하는 포션이라도 한 병 사다 먹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참, 한국이나 카이엔이나 비슷하시단 말이지.
“허흠, 토끼 녀석이 제법 컸어. 그놈 그새 살이 통통하게 올랐네.”
제이든의 어깨 위에 앉은 포이를 바라보는 딕 노인의 목울대가 왠지 큼직하게 꿈틀했다.
제이든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고 아실리가 마치 딕 노인을 가로막는 것처럼 앞에 서서 하악질을 했다.
“아니 왜들 이래, 내가 뭐 잡아먹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가족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고양이랑 토끼만 글케 끼고 돌고 챙겨 먹이느라 제 몸 허해진 것도 모르면서.”
“아저씨, 저 몸 허하지 않아요. 아주 건강하다고요.”
“건강하긴 뭐, 젊은 놈이 넋 놓고 다니면서.”
못마땅하게 침을 꿀꺽 삼킨 노인은 다시 얼굴을 폈다.
“그건 그렇고, 나 좀 도와달라고 불렀어.”
“예? 무슨 일이신데요?”
혹시 또 전처럼 꿈을 감정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이번엔 진짜 진짜 중요한 거라고.”
노인은 제이든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주변을 살피고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이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직업이잖나. 그것도 아주 급수가 높은 감정사잖아, 그렇지?”
“음, 예. 뭐 그렇죠.”
“그럼 꼭 물건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진짜 급수 높은 감정사는 사람도 볼 수 있다던데.”
“……?”
노인은 일을 많이 해서 거친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붉히며 말했다.
“저어기, 채소가게 하는 메리앤 어멈 말이야, 그 어멈이 요즘 나한테 맘이 있는 거 같은데, 진짜로 맘이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좀 봐줄텨?”
“…….”
“그 어멈이 지금이야 나이도 꽤 먹었고 혼자 된 지도 오래여서 쪼글쪼글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인물도 좋고 애교도 많아서 마을 남정네들 속깨나 태웠다네.”
“아, 예, 메리앤 아주머니는 지금도 고우시지요.”
“그래, 자네 보는 눈이 있군, 그 어멈이 요즘 제프 영감이랑 나랑 채소 사러 가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오이나 호박 같은 걸 덤으로 주고 그러는데 그게 진짜로 그러는 건지 그냥 장삿속인지…….”
“이 영감탱이가 젊은 친구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언제 나타났는지 생선가게 제프 노인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딕 노인의 등을 후려쳤다.
“제이, 이 인간 말 듣지 말게,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 원.”
“아 왜! 자네도 메리앤이 웃는 게 심상치 않다 했으면서! 이 친구는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게 업이라니까 내가 한번 물어나 보는 건데.”
“아 시끄러워! 미안하네, 제이. 이 영감 때문에 나까지 망신살이 뻗치겠네.”
제이든은 제프 노인에게 질질 끌려가는 딕 노인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룬빌 마을은 이래서 좋다.
플로렌스처럼 따뜻한 사람도 있고 딕 노인처럼 엉뚱한 사람도 있고, 그런 딕 노인을 잡는 제프 노인도 있고.
한바탕 웃고 났더니 가릉빈가문 수막새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편해졌다.
“빵이랑 과자 사고 집에 가서 의뢰 서신 좀 보자.”
“냥!”
“포잇!”
* * *
어둠침침한 지하 공방 안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저주의 응답이 오지 않는 거지?”
검붉은 터번을 쓴 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벽에 그려놓은 마법진을 살폈다.
둥근 마법진의 가운데에는 제이든의 초상화가 여섯 개의 짧은 화살로 꽂혀 있었다.
그 아래에서는 붉은 향초가 몇 개 타오르면서 탁한 연기와 향을 내뿜는 중이었다.
“초상화의 색이 변하지 않았다. 저주가 먹히지 않았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노인이 초상화 아래 놓인 향로 안에 손을 넣었다 빼자 붉고 끈적한 용액이 그의 손가락에 묻어나와 흘렀다.
“주술도 정확했고 제물의 피가 부족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분명 마법사는 아니라고 했었지?”
“예. 감정 마법 외의 마법은 못 쓴다고 확인했습니다.”
한쪽에 시립하고 있던 수하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피의 저주가 먹히지 않는 거지?”
노인은 공방 안을 불안정하게 걸어다녔다.
“그놈, 혹시 이름이……, 제이든 로스가 진명이 아닌 건가?”
“…….”
“그래,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리가 없지.”
노인은 다시 옷자락을 펄럭이며 돌아섰다.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그놈, 손을 봐야겠어.”
“저…….”
수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탑이나 황궁과 관련도 없고 그냥 감정사인데, 내버려 두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야, 왠지 그놈이 계속 내 일을 방해할 것 같다는 불쾌한 느낌이 들어.”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올해 카이에른 경매가 언제지?”
“삼월 하순입니다.”
“셀레스테는?”
“유월입니다.”
“2급 감정사라면 당연히 카이에른과 셀레스테 경매에 참석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히 참석하도록 손을 써야겠군. 사람을 내세워 감정 의뢰를 보내도록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세르지오를 좀 오라고 해라. 이를 말이 있다.”
“예.”
제이든의 초상화 아래에서 불쾌한 향을 내뿜고 있던 붉은 향초가 후루룩, 검은 연기를 내뿜고 꺼졌다.
* * *
마르틴 경감에게 서신을 보낸 후 사흘에 한 번씩 아룬빌에 가서 사서함을 확인했는데 세 번째 갔을 때 답신이 와 있었다.
“카이에른 치안국으로 오면 블랑셰 양을 만나게 해 주겠대. 블랑셰 양이 기와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기로 했고.”
-응, 잘됐네.
“카이에른 경매 시간이랑 얼추 맞겠다. 그쪽 의뢰도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까 겸사겸사 일도 보고.”
제이든은 의뢰서를 검토해서 일정을 맞출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류하는 중이었다.
카이에른이나 셀레스테처럼 큰 경매를 앞둔 시기에는 경매품 관련 의뢰가 잘 들어오는 편이다.
경매 출품 물건은 경매장 측에서 고용한 감정사가 경매 전에 모두 감정을 하지만, 수집가들 역시 대부분 출품 전에 개인적으로 감정을 거친다.
카이에른이나 셀레스테 정도의 큰 경매에 출품할 물건이라면 이미 감정을 거친 지 오래된 물건이 많지만, 새로 구한 유물이나 골동품을 출품 전에 감정하려는 출품자도 항상 있는 법이었다.
반대로 물건을 낙찰받으려는 수집가들 역시 재력이 있는 이들은 경매에 동반해 입찰 시 도움을 줄 감정사를 고용하는 일이 많았고.
-어때? 흥미로운 의뢰가 좀 있어?
아실리가 물었고 제이든은 의뢰서를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유물이야 대부분 흥미롭지. 그렇지만 이번엔 의뢰 많이 안 받으려고. 경매일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고 파비안 뒤포르가 봤다는 기와 추적에 집중하고 싶어.”
-카이에른 경매는 볼 거지?
“응. 봐야지, 명색이 감정산데.”
의뢰서를 꼼꼼히 읽은 제이든이 몇 장을 추려냈다.
“로드포드 백작이랑 마르소 상단에서 의뢰가 들어왔네. 카이에른 경매에 동행해 주길 원하는 의뢰야.”
아실리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마르소 상단은 원래 동부 쪽에서 활동하지 않나? 셀레스테 경매만 가끔 참여한 걸로 아는데. 그리고 상단 전속 감정사도 있고.
“최근에 규모가 많이 커졌나 봐. 상단주도 수집가랄 정도는 아니었는데 최근 골동품 수집에 눈을 떴나 보네. 카이에른 경매 참여가 처음이니만큼 상단 감정사보다 믿을 만한 감정사를 원한대.”
-거기 감정사가 아마 가스파르 바실일 걸. 3급이라도 실력 있는 애라던데.
“아는 사람이야?”
-그 애 아버지를 알아. 세시온이랑 친분이 있었거든. 좋은 감정사였어.
로드포드 백작가는 재작년에 가보인 왕관의 복제품을 가려내는 일로 연을 맺은 적이 있는 곳이고, 그 외에도 몇 군데에서 경매 동반 의뢰가 들어와 있었다.
“경매에 참여한다고 다 함께할 수는 없으니까 경매에 동반하는 건 로드포드 백작가랑 마르소 상단만 하자. 두 군데 정도는 같이 봐도 될 거야. 나머지는 양해를 구하는 거절 서신을 쓰고.”
로드포드 백작가와 마르소 상단의 의뢰서를 따로 빼놓은 제이든이 다른 서신을 아실리에게 보여주었다.
“이거랑 이것도 흥미로운데, 한번 볼래?”
세밀하게 그린 유물의 그림이 동봉되어 있는 서신이었다.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동방 도자기인데 이번 카이에른 경매에 내놓으려고 한대. 선대에 감정을 받은 적이 있지만 감정서를 분실해서 이번 경매 전에 정확한 경매가 추정을 위해 감정을 받고자 한다는데.”
-제이든이 좋아하는 형태의 도자기네.
“응, 이런 달항아리는 보면 마음이 푸근해져.”
-의뢰인은?
“지안 수.”
-꽤 유명한 수집가지. 특히 동방 물건 쪽으로.
박식한 고양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어때?”
아실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의뢰인 신분 불분명한 의뢰는 받지 말자. 붉은 손의 단검 감정하러 갔다가 죽을 뻔한 거 잊었어?
“데 체나로의 보물선에서 나온 갑옷이라는데, 처음 보는 모양이라서 궁금했단 말야.”
제이든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이렇게 생긴 갑옷은 처음 보는데.
“그럼 경매 동반은 로드포드 백작가랑 마르소 상단, 경매 전 감정은 일단 이사벨라 브렌트, 레옹 바레, 지안 수, 이렇게 정하자. 카이에른 가면 현지 의뢰인이 또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보고.”
정리를 마친 제이든이 의뢰인들에게 답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