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4화
35. 시계 괴도의 선물(1)
서재에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보고 있던 제이든이 용의 눈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지난번 서재에서 쓰러졌던 날 이후로 더 읽을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에트루리안의 서 전체에서 그가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적은 분량이지만, 미루어 보면 앞부분은 마치 백과사전처럼 카이엔의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라든지 비밀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선별 기준은 알 수 없으나 용의 눈과 레칸도르의 금척에 대한 기록이 다 앞부분에 있었고, 제이든이 다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그와 관련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듯했다.
책의 뒤쪽이 카이엔의 앞날에 대한 예언인 듯했다. 책이 쓰인 지 이미 천 년이 지났으니 많은 부분이 이미 이루어진 역사일 테지만, 남은 부분이야말로 중요한 내용으로 짐작되었다.
카티야의 말처럼 내가 약속의 아이라면……, 제이든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각에 카이엔의 앞날에 닥쳐올 재앙을 막기 위해 선택된 약속의 아이는 원래 세시온 다미에르가 맞을 듯했다.
그런데 세시온이 맡겨진 일을 다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제이든이 불려온 것일까?
세시온의 후인으로서 그가 남긴 일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열두 개의 유물 중 남은 네 개를 찾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닫힌 문이 열리기 전에 누군가를 깨워야 하는데 그를 깨우지 못하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 혹시 그 누군가를 깨우지 못하면 차원 너머 한국에서 잠들어 있는 내 몸이 깨어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약속의 아이라고 해도 도대체 실감이 안 나는데. 정말 내가 맞는 걸까?
제이든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서재 밖으로 나왔다.
어쨌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머리는 좀 복잡하지만 며칠 푹 쉬었더니 몸 상태는 개운하게 좋아졌다.
매일 일과로 하는 달리기와 체술 훈련을 할 때도 몸이 가벼운 것이 여행 전보다 오히려 몸이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오늘은 마을에 나가 봐야겠다. 포이가 좋아하겠네.
* * *
“포이 어서 오렴, 아실리도 잘 지냈지?”
우편국의 미란다가 늘 그렇듯 명랑하게 그들을 맞았다.
집에 돌아온 후 우편국부터 들러서 밀린 우편물 확인을 했고, 그 후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우편물이 많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서신 몇 장 외에도 제이든의 사서함 주소로 소포가 하나 와 있었다.
“어제 스위프트 애로우 편으로 왔어요.”
서신은 우편집배조들이 배달하지만 부피나 무게가 있는 화물의 경우는 마차 택배를 이용한다.
예전에 소네트 경매 후 제이든이 이용했던 것처럼 고가의 미술품을 전문적으로 운송하는 회사도 있고, 보석류 등 고가품만을 다루는 회사도 있다.
일반 화물을 다루는 택배회사도 몇 군데 있는데 가장 대중적이고 배달 범위가 넓은 것이 ‘스위프트 애로우’ 택배였다. 문자 그대로 빠른 화살이라는 뜻인데 카이엔 전역에 퍼져 있는 대형 택배사다.
날개를 단 화살 그림이 그려진 작은 상자 위에 붙은 운송장을 보니 보낸 이는 카이에른 치안국의 마르틴 경감이었다.
“이 양반이 어쩐 일이지?”
시계 괴도 사건 후 헤어질 때 연락처를 주고받긴 했지만 웬 소포일까?
상자를 열어 보니 서신 한 장과 작은 상자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블랑셰 뒤포르.
서신을 펴 보니 마르틴 경감이 쓴 글이었다.
당시 시계 괴도로 체포되었던 블랑셰 뒤포르는 주거 침입 및 절도의 목적이 골동품 시계의 위작을 원래의 진품으로 바꿔주기 위한 것이었고, 장물 및 골동품 위조 조직 수사 및 체포에 도움을 준 공을 인정받아 실형을 받지 않고 집행유예로 선처되었다고 한다.
단지 한동안 주거 이전의 자유 없이 치안국의 보호 감찰 아래 생활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근신의 의미도 있겠지만 당시 대거 체포된 범죄 조직의 잔당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앙리 루소는 퇴원 후 치안국 관할 요양소에서 요양 중이고 블랑셰 뒤포르 양은 안가에서 시계 제작 및 수리에 전념하고 있소. 그녀가 최근 두 점의 시계를 제작했는데 피니어스 렌 감정사와 제이든 로스 감정사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치안국에 연락했기에 스위프트 애로우 편으로 보내오.
작은 상자를 열어 보니 블랑셰의 편지와 함께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회중시계가 하나 들어 있었다.
기다란 은사슬 끝에 달린 둥근 회중시계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한눈에 보아도 상당한 수작이었다.
뒷면의 금속 뚜껑에 정교하게 새겨진 작은 고양이와 토끼가 오직 제이든만을 위해 만든 시계임을 보여준다.
뚜껑 안쪽에는 우아한 글씨체로 ‘제이든 로스 님께, 블랑셰 뒤포르로부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제가 다시 시계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제이든 로스 님과 피니어스 렌 님 두 분의 덕분이에요.
두 분을 위해 제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 보려고 정성을 다했고, 최근 마음에 드는 작품 제작에 성공했기에 두 분께 한 점씩 보내드립니다.
보내드리는 시계에는 할아버지가 남기신 마정석 중 제일 좋은 것을 사용했어요. 감정사님들이라면 아시겠지요? 셀리비네온 섬의 마정석이랍니다.
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마정석을 사용하지 않는 옛 시계 제조법도 공부 중이지만 아직은 터득하지 못했거든요.
언젠가 옛 시계 제조법을 완전히 익히게 되면 그때 마정석 없이 온전히 옛 방식으로 제작한 시계를 하나 더 만들어 드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귀여운 토끼와 고양이도 늘 건강하기를 빌어요.
제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갈색 곱슬머리에 파란 눈을 지녔던 소녀를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조부의 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블랑셰가 마음의 짐을 벗고 홀가분해진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이거 봐, 아실리, 뚜껑에 너희들 모습이 새겨져 있어.”
시계를 아실리와 포이에게 보여주자 포이가 신기한 듯 시계에 코를 박을 것처럼 들여다보다가 즐거운 듯이 귀를 흔들며 꺄륵거렸다.
“좋아? 예쁘지? 형도 아주 맘에 들어.”
-그 아가씨 실력이 좋네. 그 나이에 이만한 시계를 만들다니. 역시 명인의 후계자인가.
아실리도 감탄한 듯했다.
“그렇지? 이 정도의 실력자가 자칫하면 도둑질만 하다가 끝날 뻔했는데, 다시 시계 장인의 길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그 애 할아버지도 이제 마음 놓고 눈을 감겠다.”
가슴이 포근해진 제이든이 시계를 다시 손에 들고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시계의 만듦새나 세공이 훌륭한 것은 물론이고 셀리비네온 섬의 마정석을 쓰다니, 더구나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면 큰맘 먹고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시계에 사용되는 마정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셀리비네온 섬의 마정석은 기계의 동력으로 사용할 때 가장 상품으로 치는 마정석이었다.
남부와 동부 경계 즈음 해안의 섬에 있는 산에서 나는 마정석인데 채취가 어렵고 시중에 풀리는 양도 적어서 가격이 매우 높았다.
마정석을 사용한 시계는 태엽을 감을 필요가 없지만, 사용한 마정석이 노화하면 시간이 맞지 않기 시작하고 교체해야 할 때가 온다.
마정석을 사용한 시계가 상용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륙전쟁 이후부터인데, 당시에 제작된 시계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차차 시간 오차가 커지거나, 고장이 나는 와중에 셀리비네온 섬의 마정석을 사용한 시계들은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수명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셀리비네온 섬의 마정석을 쓴 시계들은 제작 후 삼백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거뜬하게 작동하고 있다.
블랑셰의 조부인 파비안 뒤포르는 이름난 시계 장인이었으니 셀리비네온 섬의 마정석을 보유하고 있었겠지만 개인이 소유한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텐데.
선물로 만든 시계에 귀한 마정석을 아낌없이 사용한 블랑셰의 마음이 따뜻했다.
-제이든, 여기 종이가 한 장 더 있는데?
아실리가 상자 바닥을 앞발로 톡톡 건드렸다.
“아 정말이네? 미처 못 봤어.”
시계 아래쪽에 종이 한 장이 더 접혀 있었다.
종이를 펼쳐 보니 독특한 도안이 한 장 그려져 있는 아래에 블랑셰의 글이 몇 줄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작품과 기록을 공부하는 중에 독특한 도안을 새긴 시계 뚜껑을 하나 봤어요.
시계는 없고 뚜껑뿐인데 할아버지가 동방에서 온 기와 문양을 보시고 시계에 이용할 수 있을까 시험해 보신 거라고 적혀 있어요.
피닉스나 그리핀을 도안화한 것 같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요.
처음 보는 형태라서 감정사님이 혹시 알아보실까 해서 그려 보냅니다. 한번 봐주세요.
종이에 그려진 도안은 제이든에게 몹시 익숙한 형태였다.
“이거, 가릉빈가문 수막새인데?”
-가르릉……, 그게 뭐야?
아실리가 제이든의 말을 따라 해 보다가 혀가 꼬여서 눈살을 찌푸렸다.
“가릉빈가문 수막새(迦陵頻伽紋 圓瓦當), 가릉빈가라는 새를 새겨넣은 기와를 말하는 거야. 이거, 이거야말로 내 고향에서 온 물건 같아.”
흥분 때문에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가릉빈가’란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다.
산스크리트어 가라빈가(Kalavinka)를 한역한 것으로,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으며 극락정토에 산다고 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통일신라의 기와, 석탑 등에서 가릉빈가의 모습을 본뜬 장식을 볼 수 있다.
수막새는 쭉 이어진 기왓등의 가장자리 끝부분에 붙이는 장식 기와인데 연화문, 귀면문, 사자문 등 다양한 도안이 사용되었다.
가릉빈가문 수막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중에도 있고, 부산시립박물관 등 몇 군데 박물관에 있다.
하지만 제이든이 그림을 보고 가슴이 덜컹하도록 놀란 것은 블랑셰의 그림이 해송박물관에 있던 가릉빈가문 수막새와 무척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수막새의 가릉빈가 무늬는 대개 공작새처럼 날개를 펴고 정면을 향한 부조가 많은데, 해송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수막새의 가릉빈가는 약간 옆으로 몸을 틀고 한쪽 날개는 펴고 한쪽 날개는 반쯤 접어 내린 드문 형태였다.
자세도 그렇고 머리에 쓴 화관이나 손에 든 악기도 위엄보다는 우아함을 강조한 디자인이었다.
블랑셰가 보낸 그림은 그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많이 닮아 있었다.
“만약 이 가릉빈가문 수막새가 해송박물관의 소장품이었다면 내가 카이엔에 왔을 때 같이 넘어왔을 텐데, 그렇다면 블랑셰 양의 할아버지가 봤다는 와당과는 시기가 안 맞는데…….”
제이든이 미간에 주름을 잡자 아실 리가 야옹 울었다.
-시간의 왜곡이 있을 수도 있지. 예전에 공간이동 포탈이 처음 만들어져서 안정화가 안 되었을 때, 같이 출발했는데 서로 다른 시간대에 목적지에 도착한 경우가 종종 있었어.
아실리는 앞발로 콧잔등을 긁고 나서 말했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마법의 길에서 주운 기기묘묘한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포탈을 시험하던 마법사가 포탈이 제작되기도 전의 과거 시간대로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어. 그 책이 워낙 온갖 풍문을 다 모아 놓은 책이라서 신빙성은 좀 떨어지지만.
아실리의 말을 들으며 제이든은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차원을 넘어올 때 함께 넘어온 해송박물관의 소장품이 몇십 년 전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을까?
지구와 카이엔의 시간 흐름이 다른 것은 분명한 듯하고, 그렇다면 시공을 넘어오는 동안 서로 다른 시간대에 떨어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거였다.
“이 그림은 파비안 뒤포르와 블랑셰 뒤포르, 두 사람이나 건너온 거라서, 아무래도 내가 원형을 봐야겠어.”
파비안 뒤포르가 봤다는 동방의 기와를 확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