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2화
34. 다시 집으로(3)
니콜레타가 눈을 어찌나 크게 떴던지 눈 주변의 쪼글쪼글한 주름이 다 펴진 것처럼 보였다.
“레칸도르의 금척이라고? 그것도 세시온 님이 찾으라고 하신 유물이니?”
“예.”
니콜레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차를 두어 모금 삼키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야 그녀가 제이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설명도 없이 그런 걸 함부로 내보이면 어떡하니? 마법진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런 보물을 늙은이 눈앞에 들이대려면 미리 설명을 했어야지. 레타논의 유적 이야기는 그렇게 대충 넘어가 놓고. 이 나이에 이렇게 놀라면 심장에 해롭다고!”
“죄송합니다. 마법진이랑 팔각병 얘기부터 끝내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니면 아예 입을 딱 다물고 있던지.”
잠시 제이든의 허리춤을 보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어디 가서 절대로 보여주거나 말하지 마라. 뭐 사람들이 쉽게 믿지도 않겠지만, 에트루리안의 서에다가 레칸도르의 금척이라니, 네가 정말 특별한 운명을 가진 아이는 맞나 보구나.”
“그럼요. 에트루리안의 서는 경매장에서 구한 거라 어차피 문관국에서 제가 보관하는 걸 알지만, 금척은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니콜레타 님이니까 보여드린 거예요.”
니콜레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래, 믿어줘서 고맙구나. 그만 옷 내리고 네가 봤다는 환각 얘기 좀 자세히 해보렴.”
“아, 네.”
제이든은 얼굴을 붉히면서 스웨터 자락을 내려 금척을 덮었다.
제이든에게 레타논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니콜레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찻잔이 빌 때까지 차만 마시다가 무릎담요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레칸도르의 금척을 훔쳐 간 게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였어. 마르첼로가 왕가의 보물을 훔쳤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게 레칸도르의 금척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금척이 사라진 게 알려진 건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여서 사람들이 연관 짓지 못했는데 왕가에서 금척의 분실을 숨겼기 때문인 거구나.”
“예, 그리고 아까 마법진 이야기를 말씀드릴 때 우물에서 팔각병을 꺼냈다고만 말씀드렸는데, 그 팔각병을 꺼내온 게 사실 이 금척이에요.”
제이든의 말을 들은 니콜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트루리안의 서도 자신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지. 레칸도르의 금척도 자신이 도울 사람을 정하는 모양이구나.”
“처음에 가짜 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단 제가 금척을 알아본 이후로는 스스로 자아를 가진 것처럼 움직였어요.”
“그래, 사실 레칸도르의 금척에 ‘운명을 재는 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긴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애당초 자인지 아닌지 어떤 형태인지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아마 옛 아르카니오 왕가 사람들은 알았겠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고.”
니콜레타는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세시온 님이 그 유물을 찾으라고 했고 네가 결국 두 가지나 찾아낸 걸 보면 분명히 의미가 있을 거다. 뭔가 알게 되면 내게도 알려 주렴.”
“예.”
제이든의 찻잔이 비자 은제 금입사 찻주전자가 눈치 있게 제때에 차를 따랐다.
니콜레타가 그 모습을 보며 미소했다.
“이 찻주전자만 해도 자아가 강한 편이지만 얘는 내 마법의 힘을 빌었지. 에트루리안의 서라든지 레칸도르의 금척이 가진 자아는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지도 몰라.”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마르첼로의 후손이라는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니콜레타는 찻잔을 내려놓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에게 후손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자식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에 관한 기록은 워낙 지워진 부분이 많으니까. 하지만 세르지오가 그의 후손이라는 말은 믿기 어려운데. 물론 오래전의 가계도까지 조사해 본 적은 없으나 세르지오의 몇 대 전 조상까지는 마법에 뛰어난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세르지오가 더 각광을 받기도 했지.”
“칼리스타 님께 듣기로는 오래전 조상 중에 대마법사가 있었다고 했다는데.”
“세르지오가 방계 출신이긴 해도 아르카니오 성씨를 쓰는 왕가의 후예 중에 조상 중 대마법사가 없었던 사람이 있겠니. 아르카니오는 마법 왕국이었고 옛 왕족들은 모두 마법사였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 조상 중에도 대마법사가 있지.”
잠깐 머리를 끄덕거리며 생각에 잠겼던 니콜레타가 말을 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설령 세르지오가 진짜 마르첼로의 후예라 하더라도, 누군가 세르지오에게 그걸 주입한 자가 있겠지.”
“그 노인 말씀이시죠?”
“응. 마르첼로의 흑마법은 대가 끊어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 그 노인은 분명히 상당한 수준에 이른 흑마법사일 거야.”
“그런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마다 홀리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노인에 대해선 내가 좀 알아보마. 세르지오 정도의 마법사를 꼬여내서 부릴 정도면 만만한 인물이 아닐 거다. 세렌토나 콜레디오바의 일도 심상치 않고……. 아무리 자신에 대해 숨겼어도 어딘가 정체를 알아낼 만한 흔적이 있겠지. 네가 그려준 초상화가 큰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도움이 된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너도 몸조심해라.”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이든을 보았다.
“알게 모르게 네가 몇 번이나 그들의 계획을 망쳐 놓았잖니. 보복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흑마법에 빠진 자들은 앞뒤 가리는 게 없으니까 항상 조심해.”
“예.”
니콜레타는 가게 한쪽에서 마리오와 놀고 있는 포이와 제이든의 옆을 떠나지 않고 주의 깊게 니콜레타의 말을 듣고 있는 아실리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아실리와 포이가 있어 다행이구나.”
“그렇죠. 저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이든도 아실리와 포이를 향해 애정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 * *
니콜레타의 골동품 가게에서 하루 쉰 후 그녀의 사설 포탈을 이용해 숨겨진 계곡을 향해 떠나려는 참이었다.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이걸 가지고 가렴.”
니콜레타는 자그마한 수정구 하나를 제이든에게 주었다.
“마법사들이 서로 연락할 때 쓰는 수정구란다. 우편국의 영상구와는 달리 실시간 쌍방 소통이 가능하지. 하지만 네가 마법을 못 쓰니까 우리는 쌍방 소통은 안 되겠지만, 내가 너한테 연락해야 할 때 바로 연락을 보낼 수는 있으니까.”
그러니까 답신을 보낼 수는 없지만 바로 연락을 받을 수는 있다는 거로군.
제이든이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다 배낭에 넣고 니콜레타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저는 일단 집에 가서 금척에 대해 좀 알아볼게요.”
“그래라, 몸조심하고. 아실리랑 포이도 잘 가거라.”
* * *
“역시 집이 좋다. 집이 최고야!”
공간이동 포탈에서 걸어 나온 제이든은 익숙한 집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스토시엔 산의 숨겨진 계곡, 세시온의 집에 돌아오니 드디어 모든 긴장이 풀리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작년 시월 초에 숨겨진 계곡을 떠나 레타논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는데 해가 바뀌고 2월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게 되었네.
4개월 정도의 여정이었지만 어찌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아실리와 포이도 집에 돌아온 게 좋은지 마루에 깔린 양탄자 위를 아무렇게나 뒹굴면서 기지개를 켰다.
“자, 금척부터 제자리에 놓고 오자.”
책으로 가득한 세시온의 서재는 변함없이 광대했다. 문을 연 제이든은 오래된 책 내음을 맡으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던 오래된 종이 냄새가 정겹게 느껴졌다.
가장 안쪽 세 번째 서가에서 열두 개의 유물을 위한 비밀 서가를 열었다.
네 단의 공간 중 위로 세 단이 차 있고 마지막 단만 비어 있는 서가가 나타났다.
제이든이 허리에 손을 대자 금척이 저절로 스르르 풀렸다.
마지막 단의 첫 번째 칸에 금척을 놓자 에트루리안의 서를 놓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서가의 받침대가 빛나기 시작했다.
에트루리안의 서를 놓았을 때는 청색 빛이었는데 금척을 놓은 자리는 금빛으로 물들었다가 금척이 받침대에 꼭 맞게 자리를 잡고 나서 은은하게 빛무리가 사라졌다.
“자, 이제 에트루리안의 서를 한번 볼까?”
확신은 없었지만 새 유물을 가져다 놓으면 책을 조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제이든이 에트루리안의 서에 손을 대었다.
책의 앞을 막고 있던 보호막이 역시 그의 손을 막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지난번에 용의 눈을 꺼낼 때도 책을 먼저 만진 다음에 꺼낼 수 있었지.
제이든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조심스럽게 용의 눈을 꺼냈다. 그의 손이 닿자 거울이 마치 반갑다는 듯이 살짝 빛났다.
거울이 은은히 빛나기 시작하면서 지난번처럼 에트루리안의 서도 같이 빛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금척에서도 은은한 빛무리가 일기 시작했다.
금척을 얻은 뒤로 계속 팔에 감기거나 허리에 감기거나 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금척의 한쪽 끝에 꽃잎 같은 세모꼴의 장식 조각이 있었다.
진주조개처럼 보이는 이 장식은 책의 표지와 용의 눈에 있는 장식 조각과 원래 하나였던 것이 쪼개진 것처럼 똑같았다.
세 개의 유물에서 일어나는 빛무리가 서로 이어지더니 딸깍! 에트루리안의 서를 닫고 있던 죔새가 풀렸다.
책이 혼자 열리더니 후르륵 넘어가다가 멈췄다.
예상한 대로 레칸도르의 금척이 그려져 있는 책장이었다.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용의 눈을 들고 그 부분을 비춰 보았다.
용의 눈이 유리처럼 투명해지면서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레칸도르의 금척……, 운명을 재는 자.”
* * *
제이든이 눈이 빠지게 집중해서 에트루리안의 서를 읽고 있을 그 무렵, 어느 지하 공방에서 음침한 음성이 울렸다.
“알아 왔느냐?”
“예. 2급 감정사 제이든 로스라고 합니다.”
“내력은?”
“출신 내력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 은둔한 전대 감정사나 학자의 제자가 아닐까 한답니다. 본인이 사문의 내력을 밝힌 적은 없으나 독학으로 그 나이에 2급 감정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음.”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2년 전, 아니,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3년 전부터입니다. 감정사 시험을 보기 시작하고 일 년 반 만에 5급, 4급, 3급 시험을 모두 통과했고 그 후 2급 감정사 시험에 합격하는 데 일 년밖에 안 걸렸답니다. 활동기간은 길지 않은데 제법 굵직굵직한 감정 일을 많이 했네요. 동방 유물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초상화나 기록된 영상은?”
“정식으로 그린 초상화는 없는 것 같지만 그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려 보게 했습니다.”
보고하던 자가 그림을 내밀었고 주름진 손이 그림을 받아서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더 젊은 놈이군. 거주지는?”
“원래 어디 살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감정 일을 시작한 뒤로는 계속 여행을 다니고 있어서 거주지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최근 정보에 따르면 아스토시엔 산 주변 어딘가에 거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생년월일이나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게 아쉽군.”
“저주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흐린 등불 아래에서 검붉은 터번을 쓴 노인이 음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묘하게 사사건건 내 일에 방해가 되는 녀석이야. 이번에 마법진을 깨뜨리고 나간 것도 분명히 이 녀석이라는 느낌이 왔다. 앞으로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하니 치워야지.”
“마법사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음, 마법사라면 함부로 저주 마법을 쓸 수 없지만 일반인이니 홀가분하게 저주를 걸 수 있겠어.”
노인이 저주 마법을 쓴 사람들의 말로를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던 수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 공방 한구석에서 끓고 있는 검은 솥을 곁눈질했다.
“그에게 속한 물건이나 신체의 일부가 없어도 괜찮습니까?”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생년월일이 없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노인은 자신만만하게 주름진 입가를 비뚤어지게 올리면서 제이든의 초상화를 쥐었다.
“카이엔의 하늘 아래서 태어난 자, 이름과 얼굴을 아는 한 내 저주를 피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