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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21화 (121/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1화

34. 다시 집으로(2)

크림색과 밤색이 모두 사라지고 은색과 보라색이 주변을 물들인 후, 한참 만에 안개가 모두 걷히자 눈앞에는 몸집 작은 할머니와 검정고양이가 보였다.

“어서 오너라, 얘들아. 기다리고 있었단다. 많이 피곤하지?”

별과 달 무늬가 그려진 포탈의 마법진 밖으로 나서자마자 니콜레타가 그들을 맞았다.

“어디 보자, 다친 데는 없고? 몸은 아프지 않니? 그동안 활약이 많았다는 소식은 들었다. 우리 아실리는 여전히 예쁘구나. 제이든도 돌보고 포이도 돌보느라 고생 많았지? 포이야, 요 귀염둥이, 그새 제법 컸구나?”

오랜만에 손주들을 맞이한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호들갑스럽게 그들을 맞이한 니콜레타는 이 층 침실에 그들을 밀어 넣었다.

“할 얘기가 많겠지만 우선 씻고 한숨 자거라. 다들 엄청 피곤해 보인다. 욕실은 맞은편에 있단다.”

아닌 게 아니라 침대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피로가 밀려왔다. 니콜레타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어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제이든이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아실리와 포이는 이미 침대 한쪽에서 둘이 껴안고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잠들어 있었다.

요 녀석들도 무척 피곤했나 봐.

제이든은 하품을 하면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새로 빨았는지 이불과 베개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옆구리에 달라붙은 고양이와 토끼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제이든도 베개에 머리를 놓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 오랜만에 푹 자고 난 개운함이 느껴졌다.

“포오이!”

그가 눈을 뜬 것을 보고 하얀 솜뭉치가 답삭 안겨들었다.

“우리 포이, 깨어 있었구나?”

포이가 가장 먼저 깬 모양인데 제이든과 아실리가 워낙 곤하게 자니까 깨우지 않고 참았나 보다. 원래는 얼굴을 비비거나 목깃을 잡아당기면서 막 깨우는데.

“우리 포이 철들었네. 형아 더 자라고 안 깨운 거야?”

-다 내가 잘 가르친 덕이지.

아실리가 눈도 뜨지 않은 채 잠꼬대처럼 종알거렸다.

“아, 좋다.”

주변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이렇게 푹 잔 게 얼마 만인가. 제이든은 몸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켠 후 아실리와 포이를 한꺼번에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침대에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몸이 아주 개운했다.

욕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오는데 아래층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포이가 먼저 계단을 통통 튀며 내려갔고 제이든과 아실리가 뒤를 따랐다.

“일어났니? 배고프지?”

가게 안쪽의 탁자에 접시와 그릇을 놓고 있던 니콜레타가 주름진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어서 내려오렴, 내가 간만에 빵을 좀 구웠단다.”

탁자 위의 바구니에는 갓 구운 빵이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쌓여 있었고 작은 단지에 담긴 수프와 샐러드 접시가 함께 놓였다.

낮은 탁자에 따로 놓인 고양이용 간식과 채소, 사과는 아실리와 포이를 위한 거겠지?

제이든의 배에서 저절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와! 냄새가 정말 죽이는데요!”

“포잇!”

포이가 신이 나서 깡충거리며 자기 몫의 그릇 앞으로 달려갔고 아실리도 기분 좋게 코를 울렸다.

“잘 먹겠습니다.”

국자로 단지에 담긴 수프를 떠서 그릇에 붓던 제이든이 멈칫했다.

“이거, 로얄 테이센의 수프 그릇이네요?”

“그래, 예쁘지? 찻잔은 많이 볼 수 있지만 수프 그릇은 흔하지 않지.”

“예. 실은 이번 여행에서 로얄 테이센의 수프 그릇과 관련된 일이 있었거든요.”

에롤의 수프 그릇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니콜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레스 아켈리오가 8년 만에 깨어났다는 말은 들었다. 네가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지.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예.”

“잘했다. 과연 세시온 님의 후인이야. 우선 식사부터 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렴.”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니콜레타가 주방을 향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수프 그릇 이야기가 나온 김에 로얄 테이센의 찻잔으로 차를 마셔볼까? 푸른 장미 시리즈는 아니다만.”

“좋지요.”

주방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지난번처럼 다기 일습을 실은 바퀴 달린 탁자가 나오질 않았다.

“응? 왜 이렇게 늦지?”

눈살을 찌푸린 니콜레타가 다시 한번 손뼉을 치고 나서야 주방에서 딸그락대던 소리가 멎더니 작은 탁자가 굴러왔다.

지난번에도 봤던 아센토르산 흑단목 탁자였다.

“응? 아니 왜 둘 다 나왔니?”

니콜레타가 당황한 얼굴로 탁자 위의 다기들을 바라보았다.

로얄 테이센의 흰 장미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 그리고 지난번에 본 렌 시대의 은제 금입사 다기 세트가 탁자 위에 조금 비좁은 듯 끼어 있었다.

로얄 테이센의 흰 장미 다기 세트는 움직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은제 금입사 찻주전자는 불만스럽게 뚜껑을 달그락거리면서 뜨거운 김을 퐁퐁 뿜어냈다.

“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요 샘꾸러기 같으니.”

니콜레타는 웃으면서 손가락 끝으로 찻주전자의 뚜껑을 톡톡 두드렸다.

“이 아이가 널 좋아하는구나. 지난번에 네가 왔다 간 걸 기억하고 있어서, 이번에 다른 다기 세트를 불렀더니 심통이 났구나.”

찻주전자는 뾰로통하게 니콜레타 쪽으로 등을 돌리고는 제이든을 향해 우아하게 몸을 살짝 기울였다.

“지난번에 네가 칭찬해 준 걸 기억한단다. 그래서 너한테 차를 대접하고 싶은 거야.”

“아……, 고마워.”

제이든은 멋쩍게 찻주전자를 향해 말했고 찻주전자는 기쁜 듯이 뚜껑 사이로 김을 퐁 뿜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 네가 제이든에게 차를 주렴. 나는 이쪽 아이의 차를 마실게.”

니콜레타가 마치 살아 있는 아이에게 하듯 찻주전자를 다독거리고 로얄 테이센의 찻주전자를 들어 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은제 금입사 찻주전자는 인사하듯 살짝 뚜껑을 끄덕여 보이고는 제이든의 찻잔에 천천히 차를 따랐다.

“고마워.”

왠지 인사를 해야 할 듯해서 인사하고 난 제이든이 찻잔을 들었다.

“역시 맛있네요.”

찻주전자가 기분 좋게 한 바퀴 맴을 돌았다.

“그 로얄 테이센은 움직이지 못하나요?”

은제 금입사 찻주전자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감정 표현까지 하는 것에 비해 로얄 테이센의 찻주전자는 일반 찻주전자처럼 보였다.

“아, 이 아이는 아직 연식이 부족하단다. 좋은 물건이고 자질은 충분하지만, 그 찻주전자처럼 자아를 가지려면 한참 더 오래 살아야 하지. 아직은 그냥 마법으로 주방에서 불러오는 것 정도만 가능해.”

“그렇군요.”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

제이든은 우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한 후 마법진에 걸렸던 이야기는 자세히 했다.

“동물들은 다 풀어 줬고, 제웅은 그곳을 떠나기 전에 태웠고요. 이게 그 팔각병이에요.”

손수건에 싸가지고 온 흑수정 팔각병의 조각을 보이자 니콜레타는 어두운 눈을 했다.

“그래, 세르지오의 흔적이 보이는구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흑수정 조각을 들고 새겨진 술식을 살펴보더니 탄식했다.

“세르지오, 그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그 아까운 재주를 가지고.”

“…….”

“지난번에 밤의 경매장 금고 설계에 세르지오가 가담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만 해도 돈 때문인가 싶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레노아가 콜레디오바의 상자를 가지고 왔지.”

니콜레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늘은 네가 이걸 가지고 왔구나. 이건 앞의 두 가지와는 달라.”

그녀는 마음이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걸 보니 세르지오가 흑마법에 손을 댄 게 확실하구나.”

“앞의 것들은 그렇지 않은가요?”

“경매장의 금고나 콜레디오바의 상자는 뛰어난 마법 실력을 악용한 사례지만 흑마법은 아니야. 그런데 이 팔각병의 술식에는 어둠의 마법이 깃들어 있구나.”

니콜레타는 다시 탄식하면서 물었다.

“제이든, 네가 환각 속에서 봤다는 노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렴.”

제이든은 장기인 관찰력을 살려서 노인의 모습을 되새겨보았다.

“몸집이 작더군요. 니콜레타 님보다 조금 클 정도일까? 여윈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었고 얼굴빛은 검었습니다.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이 아니라 탁하게 어두운 색이었어요.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눈은 가늘고 입술은 얇았습니다. 검붉은색 터번을 쓰고……, 아니, 이렇게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그려서 보여드릴게요.”

침실로 올라가 배낭에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가져온 그가 환각 속에서 본 노인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게 안에 한참 동안 색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니콜레타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아실리는 조용히 제이든이 그리는 그림을 지켜보았다.

포이만 한쪽 구석에서 검은 고양이 마리오와 꼬리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한번 보세요.”

제이든이 내민 스케치북을 받아든 니콜레타가 감탄했다.

“너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구나.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 이 정도면 감정사가 아니라 화가를 했어도 먹고 살겠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화가의 고양이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감정사의 고양이를 만나서 말이죠.

제이든이 아실리를 곁눈으로 보면서 살짝 웃었다.

“본 적이 없는 노인인데, 팔각병을 만들 수 있다고 했으면 마법사임이 틀림없겠지. 마탑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흑마법사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 노인이 세르지오에게 바람을 넣은 모양인데 언제부터일까.”

“그 노인이 세르지오에게 대마법사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후손이라고 했어요.”

“정말이냐?”

“예, 분명히 들었습니다.”

니콜레타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되다니.”

“그게 누군가요?”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묻자 니콜레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아주 오래전, 수백 년 전에 아르카니오 왕궁의 대마법사였다는 자의 이름이란다. 아르카니오의 옛 기록을 연구한 마법사 두세 명 외에는 이제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지. 그의 이름이 금기가 된 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으니까.”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그 사람은 당대 최고의 마법사로 이름을 떨쳤다더구나. 왕족 출신의 대마법사로 최대의 존중을 받았었는데, 마법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결국 흑마법까지 손을 대었다더라.”

“…….”

“흑마법은 마약과 같지. 한 번 그 맛을 보게 되면 홀리기 쉽거든. 흑마법에 빠져든 그는 더 강력하고 더 위력적인 마법을 연구한다는 미명하에 사람으로선 못 할 짓을 하기 시작했다더라. 이를테면 어린 고아를 납치해서 마법의 희생물로 쓴다든가 하는 것 말이지. 결국 주위의 공분을 샀고 그를 존경하던 마법사들도 등을 돌렸고 왕궁에서 체포령을 내렸다는데 그는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도망쳤다고 해.”

“예에…….”

“그가 도망칠 때 왕궁의 사람들과 마법사들을 여럿 죽인 것은 물론 왕가의 보물을 훔쳐서 도망치는 바람에 왕궁에서도 끈질기게 추적했다고 하는데 결국 잡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었어.”

“…….”

“그 이후 아르카니오 마법사들의 계보에서 그의 이름은 지워졌어. 왕궁에서도 그가 왕궁 마법사로서 이룬 업적을 삭제했고 그 이후 마르첼로라는 이름은 아르카니오에서 금기가 되었단다. 제이든, 왜 그러니?”

이야기를 듣던 제이든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을 알아차린 니콜레타가 걱정스럽게 물었고 제이든은 침을 꼴깍 삼킨 후 대답했다.

“저 그 마법사를 본 것 같아요. 환각 속에서요. 그리고 그가 가져간 왕궁의 보물이 뭔지도 알아요.”

“뭐라고?”

“아까는 마법진 이야기를 빨리하려고 다른 건 간단히 넘어갔는데, 레타논에 제가 찾으러 갔던 유물이 바로…….”

제이든은 긴 스웨터를 걷어 올려 니콜레타에게 허리춤을 보여주었다.

“이겁니다. 레칸도르의 금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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