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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20화 (12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20화

34. 다시 집으로(1)

-뭐 좀 보였어? 제이든?

“응. 이따 가면서 말해 줄게.”

제이든은 흑수정의 마지막 조각을 손수건에 넣고 잘 싸서 손수건의 네 귀를 모아 매듭을 지었다.

손수건을 배낭에 넣은 뒤 포이와 함께 옹크리고 있는 토끼들에게 살짝 손을 내밀었다.

아기 토끼는 스스럼없이 그의 손가락에 코를 비볐지만 어미 토끼는 아직 경계심이 있는 듯 뒤로 조금 물러섰다.

목덜미의 털이 빠진 부분에 흐린 흉터가 보였다. 피를 받기 위해 칼로 상처를 냈던 자국이겠지.

“고생 많았구나, 얘들아. 이제 괜찮아. 다들 집에 가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괜찮아.”

이 순박한 동물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갇혀 있었을까.

환각 속에서 본 동물들은 나가고 싶어서 마법진 안을 뺑뺑 맴돌고, 울면서 나무를 긁거나 땅을 파기도 했었다.

지금은 오래 갇혀 있다 보니 지치고 체념했는지, 정작 풀려났는데도 진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아, 이것 봐. 이제 나갈 수 있단다.”

제이든이 일어서서 마법진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실리가 살랑살랑 따라왔고 포이도 깡충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봐, 괜찮지? 나올 수 있어. 이리 와 봐.”

마법진의 바깥까지 무사히 나간 제이든이 손을 흔들어 보이자 포이도 뒷발을 탕탕 구르면서 이쪽저쪽으로 깡충거렸다.

아까 마법진의 가장자리까지 나갔다가 물러섰던 눈사슴이 다시 용기를 냈는지 제이든 쪽으로 향했다.

옅은 갈색의 등에 흰 점이 드문드문 박혀 있고 하얀 배를 한 우아한 동물은 날씬한 다리를 조금씩 떨면서 움직이더니 마침내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었다.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란 얼굴을 한 사슴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저래서 사슴 눈, 사슴 눈 하는구나 싶게 맑은 눈이었다.

사슴은 마법진 밖에서 천천히 몇 걸음 걸어 보더니 조금씩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껑충껑충 튀어 오르듯 달리던 사슴은 점점 더 속도를 더해 가더니 거의 날아갈 듯 달리면서 산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달리고 싶었을까! 얼마나 제 무리를 찾아가고 싶었을까!

마치 시간을 뒤로 빗겨내듯 달려가는 사슴의 뒷모습에 제이든은 가슴이 뭉클했다.

사슴이 달려가는 모습을 본 하늘다람쥐가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더니 삐이익 소리를 지르고는 경계선 바깥의 나무를 향해 글라이더처럼 날아갔다.

마법진 바깥의 나뭇가지에 새처럼 내려앉은 다람쥐는 자신이 진 바깥에 나와 있는 걸 확인하더니 꺄악 소리를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폴짝거리며 정신없이 뛰던 다람쥐가 제이든의 곁으로 도르르 굴러오더니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마구 비볐다.

“그래, 그래, 됐어,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자, 이제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가면 된다.”

포이가 깡충깡충 뛰면서 진 안의 토끼들을 향해 나오라고 재촉했다.

다람쥐도 뭐라고 삐익삐익거리면서 안에 있는 동물들을 격려하는 것 같았다.

어미 토끼가 아기 토끼와 함께 깡충깡충 뛰어서 경계선을 넘었다.

아기 토끼가 신기한 듯 뒤를 돌아보다가 포이의 옆으로 깡충깡충 뛰어와서 서로 코를 비벼댔다.

“잘했어. 다들 잘했어. 이제 너구리만 남았네?”

너구리 우리에는 두 마리의 너구리가 있었다.

검정 털의 너구리 한 마리가 우리 안의 짚더미에 누워 있었고 제이든이 아까 봤던 밤색 털의 너구리는 문간에 서서 안타까운 눈으로 제이든 일행이 있는 쪽과 우리 안을 번갈아 보았다.

-저 안에 있는 너구리가 아픈가 봐. 그래서 못 나오나?

아실리가 말하면서 너구리 우리 쪽으로 갔고 포이도 폴짝폴짝 따라갔다.

그 뒤를 따라간 제이든이 너구리에게 가까이 가자 짚더미에 누워 있던 검은 너구리가 제이든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더니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하긴 사람에게 잡혀서 피도 바치고 이렇게 갇혔으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다른 동물들이 너무 온순한 거였다.

동물의 상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냥 보기에 건강 상태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보기엔 그리 아파 보이지 않는데…….”

문 쪽에 있던 밤색 너구리가 안쪽에 들어와서 누워 있던 너구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구리는 사람이 손을 쓰는 것처럼 앞발을 잘 쓴다.

마치 사람이 동료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처럼 제 짝을 잡아당기던 너구리가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짝 때문에 울상이 되었다.

-얘는 마음이 병든 거야.

아실리가 나지막이 야옹거리면서 우리 안에 있는 먹이그릇과 물그릇을 바라봤다.

-여기서 마을 사람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 먹이랑 물은 저절로 공급되게 마법을 걸어 놨겠지. 모르긴 몰라도 병에 걸리지 않는 장치도 해놨을지 몰라.

아실리는 슬픈 듯 고개를 흔들고 검은 너구리에게 가까이 가더니 살그머니 머리를 핥았다.

너구리는 몸을 움찔했지만 고양이에게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아실리는 포이를 핥아줄 때처럼 너구리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그루밍해 주면서 말했다.

-먹이가 있다고, 몸이 병에 안 걸렸다고 마음까지 안 아픈 건 아니잖아.

제이든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 살 때, 동물원에서 우울증에 걸려 밥도 잘 안 먹고 움직이지 않는 동물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는 제 털을 피가 나도록 뽑거나, 고개를 계속 흔들거나, 우리 안을 끝없이 맴도는 등 이상행동을 반복하는 동물도 있었다.

사람이나 동물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내는 이러한 행동을 정형행동(定型行動, Stereotypic behavior)이라 하는데, 이런 걸 보면 동물도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이 너구리는 아마 이 마법진에서 나가려는 시도를 반복하다가 지쳐서 마음의 병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마법진 안에 있는 빈 우리 두어 개를 바라보았다.

환각 속에서는 동물이 몇 마리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저 빈 우리에도 다른 동물이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제이든이 오기 전에 스트레스에 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포잇, 포잇!”

밤색 너구리가 다시 제 짝을 일으키려고 잡아당기자 포이가 검은 너구리의 등을 밀었다.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자 검은 너구리가 귀찮은 듯이 일어나 앉았다. 사람이라면 염세적이라고 할 만큼 표정 없이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제이든이 너구리의 앞에 앉았다.

“미안해, 나쁜 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하지만 이제 기운 내서 일어나 보렴. 친구들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니.”

“포잉, 포잇.”

포이가 팔짝팔짝 뛰었고 어느새 너구리의 우리까지 돌아온 토끼들과 다람쥐가 너구리를 격려하듯 저마다 뭐라뭐라 종알거렸다.

검은 너구리는 천천히 다른 동물들을 둘러보고 멀리 마법진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던 너구리의 얼굴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경쾌한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눈사슴이 산모퉁이를 돌아 달려오는 중이었다.

곧바로 너구리 우리 앞까지 달려오는 사슴과 함께 코끝이 쨍하게 싸늘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마치 사슴이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법진 자리 안으로 몰고 들어온 것처럼.

사슴이 즐거움을 못 이기는 듯이 짧고 하얀 꼬리를 흔들며 춤추듯 경쾌하게 너구리 우리 주변을 돌았다.

다람쥐가 커다란 눈망울로 너구리를 바라보며 코를 발름거리고 토끼들도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자, 같이 나가자. 친구들이 모두 기다리잖아.”

마침내 검은 너구리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자 마치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어린이들처럼 작은 동물들이 너구리를 에워싼 채 까불거리며 마법진 밖으로 움직였다.

마침내 마법진의 경계가 있었던 자리 밖으로 빠져나간 검은 너구리는 마치 사람처럼 가슴을 펴고 하늘을 보면서 몇 번이나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지막으로 나온 눈사슴이 몸을 낮추더니 뒷발로 흙을 파서 마법진 쪽으로 끼얹었다.

소심하게 분노를 표출한 눈사슴은 제이든에게 다가와 인사하듯 촉촉한 코를 손에 살짝 비비고 나서 산으로 달려갔다.

토끼와 하늘다람쥐, 너구리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마법진 밖으로 흩어졌다.

“잘됐다. 이제 다들 자유롭게 살렴. 덫이나 함정, 사냥꾼 조심하고!”

제이든의 외침 아래에서 포이가 폴짝거리며 앞발을 흔들었고 아실리도 꼬리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떠나가는 동물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 * *

마법진 때문에 고생한 게 액땜이 되었는지 그 이후 세렌토까지의 길은 아주 수월했다.

무난히 세렌토에 도착한 제이든은 디안느 영애와 에머리 자작의 환대를 받았다.

세렌토 백작의 지휘하에 영주직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디안느 영애와 영주 대리를 맡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에머리 자작은 몹시 바빠 보였다.

“그런데 백작님 얼굴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제이든이 말하자 디안느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죠? 몸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덕분에 저도 마음의 부담이 많이 덜해요. 백부님도 한동안 기운이 없으셨는데 요즘은 에머리를 가르치실 생각에 다시 활기가 생기셨어요.”

디안느는 이미 혼례를 올렸지만 딜런의 일로 충격받은 세렌토 백작의 몸이 더 나빠질까 봐 아카디아로 가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다행히 백작이 심기일전하고 털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붉은 손의 단검이 사라진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작의 병도 더 좋아진 것 같고.

아카디아 백작과 포니는 아카디아로 돌아가고 없었기 때문에 포니를 만날 생각에 들떴던 포이는 좀 시무룩했다.

제이든은 우선 우편국에 가서 니콜레타의 사서함으로 긴급 영상을 전송해 마법진에 대한 내용을 알렸다.

동시 통화가 안 되는 게 아쉬웠지만 지난번 니콜레타의 골동품점에서 영상구의 주소와 사설 포탈의 좌표를 받아 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디안느가 직접 사람을 붙여서 우편국에 답신이 오는 대로 성으로 연락하라고 말해 준 덕분에 두어 시간 만에 니콜레타의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벌써 떠나시게요?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텐데.”

“괜찮습니다. 빨리 가서 일을 끝내고 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오겠습니다.”

“그래요. 동부로 오게 되면 아카디아에도 들러 주세요. 아실리와 포이도 잘 가렴.”

레타논에서 콜레디오바를 거쳐 세렌토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마법진 일도 있어 몹시 피곤하고 지치기는 했지만 허리에 레칸도르의 금척도 있고, 배낭에는 흑수정 조각도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질 않았다.

좀 무리하더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서 편한 마음으로 쉬고 싶었다.

원래는 세렌토 중앙역에 있는 공용 포탈을 사용할 예정이었는데 디안느가 성에 있는 영주 전용 포탈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시동어를 읊자 좌표를 지정하는 창이 떠올랐고 제이든은 전에 기억해 두었던 니콜레타의 골동품점 좌표를 지정했다.

크림색과 밤색이 섞인 안개가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좀 오래된 포탈 같은데 이동감은 나쁘지 않네.

“응, 멀미도 안 나고 괜찮은데?”

세시온이나 니콜레타의 사설 포탈만은 못했지만 공용 포탈보다는 이동감이 훨씬 좋았다.

속도도 꽤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를 둘러싼 안개에 은빛과 보랏빛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니콜레타의 포탈이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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