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9화
33. 산간 마을(4)
“어라? 아주머니랑 여자애는 어디로 갔지?”
어리둥절한 제이든의 얼굴을 본 포이가 팔짝팔짝 뛰면서 앞발로 갈색 토끼를 가리켰다.
“아……, 그럼. 이 토끼들이.”
-수인이 아니고 진짜 토끼였구나.
아실리의 말을 들으면서 쪼그려 앉은 제이든이 갈색 토끼 모녀를 내려다봤다.
알고 보니까 토끼들의 유순한 얼굴에서 아까 그 여자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깡충거리는 발걸음이나 움직임이 토끼 같더라니.
카이엔에 온 지도 몇 년이나 되어서 마법이나 수인에 익숙한데도 이렇게 사람이 금방 동물로 변하는 모습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카티야 씨를 보기는 했지만 변신하는 걸 직접 본 게 아니어서 그런가.”
제이든이 중얼거리자 아실리가 미야옹 울었다.
-그거랑은 달라. 카티야 씨는 직접 변신을 할 수 있지만 이 토끼들은 변신한 게 아니라 마법진에 들어온 사람 눈에만 인간으로 보인 걸 거야. 저기 좀 봐.
아실리의 고갯짓을 따라 주변을 돌아보자 안개가 깨끗이 걷힌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생각보다도 더 작았다.
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작은 공간으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어째서 마을이라고 느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마법진이 깨지기 전에 본 모습과 같은 것은 우물과 한 채의 집뿐이었다.
우물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제이든의 썰매가 보였다.
말의 고삐는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우리의 뒷문 옆 울타리에 묶여 있었다.
“저거 아까 이 아주머니랑 여자애, 아니 이 토끼들이 나온 집이잖아.”
집으로 보였던 것은 큼직한 동물 우리였다.
그 맞은편에도 비슷하게 지어진 우리가 있었고 그 우리의 문간에서는 너구리 한 마리가 놀란 듯한 얼굴로 앞발을 들어 올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까 물에다 뭘 씻던 아주머니가 저 너구리였네.”
복면을 쓴 듯 눈 주위가 까만 너구리는 지금도 뭔가를 씻고 있었는지 물그릇 앞에 있었다.
그럼, 나무 위에 있던 남자아이는?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회색의 동물 하나가 날개를 쫙 펴고 글라이더처럼 우물 옆의 나무까지 날아오더니 낮은 가지에 매달려 눈을 또록또록 굴렸다.
복슬복슬한 회색 몸체에 하얀 배, 커다랗고 동그란 눈망울이 귀여운 동물은 가까이에서 보니 날개가 아니라 네 다리 사이의 피막을 이용해 날아온 거였다.
“하늘다람쥐였구나!”
이제 보니 하늘다람쥐의 얼굴 표정이 아까 본 사내아이와 똑같았다.
하늘다람쥐는 보통 다람쥐들과 달리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나와서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마을에 있던 열 채 남짓의 집은 한 채 빼고는 모두 동물의 우리였다.
문이 잠겨 있지는 않아서 동물들이 드나들기는 하지만 마법진의 범위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제이든이 처음 갔던 데릭의 집 한 채만이 사람의 집 모양을 한 오두막이었다.
집 뒤의 마구간도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오두막도 마구간도 낡아 있었다.
그럼 데릭은?
-저거네.
아실리가 집 옆에 쓰러져 있는 형체를 가리켰다.
얼핏 보았을 때 사람의 시체인가 싶어 깜짝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지푸라기로 만든 사람 크기의 인형이었다.
“제웅이었구나.”
짚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주술이나 액막이 등에 사용하는 인형을 제웅이라 한다.
고대 한국을 비롯해 지구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던 제웅이 카이엔에서도 사용되는 걸 보면 역시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비슷한 듯하다.
짚으로 만든 제웅은 데릭이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주민들의 모습으로 보였던 건 마법진 안에 갇힌 동물들이고, 이 제웅이 사람을 진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나 봐.”
-팔각병이 깨져서 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구나.
토끼와 다람쥐, 너구리, 눈사슴 등의 동물들이 주춤거리며 마을 복판으로 나왔다.
마법진이 깨진 걸 느끼는지 우물 주변의 제이든 일행을 바라보면서 웅성거리듯 모여 섰다가 조금씩 움직여 보기도 했지만 마을 밖으로 벗어날 엄두는 안 나는 것 같았다.
그중 용기 있는 눈사슴 한 마리가 주춤거리면서 마을의 간격 가장자리까지 걸어 나갔다.
바깥쪽으로 나가 볼까 싶은 눈치로 발을 몇 번 들썩거리다가 겁이 나는지 도로 물러섰다.
“이제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 그전에 할 일이 있지.”
잠깐 동물들을 둘러본 제이든이 배낭에서 손수건을 꺼낸 뒤 쪼그리고 앉았다.
흑수정 팔각병의 깨진 조각을 그냥 두면 동물들이 다칠 수도 있고, 마법 물품이라 깨끗이 수거해야 할 거였다.
“가지고 가서 마탑에 맡겨야겠어.”
흑수정 팔각병은 제이든이 돌바닥에 힘껏 내리쳤음에도 산산이 부서지지 않고 여덟 개의 조각으로 깨끗하게 쪼개진 채 반짝이고 있었다.
병 안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액체가 마치 피처럼 보여 기분이 나빴다.
제이든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팔각병 조각을 주워서 손수건에 담았다.
“이 흑수정은 금이 잘 가는 재질이라 뭘 새기기가 어려운데 섬세하게도 새겼네.”
끌이나 조각도를 잘못 대면 그 자리에서부터 실금이 가기 쉬운 흑수정이라 세공이 어렵다.
옛 아르카니오에서는 보석 세공 장인들의 실력을 볼 때 흑수정 세공을 맡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명인의 밑에서 수학한 장인에게 흑수정을 주고 스승이 제시한 물건-화병이라든지 장신구라든지-을 제대로 세공해 내면 독립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세공이 까다로운 만큼 흑수정 물품 위에 장식을 할 때도 새겨넣는 것보다는 금사나 은사를 붙이거나 특수한 안료를 사용해 세필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흔히 사용되었다.
예술품이 아니라 마법 매개체로 사용할 때도 세필로 술식을 써넣는 방식을 많이 채택한다고 들었는데.
“실리, 마법 물품은 네가 나보다 훨씬 많이 봤을 텐데, 이렇게 정교하게 술식을 새긴 흑수정 본 적 있어?”
수정 조각을 햇빛에 비춰 보며 제이든이 말하자 아실리가 초록 눈으로 수정 조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세필로 술식을 써넣은 건 꽤 여러 개 봤는데 새겨넣은 건 몇 개 못 봤어. 그것도 대부분 단순한 거였고. 이만큼 정교한 거라면…….
아실리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옛날에 세시온과 마탑에 갔을 때 술식이 새겨진 흑수정 펜던트를 본 적 있어. 이 팔각병보다는 작은 거였지만 이거 못지않게 정교한 솜씨였어. 그때 마법사들이 막 천재가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그 펜던트를 세시온에게 보여줬던 게 기억나.
“그래? 누가 만든 거였는지 알아?”
-니콜레타 님이었어. 그때는 아직 젊은 마법사였지.
“아, 정말? 역시 아르카니오 마법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특별한 재능이나 비법 같은 게 있는 건가.”
일곱 개의 조각을 손수건 안에 넣고 마지막 조각을 주워드는데 조각에 새겨진 문양이 기묘하게 반짝이며 제이든의 눈길을 끌었다.
무심코 흑수정 조각을 눈 위로 들고 햇빛에 비춰 보는 순간 마치 수정에 새겨진 문양이 급격히 커지는 것처럼 제이든의 시야를 가득 채웠고 그는 빨려 들어가듯이 수정 조각에 몰입되었다.
* * *
눈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수정의 팔각병이었다.
깨지기 전의 팔각병이 몸체에 정교한 마법 문양과 술식을 가득 새긴 채 탁자 위에 놓인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제이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박으로 제목이 적힌 책들, 연구서,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항아리, 실험관, 그리고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별과 달 무늬가 든 로브와 뾰족한 모자.
한눈에 보기에도 마법사의 공방으로 보이는 방이었다.
그래, 이 팔각병의 과거로 들어온 거구나.
그는 탁자 위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팔각병을 바라보았다.
넌 내게 뭘 보여주려고 하는 거니?
잠시 후 밖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말이냐? 흑수정에 술식을 모두 새겨넣었다고?”
가래를 긁는 듯 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럼 정말이죠. 제가 누굽니까?”
앞의 목소리보다는 좀 젊은, 중년의 목소리가 대답하면서 그를 따라 들어왔다.
머리에 터번처럼 생긴 두건을 두른 몸집이 작은 노인이 재빨리 탁자에 다가가 흑수정 팔각병을 살펴보았다.
“오호! 대단하군. 흑수정 용기 두세 개는 깨뜨릴 거라 생각했는데 첫 번째에 바로 성공하다니.”
“아르카니오 흑수정은 예전에도 몇 번 다뤄본 적이 있습니다. 이만큼 복잡한 술식을 새긴 건 처음이지만.”
노인을 따라 들어온 사람은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적갈색 곱슬머리와 회색 눈, 초상화에서 본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였다.
“역시 대마법사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의 후손답구나. 잘했다. 이런 재주는 아르카니오 마법사가 아니면 부리지 못하지, 암!”
노인이 대견하다는 듯 세르지오의 등을 두드렸다.
“역시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른 법이야. 난 팔각병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이런 술식을 새길 자신은 없었는데.”
“병을 만드신 것만도 대단하지요.”
“그럼, 진을 구성하러 가볼까?”
그들이 팔각병이 든 상자를 가지고 방을 나선 뒤 제이든의 의식 역시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제이든의 의식이 보는 장면이 바뀌었다.
아까 그 산속 우물 옆이었다.
“동물은 이 정도로 충분할까요?”
세르지오가 물었다.
동물 우리가 이미 만들어져 있고 우리 안에 토끼며 너구리, 하늘다람쥐와 눈사슴 등이 갇혀 있었다.
“그래, 마을 사람들로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중요한 건 제웅이지. 목표물에 맞춰서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니까.”
“그런데 꼭 여기에 진을 설치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세르지오가 묻자 노인이 굳은 얼굴을 했다.
“얼마 전 예지몽을 위한 의식을 치른 걸 알고 있겠지? 대계를 위해 향후 몇 년간의 미래를 봐두기 위해 다소 무리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의식을 집행했는데.”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보려고 했던 것들 외에 뭔가 신경에 거슬리는 놈이 하나 나왔어. 계속 내 일을 방해하게 될 것 같더군. 그놈을 제거할 만한 방법을 생각해 봤는데 아직은 어디 사는 어떤 놈인지 정확히 모르거든. 하지만 그놈이 지나갈 곳 몇 군데를 봤다. 그중 여기가 제일 무난해.”
“언제쯤이 될지는 아십니까?”
“모른다. 몇 주 후가 될지 몇 달 후가 될지. 하지만 이삼 년 안에는 분명히 온다. 내가 그 이상은 보지 못했으니까. 이건 그냥 미리 놓아두는 덫이야. 일단 여기 빠지기만 하면 며칠 못 가 말라 죽게 된다.”
노인은 말을 끊고 손짓을 했다.
“시작해라. 어느 놈부터 할까?”
“토끼부터 하죠.”
세르지오가 우리 안에 있던 아기 토끼의 목덜미를 쥐고 들어 올렸다.
어미 토끼가 필사적으로 아기 토끼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는 발로 어미 토끼를 걷어찬 뒤 작은 칼로 아기 토끼의 목덜미를 찔렀다.
“그만둬!”
제이든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통과할 뿐이었다. 당연히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끼익끼익 울면서 발버둥 치는 아기 토끼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릇에 받은 노인이 눈짓하자 세르지오는 아기 토끼를 던지고 어미 토끼를 잡아들었다.
다행히 상처를 깊게 내지는 않았는지 잡힌 동물들이 죽을 것 같지는 않아 제이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물들의 피를 담은 그릇에 노인이 뭔가 주문을 외자 피가 시커멓게 변하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제 이걸 팔각병에 담고 묻으면 된다. 어디 보자.”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원래는 교차로의 중심에 묻는 게 효과가 좋겠지만 여기는 그럴 만한 데가 없으니 우물에 가라앉히는 게 좋겠다.”
세르지오가 목덜미에서 피를 흘리는 다람쥐를 우리에 던져 넣고 문을 닫으려 하자 노인이 말했다.
“문은 닫을 필요 없다. 집 밖을 다니는 것이 보여야 주민들 같지. 어차피 이 팔각병이 부서지기 전에는 아무도 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우리 안에 물과 먹이는 계속 생성될 테니까 알아서 제 우리 안에서 살겠지. 어차피 짐승들 아니냐.”
“그런데, 혹시 말씀하신 그놈이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진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냥 재수 없는 놈들인 거지. 몇 명이 먼저 빠져 죽는다면 진의 효력이 더 강해질 테니 오히려 괜찮다.”
세르지오는 조금 질린 얼굴을 했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들이 팔각병을 우물 안에 가라앉히고 마을을 떠난 후, 토끼와 다람쥐를 비롯한 동물들은 울면서 마을 안을 빙글빙글 돌았지만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너구리가 힘없이 자기 우리 안으로 들어가 건초더미 위에 엎드리는 것을 보면서 제이든의 의식은 천천히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